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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11화 (111/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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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군세를 이끌고 돌아온 타르가이 베르겐은 우중충한 기색인 포라칸을 보고 피식 웃었다.

“표정이 좋지 않군. 몸은 좀 괜찮나?”

“몸은 괜찮습니다. 다만 마음이 상했을 뿐입니다. 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큰 실책을 범했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말로는 괜찮다 하지만, 실제로 괜찮을 리는 없었다. 실제로 옷 사이로 드러나는 부분에는 큼지막한 붕대가 감겨 있었고, 진한 약의 냄새도 났다.

“여전히 엄격하군. 큰 실책이라고 하기에는 큰 피해도 없지 않았나.”

“냉정해야 할 자리에 앉아 필부처럼 굴었으니 제게는 군을 이끌 자격이 없습니다.”

“됐네. 난 자네에 어떤 책임도 묻고 싶지 않아. 오히려 칭찬해주고 싶군. 제국 놈들에게 두려움을 아주 단단히 심어줬으니까.”

쏟아지는 화살비를 뚫고 홀로 성문 앞까지 추격해 들어간 포라칸은 두터운 철문을 몇 번이고 후려치다가 본군으로 돌아왔다. 그 즈음에는 성벽위의 그 누구도 돌아가는 그에게 화살 한 대 쏘지 못했다. 그의 흉포한 용맹은 도시 안의 제국군에게 그들이 성벽 안에 갇혀 있음을 자각하게 했다.

“그리고…성가신 놈이 안으로 들어갔다 해도 어차피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결국 성패는 봉인을 제때 푸느냐 풀지 못하느냐에 달렸다.”

맞는 말이지만 포라칸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이 미련할 만큼 우직한 부하를 다소 답답하지만 기꺼운 심정으로 보았다.

그야말로 천생 무인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그런 만큼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 그러한 끝없는 성찰과 정진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겠지만, 이렇게 군인으로서의 그를 보고 있자면 답답할 때가 적지 않았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포라칸이다. 그가 믿음직스러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많고 많은 수하들 중 일군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재목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거의 다 되어간다고 하니 느긋하게 기다리지. 뭐, 그런 말도 한참 전부터 비슷하게 해왔던 것이니 정말 언제 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북쪽에서 소식이 온 것은 없었나?”

“주앙 칼 고르는 호르빈켈에 머물며 때를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염치라도 있다면 그 자가 달리 할 말이 있을 리 없겠지요.”

지금 이렇게 높은 성벽을 바라보며 시간만 죽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다. 자신들이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않았더라도 검은 들소의 잔혼을 손에 넣어 진즉 봉인을 풀고 살마드를 점령하고도 남았을 터.

“구신(舊神)의 교도들을 움직여보겠다더니, 그마저도 잘 안 되는 모양이군. 달리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니.”

“쓸모없는 자들입니다. 저는 대족장께서 굳이 그들을 끌어들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포라칸은 진심으로 반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지 잔혼을 회수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번 전쟁에 있어 그들의 역할이라는 것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반군 없이 독자적으로 일을 진행했어도 충분했으리라 보았다. 오히려 보조를 맞춰야 할 상대가 없어지니 더 빠르게 전쟁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불만이 많은가보군.”

반군들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불만이라든가, 하다못해 이견조차 제시하지 않았던 포라칸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이 자리가 그들 둘만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어지간히 노했다는 증거였다.

“…….”

타르가이 베르겐은 표정변화 없는 포라칸을 보곤 픽 웃었다. 정말이지 계산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는 단순한 자다. 어리석다는 것이 아니라 우직하다는 의미다. 어쩌면 그런 우직함이야말로 그의 강인한 정신력의 바탕일지도 모른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은 손은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지. 어쨌든 그들이 버텨주고 있는 덕에 북쪽의 제국군은 발이 묶이지 않았나. 그리고 또 하나는 명분이야.”

“명분이라시면?”

“형세를 굳히고 이 땅을 온전히 손에 넣고 나면 다른 국가들과의 교류를 시작해야 해. 그때 대외적으로 들이밀기 좋은 얼굴은 우리가 아니라 베이고르야. 다른 국가들이 보기에 아무래도 낯설지가 않거든. 우리는 베이고르의 우방으로서 서서히 기틀을 쌓으면 된다. 물론 우리에게 자립할 힘이 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겠지만, 지금 당장 제국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불가능하지.”

“으음.”

분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장 한 개 주를 삼키기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제국에는 그런 주가 수십 개였다. 아무리 그들이 여러 국경을 가지고, 심지어 전쟁 중이라고는 하나 후방의 변란에 신경을 기울일 여력은 충분했다. 그 ‘여력’이 발휘되기 시작하면 초원부족의 미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속도전에 목을 매는 것이다. 제국이 힘을 쓰기 전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우리가 우리 힘만으로 이 땅을 차지한다고 해봐야 다스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야.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지.”

“그것은 어째서입니까?”

“이 땅의 원주민들의 눈에 우리는 외부인일 테니까. 말도, 행동도 다른 우리가 어느날 갑자기 땅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여 순순히 따르겠는가? 창칼로 위협하여 꿇린다고 해도 끝없이 잡음이 일겠지. 하지만 베이고르 녀석들이 앞장선다면 달라.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나? 놈들이 뭐 대단한 일을 한 게 있다고 프라펠의 깃발 아래 수만이 모였겠는가?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예전에 이곳의 주인이었지. 동족이라는 의식도 있어. 우리가 아닌 베이고르의 아래에 놓인다면 이곳의 원주민들은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타르가이 베르겐의 속내를 직접 이리 상세히 듣는 것은 포라칸이 처음이었다.

초원의 사회는 힘으로 돌아가고, 절대적인 힘으로 군림하는 타르가이 베르겐은 초원에서 단순한 족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가 신의 사도를 자처했기에 그렇기에 대족장이라 불릴 뿐.

그는 결정한다. 나머지는 따른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대족장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다만 모든 이들이 어떤 상황에도 고개를 숙이지만, 포라칸만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그는 타르가이 베르겐이 직접 인정한 수하이자 맹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포라칸은 그에게 언제든 충고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었으나,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다른 이들처럼 내려진 명령에 의문을 갖지 않고 수행해왔다.

그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족장이 그들 민족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단지 하릴없이 빈둥대는 반군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편함을 비췄을 뿐.

심통이 난 부하를 대족장은 솜씨 좋게 달랬다. 그의 뜻을 알았으니 이제 포라칸의 속에서 고개를 들었던 불만은 다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포라칸이 납득한 듯하자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와 함께 막사를 나섰다. 막사 밖에 대기하고 있던 전사장 콰이렌이 그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타르가이 베르겐의 천막은 자그마한 언덕 위에 있었다. 살마드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대단하지 않은가?”

“예?”

“저 성벽 말일세. 아무리 훌륭한 말도, 우리의 강한 힘도 저 높은 성벽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지. 저 위에서 화살을 쏟아 부으면 물러나는 것 외에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나?”

만약 살마드의 성벽이 3중이 아니었다면, 혹은 그 높이가 지금의 반 정도였다면 어떻게든 힘으로 뚫어보려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거대하고 튼튼한 성벽 앞에서는 감히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철저한 준비 없이 단지 힘만으로 넘기에 살마드의 성벽은 너무나 거대했다.

“초원의 싸움과 이곳의 싸움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이곳의 싸움과 다른 곳의 싸움 역시 또 다르겠지. 우리가 살던 초원은 너무나 작고, 초원의 방식을 가져다 대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넓다.”

타르가이 베르겐이 한 손을 어깨높이 정도로 들어올렸다. 반쯤 쥔 손아귀에 짙은 자줏빛이 물처럼 넘실거렸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던 그가 한순간 주먹을 움켜쥐자 자줏빛은 터지듯 비산하여 허공에 흔적도 없이 녹아들었다.

“신의 힘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난 그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했지.”

처음에는 희망이었다. 그 다음은 구원이었고, 유약했던 소년이 온전한 타르가이 베르겐으로 거듭났을 때, 그것은 운명이 되었다. 단순히 초원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삶으로의 인도.

“지금도 그렇다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우리 민족을 더 큰 세상의 주인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

포라칸과 콰에린이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인도자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으며, 그들 역시 믿고 있다는 동의의 의사표현이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안 돼. 때문에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큰 것을 작은 틀에 넣는 것은 어렵지만, 작은 것을 큰 틀에 넣는 것은 덜 어렵기 때문이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불끈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활짝 편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그의 눈에 이제 살마드는 비치지 않았다. 그 도시는 그의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면목 없군요.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진중한 인상의 사내와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성주와 총독을 알현한 뒤, 그들은 따로 자리를 가졌다.

“밖에서 홀로 분투하고 계심에도 달리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공은 공의 역할을, 저는 제 역할을 다한 것이지요. 미안하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바크렌의 무관들 중 아란딜 페레모어의 존대를 받을 수 있는 이는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내뿐이었다.

바크렌 굴지의 명문 무가인 리에론 가문의 당대 가주이자 바크렌 군부의 수장, 윌리스 리에론.

“활솜씨는 여전하시더군요.”

아란딜 페레모어는 목숨이 칼날 위에 서 있던 순간, 그의 목숨을 구했던 화살 한 대를 기억했다. 독특한 수실이 달린 화살은 바크렌 제일의 명궁이라는 윌리스 리에론의 상징과 같았다.

“별 말씀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서로 차를 한잔씩 마신 후에는 진지하고 무거운 화제로 접어들었다.

“도시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군량은 아직 넉넉한 편이기에 최대한 졸라맨다면 두 달은 더 버틸 수 있지만, 군졸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

익히 예상한 바였지만 직접 들어 확인하니 입맛이 썼다. 군졸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라면 일반 백성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터. 하긴, 그러고 보면 조금 전에 본 성주부터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총독은 좀 나았지만, 그도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상황은 점점 더 심해질 거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가 도시 밖에서 적들과 맞서고 있었기에 살마드의 군졸들도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란딜 페레모어라는 이름값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조차 패주하다시피하며 도시로 들어왔으니, 더 이상 군졸들은 기댈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 기대할 것은 원군뿐이지만, 말씀하신 대로라면 타라냐드와 본다인의 원군은 이미 패퇴하였으니…….”

“후속군이 곧 당도할 것입니다.”

같은 말을 성주와 총독 앞에서도 했었다. 허나 그런 말은 전쟁을 잘 모르는 두 사람에게는 통했을지언정, 윌리스 리에론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굳은 얼굴로 묻는 윌리스 리에론.

아란딜 페레모어는 싱긋 웃었다. 하루 사이에 주름살이 늘고 머리가 일부 희어진 그는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어보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웃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고매한 학자처럼 보였다.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저 믿는 수밖에요.”

“하긴, 그도 그렇군요.”

달리 방도가 없다. 아군은 도시 안에 갇혔고, 적들은 물샐틈없이 포위한 형국에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묻는 것은 겉으로는 덤덤함을 유지하는 윌리스 리에론조차 속으로는 초조해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리라.

아란딜 페레모어는 전황이 최악에 가깝게 흐르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 작품 후기 ==========

기적의 나흘째입니다.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는데, 독자분의 제안대로 제목과 소개글을 바꾼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간단한 제목과 다소 과할 정도로 짤막한 소개글이 본의 아니게 어그로를 끌어 노이즈마케팅 비스무리하게 되지 않았나...하는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다만 안 좋게 보시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아 바꿔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은 되네요.

각설하고, 아무래도 요 며칠 새 마음이 들뜨다 보니 별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일전에 꿈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는 이 꿈이 어느 순간 갑자기 깨버리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듭니다.

사실 암만 걱정해봐야 무슨 답이 나오겠습니까. 그저 이 꿈이 깨지 않도록, 아니면 되도록 길게 가도록 열심히 성실히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하여,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게 봐 주시는 분들, 추천을 눌러주시는 분들, 따로 쿠폰까지 쏴 주시는 분들 모두 다 감사드립니다. 제가 글로 전할 수 있는 말이 그저 이런 상투적인 감사하다는 말씀 뿐이라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즐거움을 드릴 수 있게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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