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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9화 (109/1,064)

<-- 격돌 -->

“뭣들 하는 것이냐.”

포라칸은 속절없이 뚫리는 전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적의 경로를 알아채고 병력을 집중시키기까지 했건만 말레이드군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선봉을 멈춰 세우거나, 하다못해 늦추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상당한 맹장이 선봉에 있는 것 같았다.

“한심한…….”

그때, 바르바피들이 적의 선두에 접근해갔다. 동시에 그 역시 적의 꼬리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포라칸은 절제하고 있던 투기를 자유로이 풀어놓았다. 자그마한 심력 한 조각까지 모두 손에 쥔 창에 담았다.

“놓치지 않는다!”

그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적의 후미에 따라붙었다. 필사적으로 따라붙던 보병들이 첫 번째 먹이였다. 전력으로 달리는 병사의 등이 거리에 들어왔을 때, 그의 창이 번뜩였다.

카앙!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빛살처럼 뻗어간 창은 피를 보지 못하고 둔탁한 쇳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포라칸은 멈춰선 그의 말 앞에 꽂힌 큼지막한 쇳덩이를 보았다. 두 개의 큼직한 쇳덩이가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무기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호기심을 가졌을 것이다. 천생 무인인 그는 평소 각종 병기에도 관심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또 다시 꼬리를 자르겠다는 건가.”

앞을 가로막은 수백의 병사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체구 좋은 사내.

익숙한 장면이다. 얼마 전에 그가 덥썩 물었던 미끼들도 이런 모습이었다. 비장한 얼굴을 하고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발을 붙들던 끈질긴 자들.

조금 전까지 도망치던 보병들도 어느새 반전해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후미에 머물렀던 것이 틀림없다. 돌아선 모든 이들의 눈에서 죽음을 각오한 결연함이 묻어났다.

“대단하군.”

전투의 와중임을 떠나, 적장을 쫓아야 하는 급박한 상황을 떠나 포라칸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떠밀린 자들의 눈이 아니다. 스스로 선 자들의 눈이다. 무엇이 그들을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렇게 자신의 앞에 섰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경탄스러웠다.

“좋아. 더없이 좋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아가야 하는 자와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춰 세워야 하는 자의 만남이다. 대화는 필요 없다. 더 이상의 감탄도 무의미하다.

“상대해주마.”

압도적인 투기가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그를 마주한 모든 이들의 눈에는 말 위에 앉은 포라칸의 형체가 하늘의 구름에 닿은 듯 거대해 보였다.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그의 앞에 선 이들은 압도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직 한 명. 로탄만이 쩌렁쩌렁한 기합을 내지르며 맞서나갔다.

콰앙!

창과 창이 부딪히며 난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 로탄이 그가 탄 말과 함께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기겁을 한 말이 간신히 땅에 버티고 섰다.

반면 포라칸은 창을 쥔 팔이 조금 뒤로 밀렸을 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훌륭하다.”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그럼에도 막아냈다. 그의 전력을 일합이라도 받아낼 수 있는 이는 초원의 전사들은 물론, 바르바피들 중에서도 몇 없었다.

“여유로울 수 없음이 아쉽군.”

대장들의 일합을 기점으로 양측의 병력도 맞붙었다.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포라칸은 곧장 로탄을 향해 말을 달렸다. 로탄 역시 이를 악물고 응전했다. 그를 태운 말 역시 기운을 잃지 않고 땅을 찼다.

쾅! 쾅쾅!

둘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바위도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위력적인 공격을 연달아 퍼붓는 포라칸에 맞서 로탄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뿐이었다. 반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밀려나고 튕겨나면서 찢어진 손아귀로 어떻게든 창을 움켜잡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콰앙!

히히히힝!

열세 합 째. 기를 쓰고 버티던 군마가 기어이 다리가 꺾여 쓰러졌다. 로탄은 말에 깔리기 전 몸을 날려 땅을 굴렀다.

“커헉!”

충격이 쌓였던 몸이 땅에 부딪치자 억눌렀던 피가 입을 타고 쏟아져 나왔다. 로탄은 너덜너덜해진 창을 지팡이처럼 짚고 몸을 일으켰다.

포라칸이 로탄의 앞으로 말을 몰아왔다. 그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는 적을 보며 기어이 탄성을 참지 못했다.

“이름을 묻고 싶군. 내가 제국어를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로탄.”

“오. 초원어를 할 줄 아는가?”

“오랫동안 상대하다보니…알기 싫어도 알게 되더군.”

살의가 가득하던 두 사내의 전장에 느닷없이 평온함이 자리했다. 포라칸은 창을 내렸고, 로탄도 사나운 표정 대신 피로함을 드러냈다.

“그런가……. 내 이름은 포라칸. 초원의 하나뿐인 대전사다.”

“대전사? 최고의 전사라는 건가? 마지막 상대로 나쁘지는 않군.”

로탄은 더 이상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창에 몸을 기울일 힘조차 없었다. 포라칸은 위태로이 흔들리는 로탄을 내려 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아프다. 또…뭐, 힘들군.”

로탄이 힘없이 웃었다. 포라칸 역시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진정한 전사의 삶이지. 그 고통, 이제 끝내주겠네.”

“흥.”

나직한 코웃음을 끝으로 로탄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피로에 젖은 얼굴이 목 아래와 분리되어 쓰러진 말 위로 떨어졌다.

*

흥건하게 피를 뒤집어쓰고, 또 뒤집어쓰는 그의 모습은 침용이라는 단어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끝도 없이 막아서는 적들을 베어가는 와중에도 아란딜 페레모어는 줄곧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그를 억누르는 책임감이었다.

그는 선봉으로서, 길잡이로서, 사령관으로서 뒤따르는 휘하들을 이끌어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러므로 용맹하되 무모할 수 없었고, 침착하되 망설일 수 없었다.

“크허엉!”

‘끝도 없군.’

아래에서 뛰어오르는 또 한 마리의 짐승을 베어 넘겼다. 목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기어이 휘두른 발톱에 가뜩이나 너덜너덜하던 견갑이 쩍 갈라져버렸다. 물론 그는 갑옷이 갈라졌는지, 떨어져나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지금, 계속해서 그를 노리고 덤벼드는 짐승들을 베고 찌르기에도 바빴다. 그 와중에도 포위가 옅은 곳을 찾아 말을 달려야 하니 스스로의 몸을 돌볼 틈조차 없었다.

“하아……”

숨이 뜨끈한 김으로 흘러나왔다. 입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서 옅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걱!

두터운 짐승의 팔과 목이 동시에 잘려나갔다. 카르골이 제아무리 날카롭다한들, 휘두르는 자의 괴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란딜 페레모어는 무장으로서 당연히 힘은 제법 있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괴력이라 불릴 만큼 장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이름난 장사들조차 쉬이 하지 못할 일을 수십 차례 이상 거듭 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그의 얼굴에 드러난 기이한 문양, 그리고 몸 안에서 끓는 듯 열기를 뿜고 있는 피와 관련이 있었다.

각인.

달리는 각인 술법이라고도 하며, 무엇을 새기느냐에 따라 평범한 촌부도 초인의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고등의 술수다.

군관들. 특히 고위 군관들 중에서는 각인을 받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특히 일선에서 복무하는 이들일수록 그랬다. 지휘관이 말단 병사들처럼 최전선에서 칼을 휘두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해도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마찬가지. 혹여 불의의 사고를 당해 덜컥 전사라도 해버리면 그가 이끄는 군대 자체가 흔들릴 위험이 있기에, 그들은 호신의 수단이 필요했다. 물론 일신의 무공이 천하무적이라 전사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호위를 위한 친위대를 다수 두거나, 그보다 더 효율적인 다른 수단을 강구했다. 그것이 바로 각인이다.

수십, 수백의 병력을 곁에 묶어두지 않아도 되고 타고난 재능에 부단한 노력을 더해 실력을 키울 필요도 없다. 물론 고위 술사의 힘과 귀한 술법의 재료들이 투입되는 만큼 비싸기는 하지만, 여벌 목숨이 생기는 셈인데 얼마가 들던 무에 아깝겠는가?

아란딜 페레모어도 각인을 받았다.

물론 그는 적어도 눈먼 칼이나 활을 맞고 죽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만 전장이라는 것이 무슨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그 ‘만약의 사태’란,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항거불능의 고비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여 단순히 몸뚱이 하나 살리기 위한 호신의 술법이 아니라, 각인을 했던 고위 술사조차도 만류할 정도의 극악한 술법을 몸에 새겼다.

혈염(血染)의 술.

생기를 태워 투기를 얻는 술법이다. 말 그대로, 술법을 사용함으로써 수명을 갉아먹고 극한의 힘을 손에 넣는다. 단 한 번도 정식으로 지정된 적은 없으나, 은연중 금주(禁呪)로까지 여겨지는 흉악한 술법.

하지만 아란딜 페레모어는 오히려 그래서 좋다고 여겼다. 그는 일부러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금주로 지정되지 않은 술법들 중에 대가야 어떻든 가장 효과가 뛰어난 것을 택했다. 어차피 정상적으로 대응하기 힘든 난관이 닥친다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극약처방이 정답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마침내 오늘. 그는 그날 내렸던 그 판단이 옳았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재미있군. 마치 신이 된 듯하구나.’

소싯적에 타고난 무재로 전장을 전전할 때도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었다. 분명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았을 때, 절체절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힘든 상황임에도 그는 여유를 느꼈다. 앞을 가로막는 괴이한 형태의 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없이 자유로웠다. 적들을 위협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걱!

그는 한없이 고양되고 도취되었다. 전신을 가득 채운 힘은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아, 쓰고, 쓰고 또 써도 모자람이 없었다.

‘당신께서 보는 풍경은 이런 것이었습니까?’

눈앞을 스치는 흉맹한 발톱을 보며, 우습게도 그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망아지 시절. 그에게 더없는 충격과, 두려움에 가까운 경외감을 안겨주었던 사내.

그를 보고서야 절대적인 무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장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는 그야말로 무신(武神)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진정 드높은 하늘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아란딜 페레모어는 그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무신의 눈에 비쳤을 그 세상이 그의 눈에도 조금 보이는 듯했다.

‘오래 가지 못할 취기라 하나, 끊기에는 너무나 달콤하군요.’

무인으로서 평생을 정진해도 오르지 못할 높이. 그 고지를 편법으로나마 잠시 밟았다. 머리로 끝없이 침용을 외고는 있으나, 어찌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군!”

부하의 다급한 고함소리에 아란딜 페레모어의 눈이 제 색을 찾았다.

여전히 길을 가로막는 괴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우측에서 빠르게 접근해오는 단기를 보았다.

그 자다.

일신의 용맹으로 그와 그의 군대를 움츠러들게 했던 적장.

‘로탄.’

분명 뒤쪽에서부터 따라붙었을 터. 그런데 그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후미가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으득!

짐작했던 일이다. 죽을 줄 알고 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속에서는 천불이 일었다. 카르골을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콰앙!

서로의 목을 노리는 창과 칼이 격돌했다.

========== 작품 후기 ==========

이틀째, 꿈 속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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