<-- 말레이드 -->
오백 군세 중 삼백이 시오도크군이었다. 멜루니악군도 군터의 눈에는 약졸이었으나, 그래도 그들은 시오도크군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 시오도크군은 북부의 군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나약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거의 배에 살이 토실토실하게 찐 살마드군 급이었다.
그런 이들이 느닷없이 군사작전에 동원됐다. 더군다나 말레이드로 향한다는 것과 그곳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를 소문까지 이미 쫙 퍼진 터라 군의 사기는 첫날부터 말이 아니었다.
‘심각하군.’
얼굴표정만 보면 무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새끼 같았다. 전장에 데려가면 적 앞에서 무릎 꿇고 질질 짜기나 하다가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군터는 시오도크를 나선지 하루가 다 가기 전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하여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논의키 위해 그날 밤 다른 두 백인장들을 그의 막사로 불렀다.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도 더 심각하오. 태반에 가까운 놈들이 저 모양이니 다른 병사들마저 영향을 받지 않소이까.”
감정은 병처럼 퍼진다. 우중충한 분위기의 두 백인대 때문에 나머지 병사들의 분위기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나마 군터의 휘하들만이 그런 것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있을 뿐.
“문제인 것은 알지만…어쩔 수 없지 않겠소? 그 녀석들의 대장이 얼마 전에 역모를 꾀하다 목이 날아가지 않았소이까. 대장도 없이 얼마동안 불안에 떨던 녀석들이오. 그리고 지금은 사지나 다름없는 전장에 떠밀려 나가고 있지. 그런 상황에서 어찌 사기가 정상적일 수 있겠소? 또, 그런 녀석들에게 우리가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소?”
시오도크의 백인장, 우지스가 말했다. 멜루니악의 백인장 메이딘도 그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놈들, 전혀 의욕이 없군.’
그럴싸하게 이유를 대기는 하지만 그다지 진심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들은 기운도 없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타의로 떠밀리듯 온 거라지만 그래도 지휘관이라는 작자들이 이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짜증이 모락모락 치솟았다.
군터가 불편한 감정을 품자 그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새어나왔다. 그에 두 백인장이 움찔했지만 그래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애초에 의욕이 없는 자들을 두려움으로 윽박지른다하여 무슨 건설적인 결과물이 나오겠는가. 결국 첫 번째 지휘관 회의는 심대한 짜증만을 남긴 채 소득 없이 끝이 났다.
지휘관 및 병사들이 의욕이 있건 없건, 두려워하건 말건 군터는 쉼 없이 길을 재촉했다. 그는 시오도크를 나선 첫날부터 보병들의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강행군을 벌였다. 덕분에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병졸들 사이에서는 군터에 대한 원성이 급속도로 높아져갔다.
특히 군터가 기병대장인 점이 크게 작용했다. 자기네들은 편히 말을 타고 가면서 발로 걷는 우리들만 고생시킨다는 거였다. 군터도 스스로 느낀 바도 있고, 수하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어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자 살라스를 비롯한 수하들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괜찮겠습니까?”
“기병은 기병이고 보병은 보병이다. 상황이 급한데 사정 봐준다고 갈 길을 늦춰서야 되겠느냐. 어차피 불만인 놈들은 뭘 해도 불만이다. 직접적으로 들고 일어서지 않는 한은 무시해라. 그렇게 내 욕이라도 하면서 속이나 풀라고 해라.”
시체처럼 무기력하게 늘어지는 것보다는 무슨 욕이든 실컷 해대면서 독기라도 품는 쪽이 백배 더 낫다. 어쨌거나 분노라도 품으면 힘은 나니까 말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군터는 밤마다 귀가 가려운 것쯤은 충분히 참아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시오도크를 나서고 엿새째 되던 날. 그렇게 모른 척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십여 명의 병사들이 집단 탈영을 한 것이다. 탈영을 한 그 밤에 즉각 추적에 나선 기병대에 의해 붙잡혀 온 그들은 포로처럼 포박당한 채 개처럼 질질 끌려왔다.
군터는 숙면을 취하고 있던 모든 병사들을 깨우고 그들을 중앙으로 모았다.
별과 달이 빛나는 캄캄한 밤. 진영 중앙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탈영을 했던 열 두 명의 병사들이 포박당한 채로 무릎 꿇려져 있었다. 자신들의 운명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그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일부는 눈물을 보였고, 또 일부는 다 포기한 듯 멍해 있었다.
군터는 검 한 자루를 든 채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 수백 명의 병사들을 두루 훑어보며 사나운 기세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맨손으로 찢어죽일 것 같은 군터의 기세 때문인지, 아니면 이 참담한 상황 때문인지 병사들은 자그마한 말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무거운 적막 속에 들리는 소리라곤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무릎 꿇은 탈영병들이 내는 울먹임 소리뿐이었다.
“이 얼굴들을 잘 봐둬라!”
병사들을 노려보듯 훑던 군터가 시선을 거두고 크게 일갈했다. 그의 고함이 터지자 평화롭게 일던 불길이 거칠게 흔들렸다. 무릎 꿇고 있던 탈영병들도 고통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바로 앞에서 터진 고함소리에 귀가 아파 온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군터는 계속해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시오도크의 백인장이었던 디파르그와 그 일당이 역모의 죄를 짓고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았다는 것을 너희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찢어죽일 놈들이었고, 실제로 디파르그는 죽고 난 다음이지만 사지에 더해 목까지 뽑혔다. 바로 얼마 전에 성주께서 성 광장 중앙에서 행한 일이니 너희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일뿐더러, 그 형이 너무나 잔혹했기 때문이다. 칼밥 먹는 군졸들 사이에서도 그 형의 집행을 보고서 구역질을 하거나 후에 악몽을 꾼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놈들의 죄도 그 디파르그와 별 다르지 않다! 여기 이놈들도 역적 놈들이란 말이다!”
군터는 탈영병 중 한 명을 발로 밀듯 걷어찼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쓰러진 탈영병의 머리를 발로 눌렀다. 탈영병이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지만 내리누르는 억센 힘은 그의 발버둥보다 훨씬 더 강했다.
군터가 밟고 있는 그 탈영병은 십인장이었다. 졸병도 아니고 십인장이 탈영을 한 것이다. 따로 심문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일을 주도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우리 같은 군인들이 이제껏 나라의 녹을 받아먹은 이유가 무엇이더냐! 바로 이럴 때 제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무기를 들고 싸우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 비로소 제 역할을 하라고 하니 싸우기 싫다고 도망을 쳐! 이놈들은 배신자다! 황제 폐하를 배신했고, 제국을 배신했으며, 제국의 백성들을 배신했고, 동료이며 전우인 우리를 배신했다! 이게 역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아니 그러한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군터가 입을 떼기 전처럼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러자 군터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로 일갈했다.
“대답해라! 아니 그러하냔 말이다!”
“그렇습니다!”
비명 같은 대답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제야 군터는 흉악하게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풀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발아래 벌레처럼 꿈틀대는, 오늘 오후까지 십인장이었던 탈영병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성주께서 하셨던 방법 그대로 처벌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군의 대장직에 있는 나의 재량으로 간략하게나마 형을 집행하겠다. 메이딘, 우지스 대장. 혹 이의 있으시오?”
원군의 대장은 군터였지만 메이딘이나 우지스는 부대장인 동시에 같은 백인장이었다. 따라서 군터는 예의상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물론 그들의 말 따위는 “이의 없소.”외에 달리 들을 생각이 없었다.
메이딘과 우지스도 눈치는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군터의 살벌한 기세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들이 낼 수 있는 말은 군터가 기다리고 있는 한 마디 밖에 없었다.
“이의 없소.”
“나 역시, 이의 없소.”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군터는 머리를 탈영병의 머리를 짓누르던 발을 떼었다. 그리고 번개같이 검을 뽑아 그의 목 한 가운데에 내리 찍었다. 칼날이 목 정중앙을 뼈 채로 꿰뚫었다. 탈영병은 비명도 내지 못한 채 목과 입으로 피를 토했다. 목 아래 팔 다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군터는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나 그가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개새끼!”
“죽어서도 저주하겠다!”
탈영병 중에서 악에 받친 몇몇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군터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깔끔히 무시하고 서서히 생기가 꺼져가는 탈영병의 목에서 검을 뽑아냈다. 높이 튄 핏물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뭐라고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그 누구도 비겁자들을 구제하지는 않아. 너희가 죽어 떨어질 곳은 너희와 비슷한 놈들이 우글거리는 구더기굴일 뿐이지. 그래서인지 너희의 저주는 내게 오히려 축복처럼 들리는군.”
검을 빙글빙글 돌리던 군터가 한 순간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열한 명의 탈영병들의 몸에 한 군데씩 검을 찔러 넣었다. 하나 같이 치명적인 급소였다. 울컥 솟아나오는 자신의 피를 보며, 탈영병들은 비명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쓰러져 땅을 기었다.
“이놈들의 최후를 잘 봐둬라! 얼마나 불명예스럽고 비참한 죽음인가! 이놈들의 시신은 땅에 묻지도, 태우지도 않는다! 짐승들의 밥이 되도록 이 자리에 버려두고 갈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역적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고, 이름을 부를 수 없다! 알겠는가!”
“예!”
바짝 굳어 있던 병사들이 곧장 답했다. 군터는 피로 점철 된 검을 모닥불 앞에 내리 꽂았다. 깊숙이 파고 들어간 검이 불빛을 받아 섬뜩함을 자아냈다.
“내일 우리가 다시 길을 떠날 때까지 그 누구도 이놈들을 건드리지 마라. 이놈들은 여기서 이대로 벌레와 짐승들에게 뜯길 것이다.”
군터는 훽 뒤돌아 성큼성큼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의 뒤로 살라스를 비롯한 휘하 십인장들이 따랐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누구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
“잘했다.”
군터는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치하의 말부터 꺼냈다. 만약 탈영병들을 한 놈이라도 놓쳤더라면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속한 대응과 치밀한 추적으로 모조리 잡아들인 덕에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어우. 저희가 다 섬뜩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좋게 달래서 이끌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극약처방이라도 쓰는 수밖에.
두려움을 더 큰 두려움으로 누른다. 군터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들고 혹독한 처벌을 직접 행한 이유였다.
“한 번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철저히 감시해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적을 만나기도 전에 열두 명의 병사를 잃었다. 하지만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열둘이 아니라 백이십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었다. 아군이 될 수 없다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어려운 전장에 앞두고 필요한 것은 겁쟁이가 아니라 함께 싸워줄 아군이다. 짐짝이 아니라.
“한 시가 급하다. 이대로 가면 열흘은 더 지나야 말레이드에 닿을 수 있는데…….”
“하오나 이 이상 속도를 냈다가는 보병들이 버티지 못합니다.”
살라스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군터는 마뜩찮은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마음만 앞서서는 아무것도 안 되지.”
일전에 베브로스의 난을 토벌할 때 어떤 멍청한 사령관을 보며 그것을 아주 확실히 배웠다. 서둘러야 할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막상 일군을 지휘하는 입장이 되니 가슴이 계속 시도 때도 없이 딴 소리를 했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군.’
오백 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끄는 것은 달랑 열 명, 백 명을 이끄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려해야 할 부분도 많았고, 인내해야 할 부분은 더욱 많았다. 특히 후자가 군터에게는 어렵게 다가왔다.
그러나 해내야 한다. 달랑 오백조차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더 높은 곳을 어찌 노릴 수 있겠는가.
========== 작품 후기 ==========
이제 조금씩 조정이 되는 것 같네요. 앞으로도 꾸준히 성실연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재미있게 봐 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