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10화 (110/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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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쾅!

나란히 말을 달리며 순식간에 세 합이 오갔다. 서로의 몸이 크게 흔들리고, 그들을 태운 말들조차 비틀거렸다. 그나마 서로 충격을 흘렸으니 망정이지, 요령 없이 전력으로 부딪치기만 했다면 두 사람 모두 일합 이후부터는 말없이 싸워야 했을 것이다.

“좋다! 좋아!”

포라칸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파안대소했다. 단 세 번 부딪쳤을 뿐이지만 그는 상대의 실력이 자신에 비춰도 부족하지 않음을 확신했다.

‘내 눈이 틀렸었군. 여우가 아니다. 본래 이런 자였던가?’

처음에 보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추측키로는 비자연적인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허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앞에 있는 적이 호적수라는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피해!”

두 사람을 태운 말들은 거침없이 달렸다. 섬뜩한 예기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쉴 새 없이 터져나갔다. 괜히 길을 막으려고 비켜나지 않던 전사들이 눈먼 칼에 맞아 쓰러졌다. 그 즈음에는 두려움을 모르던 전사들도 황급히 물러났다.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깝게 변한 그들조차 몸을 사리게 할 정도로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세는 너무나도 흉악했다.

둘은 마치 부싯돌과 같았다. 서로에게 부딪치며 끝없이 달아오르고, 불길을 토했다. 가진 힘을 극한까지 짜내어 서로의 목을 노렸다. 그 와중에 말발굽에 밟히고, 휘두른 칼날에 뭐가 걸리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카앙!

묵직한 일격을 비스듬히 흘려낸 칼날이 포라칸의 얼굴을 살짝 긋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핏줄기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포라칸의 얼굴이 찰나 간 일그러졌다가 곧 진한 웃음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담은 즐거움의 감정은 보통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광기.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동시에 같은 색의 아지랑이가 그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마치 아란딜 페레모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김과 같이.

“크허엉!”

일갈. 아니, 포효.

귀를 멀게 하고 심령을 거칠게 옥죄는 끔찍함.

짙푸른 안광이 폭사하며 번개가 내리쳤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최대한 빗겨 받아냈으나 충격을 다 해소하지 못하고 말과 함께 옆으로 튕겨 나갔다.

“크윽!”

말에서 떨어져나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버텨냈다. 카르골이 부러질 듯 떨렸다. 입에 비릿한 피가 한 모금 차올랐다.

‘자그마한 야산이라도 정상인 줄 알았더니, 중턱이었군.’

뭇 듣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끔찍한 포효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그를 각성시켰다. 달아오르려던 머리가 다시 차갑게 식고, 그는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콰앙!

힘으로 받아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고, 흘리는 게 고작이다.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힘이다.

‘이성이 날아간 건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짙푸른 안광에서는 섬뜩한 광기가 느껴졌다. 그를 보며 광화(狂化)의 술법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널리 알려진, 이성을 버리고 힘을 취하는 대표적인 술수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냐. 달라!’

또 한 번, 묵직한 공격을 가까스로 흘려내며 확신했다. 광전사는 눈이 돌아간 짐승이다. 돌아간 눈으로는 이렇게 정교한 공격은 하지 못한다.

‘정말…믿기 힘들군.’

혈염술의 각인을 발동시키고도 고작 이 악 물고 버티는 게 고작이다. 게다가, 그렇게 버티는 것조차도 언제까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격은 여전히 매섭지만, 판단력은 확실히 흐려졌다.’

저 광포한 창에 베이고 터진 적들만 벌써 수십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의 목 하나만을 노리고 주변까지 휩쓰는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아군이 죽어나가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쪽의 발을 묶어야 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이야 어찌 되었든 당장 목만 치면 된다는 식이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절대 저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란딜 페레모어는 힘겹게 공격을 받아내며 기회를 살폈다. 그러다 또 한 번 횡으로 후려치는 공격이 들어왔을 때, 칼날을 틀었다.

콰앙!

피를 토하며 튕겨나간 곳은 적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또한 살마드의 성문으로 통하는 직선길목이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를 초원의 전사들이 공격하려 했지만 그들보다 먼저 포라칸이 섬뜩한 안광을 토해내며 따라붙었다.

‘열린다.’

포라칸이 오자마자 바람에 쓸리는 낙엽처럼 우르르 물러나는 초원의 병력들.

아란딜 페레모어는 검붉은 피를 토하면서도 희망의 불을 지폈다. 이제 길은 열린다. 어떻게든 버티기만 한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

핏발 선 눈이 부릅 뜨였다. 두 눈은 여전히 짙은 안광을 토했지만, 그 밑으로 드러난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간단하군.”

“…….”

“성문 앞까지 가는 동안 버티면 살고, 그러지 못하면 너희 모두 죽는다.”

틀림없이 웃고 있을 눈이 뒤편을 훑었다.

여전히 말은 달리고 있었고, 살마드의 성문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지폈던 희망의 불씨는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카앙!

“자신 있나?”

“본래부터 이런 성미였나?”

포라칸은 아란딜 페레모어가 초원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입가에 걸린 웃음이 더 짙어졌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책임감이 늘지. 그리고 날 짓눌러.”

전사의 본분은 투쟁이다. 그의 본질은 그런 치열함 속에서만 숨 쉴 수 있건만, 언젠가부터 대전사라 불리게 된 후로는 그런 자유와 즐거움을 맛볼 수 없었다. 스스로 원치 않은 책무가 그를 억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가슴과 머리가 동시에 외치고 있지 않은가. 눈앞의 적을 죽이라고 말이다.

“어떤가! 자신 있나?! 나는 자신이 있다네! 그러니 자네도 그렇다 말해주게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말이 아니라 포효였다. 시퍼런 안광이 폭사하며 창이 춤을 췄다.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공세 앞에 아란딜 페레모어는 위태로이 흔들렸다.

*

“준비해라.”

“예!”

굵은 줄을 거는 병사의 손이 떨렸다. 조금 전에 터진 포효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상대는 저 한참 아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둘러라!”

그러나 그 모습은 한심한 것도,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병사들은 물론, 가만히 서서 명령만 내리는 지휘관들도 속에 돌덩이가 얹힌 것 마냥 몸이 무거운 것은 매한가지였으니.

“한 순간이다. 정확히 조준하라.”

장년의 사내가 활을 들었다. 그는 활시위에 살을 먹이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소수 중 하나였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기품 있어 보이는 갑옷을 걸친 그는 성벽 끝까지 나가 섰다.

“…….”

그는 한껏 시위를 당긴 채 숨죽였다. 그러다 한 순간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지금!”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맹렬히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포라칸의 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연달아 쏜 또 다른 화살은 그가 탄 말의 목덜미로 날아갔다.

포라칸이 창을 휘돌리며 두 대의 화살을 가볍게 쳐냈다. 다만 그러는 사이 아란딜 페레모어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슈슈슈슝!

화살이 쏘아지며 내는 소리라기에는 너무나 묵직한 소리. 하지만 날아가는 것은 틀림없는 화살이었다. 단지 그 화살은 방금 전 날아간 것 같은 보통의 화살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굵고 길었다. 크기만 봐서는 화살보다는 창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 커다란 화살을 쏘아 보낸 직후, 병사들이 또 다른 화살을 발사대에 올리고 분주히 움직였다.

공성용 활. 달리는 노포(弩砲)라 부르는 물건. 병사 둘이 달라붙어야 운용할 수 있는 흉악한 병기가 성벽 위에 스무 대 가까이 배치되어 있었다. 단 한 명의 적을 위해서.

쾅!

포라칸은 이번에도 화살을 쳐냈다. 다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말과 함께 비틀거렸다.

“두 번째! 발사!”

또 다시 거대한 화살이 날아갔다. 이번에는 두 대였다. 그 뒤에는 또 다시 두 대의 노포가 화살을 발사했다.

쾅! 쾅!

포라칸이 노포 세례에 휘청거리는 사이 아란딜 페레모어와 말레이드군은 추격을 뿌리치고 성문을 향해 질주했다. 뒤늦게 초원의 전사들이 막아서려 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쉬지 말고 쏴라!”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들은 악을 쓰고는 있었지만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맞으면 어지간한 성문은 걸레짝으로 만들 수 있는 공성병기가 스무 대 가까이 동원되어 계속 쏘고 있는데도 포라칸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히히힝!

다만 그는 버텨도, 그의 말이 버티지 못해 포라칸은 끝내 낙마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땅에 내려선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날아드는 노포의 화살들을 쳐내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성문을 열 준비를 해라!”

“궁수들은 대기하라!”

성벽 위에서 살마드군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성벽 아래의 말레이드군도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외쳤다.

“모그로프!”

“옛!”

“이제부터는 네가 선두에서 이끌어라! 나는 후미를 맡겠다!”

“예? 하, 하지만 장군!”

“명령이다!”

사납게 쏘아붙이고 즉시 뒤로 빠졌다. 후미의 보병들은 거의 땀 대신 피를 흘리며 달리고 있었다. 그가 다다랐을 때는 적의 추격이 이미 턱밑까지 따라붙은 차였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라!”

그를 알아본 병사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친위대를 이끌고 조금 더 속도를 늦췄다. 그러자 곧 적의 추격대가 따라붙었다.

“상관 잘못 만나 너희가 고생하는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친위대는 고작 50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그들은 뒤따라 붙는 적들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아직까지도 혈염술을 유지하고 있는 아란딜 페레모어의 공이 컸다.

“성문이 열렸다!”

살마드의 성문이 열리고, 말레이드군의 선두가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삶이 눈앞에 있어서인지 녹초가 된 병사들이 마지막 힘을 짜내 이동속도를 빨리했다.

그쯤 되자 적들도 힘이 빠지는지, 추격이 느슨해졌다. 다만 오직 한 명, 포라칸만이 말도 없이 맨 몸으로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날아드는 노포의 화살을 쳐내느라 휘청거리면서도 결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끔찍한 놈입니다. 꿈에서 나올까 두렵군요.”

친위대원 중 한 명이 질린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에 아란딜 페레모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이지 역귀 같은 놈이다.”

느슨해졌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따라오는 적들에게 화살비가 쏟아졌다. 덕분에 그들은 마지막으로 여유롭게 도시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올라갔던 성문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연참을 하고 싶은데, 요 근래에 허리가 좋지 않아 매일연재를 유지하기에도 빠듯하여... 하지만 언제고 상황이 되면 꼭 연참으로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재미있게 봐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쿠폰을 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벌써 기적의 사흘째네요. 언제까지 갈지는 몰라도, 되도록 오래 갔으면 하는 크나큰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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