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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타라냐드와 본다인의 1만 2천 원군이 괴멸 당했다는 소식을 전한 전령이 그대로 탈진해 쓰러졌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
아란딜 페레모어는 눈을 감고 두통이 이는 머리를 짚었다.
휘하 천인장이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장군. 이제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원군이 괴멸을 당했다면 기존의 계획은…….”
“의외의 일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 잠깐만 다들 물러가 있게.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부르지.”
“…예.”
부관마저 물리고 아란딜 페레모어는 막사 안에 홀로 남았다. 적막 속에 있으니 비로소 뒤엉켰던 생각이 좀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정말 상식 밖의 적이다. 두 배가 훌쩍 넘는. 그것도 오합지졸이 아닌 제국의 정예군을 상대로 그대로 들이쳐 괴멸시키다니. 누가 들으면 장난하지 말라고 할 정도다.
‘어차피 노려야 할 바는 같지만, 전략은 수정이 불가피하겠군.’
당초의 목적은 최대한 버티면서 원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이 된 편이었다. 이제는 괴멸해버린 타라냐드와 본다인의 1만 2천 원군 1파는 그 첫 번째 결실이었고.
‘괴물은 이쪽에만 있는 줄 알았거늘, 그 쪽에도 있었는가.’
머릿수만 많은 평범한 야만인이었다면 진즉 이쪽에서 유인을 하든 살마드와 협공을 하던 해서 섬멸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산에 진을 친 채 견제에 집중했던 것은 그만큼 상대가 강한 탓이었다.
‘어찌한다. 물러나자니…뿌리칠 수 없을 테고.’
지금 살마드의 포위망을 유지하고 있는 적장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의 사람 보는 눈은 특별히 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후하지도 않았다. 그런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적의 지휘관은 굉장히 위험한 자였다. 처음 고지를 점령하기 전 미끼로 뿌렸던 병력을 단숨에 섬멸해버리는 광경을 목도했을 때 확신했다. 저 자는 괴물이라고.
“…….”
상황은 위급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만 2천을 물리친 군대가 회군 중일 것이다. 그들이 당도하고 나면 파국을 피할 수 없다. 세 마리 말 중 두 마리를 죽이고, 자신마저 보고 직후 탈진해버릴 만큼 신속하게 달려와 준 전령 덕분에 그나마 약간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그 아까운 시간이 지금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생각을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아니, 내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내리게 될 결정이 그의 군대의, 살마드의, 바크렌의 운명을 결정지을 짓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앎에도 빠르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추격이 붙으면 결코 뿌리칠 수 없다. 그렇게 타격을 입고 나면 더 이상의 작전수행도 불가하다. 타라냐드와 본다인의 원군은 사라졌지만…간만의 대전투다.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은 많을 테니 다른 곳에서도 원군은 속속들이 당도할 터.’
지금도 살벌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남부와 달리, 북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평화로웠다. 민초들과 그 위에서 뒹구는 관리들에게야 평화가 달콤했겠지만, 무관들에게는 아니었다. 무관들은 전장의 피와 그로 쌓는 전공에 눈이 시뻘개져 있었다. 원군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시간은 아직도 이쪽의 편이다.
상황은 달라졌으나,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문제는 시간이다. 버티면 이긴다. 버티면.
‘달리 방도가 없군.’
고민은 길었으나 결론이 나자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그는 물렸던 휘하 지휘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생각을 해봤으나 이제는 달리 방도가 없다. 원군을 패퇴시킨 적이 돌아오거나, 그 소식이 살마드를 포위한 적군에게 들어가고 나면 우리는 끝이다.”
비보도 이런 비보가 있을까 싶은 내용이었지만 말을 하는 아란딜 페레모어나, 듣는 휘하 지휘관들이나 큰 동요는 없었다. 단지 안색이 어두워지기만 했을 뿐.
그들 역시 원군의 패퇴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포위망을 뚫고 살마드로 들어간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이나, 암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이상한 모습이었다. 적의 수가 압도적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살마드를 포위하고 있어 병력이 분산된 상태였다. 단순히 포위를 뚫고 살마드로 들어가기만 하는 거라면 바크렌 최고의 정예라 불리는 그들이 이렇게 반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살마드에서 보조를 맞춰준다고 해도…결국 따라붙을 겁니다.”
“그렇겠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뇌리에 살마드에 당도했던 첫날의 기억이 스쳐갔다. 미끼부대를 전멸시키고 기어이 본대의 꼬리까지 따라붙던 거구의 사내. 그가 보였던 압도적인 무력은 정예중의 정예라 일컬어지는 말레이드군의 사기를 무참히 꺾어버렸다.
그야말로 대적불가.
그들 모두가 칼밥을 먹는 인생에, 어딜 가서도 기죽지 않으리라 자부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접하는, 그런 게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한 터무니없는 힘 앞에서는 당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가 꺾이지 않은 이는 단 둘 뿐이었다. 하나는 최고 지휘관인 아란딜 페레모어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자는 반드시 쫓아올 거다. 로탄. 자네에게 후미를 맡겨도 되겠는가?”
“제가 언제 장군의 명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까.”
말레이드 제일의 용맹을 자랑하는 천인장 로탄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모든 이들의 걱정스런 시선이 그를 향했다. 로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을 도리어 둘러보았다.
“메이너스의 원한은 갚아줘야지. 그 일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나.”
그날, 같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누군가는 공포의 그림자에 물든 반면에, 누군가는 꿋꿋이 서서 투지를 불태웠다. 당당한 로탄의 말에 동료 천인장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렇다면 내 뒤에 붙어 따라오게. 여차하면 나도 한 손 거들 테니.”
“무슨 소리. 메이너스는 내 술친구였다. 한 손 거들 자격이라면 내게 있지.”
“어허! 그렇다면 나야말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열기의 한복판에서 한 걸음 나와 있던 아란딜 페레모어는 로탄과 눈을 마주쳤다.
“…….”
로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감았다.
*
말레이드군은 스산한 바람소리에 그들의 발소리를 숨겼다. 산 곳곳에 세워둔 깃발은 위장을 위해 그대로 두었고, 그들은 그 어떤 깃발도 들지 않았다. 영광스러운 제국의 깃발도, 흑포장군 아란딜 페레모어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깃발도 모두 내려놓았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절대 멈추지 마라.”
포위망을 돌파해야 하는 기병들이나 쉬지 않고 달려 쫓아가야 하는 보병들이나 고생길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것은 그런 고된 미래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곧 죽음의 경계를 위태로이 달려야한다는 심적 압박감이 그들을 내리눌렀다.
“살마드에서 적시에 호응을 해줄 것이니 걱정들 할 것 없다.”
병사들을 달래기 위한 말이기도 했고, 진심이기도 했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평소에도 살마드군을 이끌고 있는 윌리스 리에론의 군재를 높이 평가해왔다. 바크렌 군부의 수장 자리는 가문의 후광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력이 없다면 암만 가문의 위세가 쟁쟁하다한들 자존심 빼면 시체인 북부의 군인들이 순순히 따랐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윌리스 리에론이 움직여줄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언제 움직이느냐가 문제일 뿐.
그가 즉시 상황을 눈치 채고 반응한다면 최소의 피해로 도시에 들어설 수 있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머뭇거린다면…….
‘어차피 내 손을 떠난 문제다.’
지금 해야 할 것은 머리를 비우고 칼을 조금이라도 더 날카롭게 갈아두는 일이다.
그는 이번 작전에서 선봉을 자처했다. 본디 말레이드군의 가장 날카로운 창은 바로 그였다. 지휘관이기 때문에 위험도가 너무나 높은 후미에 설 수는 없었지만, 선봉은 양보할 수 없었다. 부하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무시했다.
‘그러고 보니 선봉은 오랜만이군.’
한때는 그는 누구보다도 열렬히 전장의 피를 쫓았다. 그러다 장군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장군다운’ 처신을 위해 자제해왔지만…오늘은 다시금 그때의 기억 속에 섰다.
날카롭게 갈린 칼을 들었다. 그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보도(寶刀)다. 그가 장군위에 올라 흑포를 받던 그날에 함께 하사받은 두 개의 보도 중 하나였다. 하나는 진귀한 보석과 금으로 치장된 장식용이었고, 또 하나는 바로 지금 그가 들고 있는 실전용이었다.
카르골.
도신에 고대 제국어로 적힌 칼의 이름이다.
개량되기 이전의, 황실에서만 쓰인다는 제국의 원어(原語)이자 황가의 문자. 도신에 적힌 이 칼의 이름이야말로 이것이 황제의 하사품임을 상징하는 글자다.
‘침용(沈勇)이라.’
위대하신 황제폐하는 친히 칼에 새긴 이름의 의미를 읊어주셨다.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채 흑포에 싸인 두 자루의 칼을 받아들며, 그는 감격에 몸을 떨었었다. 칼을 놓기 전까지 한평생 그리 살리라 굳게 다짐했었다.
철컥
서늘한 도신이 칼집 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칼날보다도 더 서늘한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
“야만인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새벽이 밝아오기 전. 굳은 몸이 가장 움직이기 힘든 시간.
후방에서 이는 소란을 알아챈 포라칸은 잠에서 깨며 짜증스럽기보다는 즐거웠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깜짝 선물보다는 목매어 기다리고 있던 선물을 받은 아이의 기쁨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더 과감하게 움직이는군.’
두 주의 원군과 대족장이 맞붙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승리를 거둘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산에 웅크린 여우가 움직일 것도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우가 산에서 뛰쳐나온 시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전령이 일을 열심히 했다고 해도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건만, 스스로 만든 튼튼한 요새를 곧장 박차고 나왔다. 망설임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그 행동이 그야말로 과감하기 그지없다.
포라칸은 침상 옆에 세워 두었던 창을 들고 막사를 나왔다. 그의 애마는 이미 막사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땅을 차고 말에 올랐다.
‘생각 이상으로 용맹한 여우였던가.’
하지만 그래봐야 여우는 여우. 굴 밖으로 뛰쳐나온 이상 이제 맹수에게 노려질 일만 남았다.
‘놓치지 않는다.’
이제껏 애를 먹인 값도 값이지만, 유능한 적장은 향후의 전쟁을 위해서라도 살려둘 수 없다. 무섭도록 정제된 투기가 포라칸의 몸 위로 넘실거렸다.
둥-! 둥-! 둥-!
후미의 적을 바라보며 전의를 돋우던 그때. 이번에는 전방에서 웅장한 전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응하는가.”
의도는 뻔했다. 반응이 기민하지만 이 역시 예상하고 있던 바. 그는 즉시 부관에게 명을 내렸다.
“바르바피 오백 기만 나를 따른다. 나머지는 동요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옛!”
여우사냥 시작이다.
*
“막아라!”
살마드의 빠른 호응은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켰다. 그러나 포위망은 조금도 헐거워지지 않았다. 그를 보고 그는 현 상황이 상대의 의도대로 흐른 것임을 직감했다.
‘원군의 패배를 짐작하고 있었던 거로군.’
소름끼칠 정도의 자신감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 자신감만큼의 힘이 적에게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보기 좋게 덫에 걸리고 말았다. 미리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말이다.
‘카르골.’
두터이 앞을 막아서는 적들을 보며 칼을 뽑아들었다.
‘침용하라.’
날카로운 칼날은 빛살이 되었다. 마상에서 가장 어울리는 무기는 길이가 긴 창이라 하나, 지금의 광경을 본다면 그 말의 타당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리라.
“얼마가 막아서든 돌파한다! 황제폐하를 위하여!”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얼굴을 한 채, 아란딜 페레모어는 쏟아지는 피로 몸을 적셔갔다.
========== 작품 후기 ==========
당황스러우면서도 기쁘네요.
오늘 하루 종일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책을 보고 있어도, 글을 쓰려 해도 무슨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신경이 쓰여 몇 분마다 휴대폰으로 조아라에 들어가 늘어나는 조회수를 확인했습니다.
이 한 달(7월) 동안 쌓인 조회수의 3분지 1이 오늘 조회수입니다. 연참을 한 것도 아니고, 딱히 평소와 달리 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네요.
물론 이런 이변이 계속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이제껏 제가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정말 큰 기쁨과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