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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7화 (107/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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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사 포라칸은 막사 밖에 우두커니 서서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매사에 냉철하고 감정을 잘 다스리는 그조차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시원한 바람만이 유일한 위로거리였다.

“아직인가?”

뒤편에서 다가온 전사가 고개를 숙였다.

“예. 부족의 무녀들이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봉인이 너무 강력한 탓에.”

“제국의 군주라는 자는 정말이지 지독하군. 각 부족의 무인(巫人)들이 모두 투입되었건만…….”

본래대로라면 이미 한참 전에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그랬으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 이유도 없고, 답답하게 속을 끓여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망국의 잔당 따위에게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위험부담이 있다 해도 차라리 직접 나섰어야 했어.”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검은 들소. 이제는 바칼이라 불리는 몰락한 신의 저주는 초원의 후예를 억눌렀다. 때문에 망국의 잔당이 일을 맡겠다고 했을 때 순순히 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을 그르쳤고,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

‘저주를 감내하더라도 우리가 움직였어야 했다. 검은 들소의 잔혼(殘魂)만 손에 넣었더라면 봉인 따위는 진즉에 깨뜨려버렸을 터인데!’

잔혼이 있었다면 카락시아를 손에 넣자마자 봉인을 해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됐다면 오테론을 함락시킨 즉시 계획을 실행시켰을 터.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 하나, 미련을 안 가지려 해도 도저히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우우웅!

노기가 치밀자 그의 전신에서 투기가 넘실거렸다. 강대한 기백은 대기마저 뒤흔들었다. 뒤편에 떨어져 있던 전사가 침음을 토하고 저 멀리 나무 위에서 잠을 청하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분노에 취해가던 포라칸을 일깨웠다.

“이런.”그는 안색이 창백해진 휘하의 전사를 보고 크게 자책했다.

‘바보 같은 실수를…….’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에 휩쓸리는 어설픔 따위는 옛적에 넘어섰다고 생각했건만, 이제와 이런 실수라니. 한심할 따름이다. 포라칸은 안에서 꿈틀대기 시작한 흉포한 짐승을 억눌렀다. 날뛰지 못해 분해하는 짐승의 마음이 전달되어 왔다.

‘감정이 격해지면 나조차 흔들리게 되는군. 역시…위험한 힘이다.’

처음 대족장이…아니, 그때는 대족장은커녕 족장도 아니었던 베르겐이 신의 사도를 자처하며 족장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가 건넨 이 힘을 두고 어떤 이들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 표현했었다. 그렇게 반대했던 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포르칸은 새삼 그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말. 어쩌면 일부분은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 강력한 힘은 축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흉포하다. 그렇기에 위험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힘은 축복도, 저주도 아니었다. 그저 힘이며 무기일 뿐. 따라서 사용함에 있어 신중해야만 한다. 강력한 힘은 자신감을 안겨주지만, 과한 자신감은 스스로를 먹어버리니까.

어쩌면 이미 늦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벌써 젊은 전사들 중에서는 전투의 광기에 물들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은 힘에 취해버린 것이다.

포라칸은 그를 좋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전시다. 뜻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손에 든 무기가 칼이든, 창이든, 도끼든 활이든 상관없다.

“서두르라 전해라. 점점 각지에서 적의 원군이 당도하고 있다. 대족장께서 나서고 계시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니.”

초원을 떠났던 3만 5천 중 현재 남은 것은 3만 2천 가량이다. 오테론을 점령하는 데까지는 별 피해가 없었으나, 이곳 살마드에서 있었던 수차례의 교전에서 병력이 상하고 말았다. 각지에서 밀려드는 제국의 원군을 상대하며 생긴 손실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이 5천 군대를 이끌고 적의 지원군을 막으러 나갔다. 그리고 포라칸은 지금 본군을 이끌고 살마드의 포위망을 유지하는 한편.

‘정말 거슬리는군.’

그가 있는 본진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산 정상. 그곳에는 보란 듯 제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설마하니 미끼였을 줄이야.’

소수의 결사대를 미끼로 내어주고 고지를 선점했다. 워낙에 은밀한 움직임에 그들이 깃발을 세우기 전까지는 그 존재마저 알아채지 못했었다.

‘아란딜 페레모어. 허명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지금도 저 산 정상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바크렌의 수호자라 불리는 사내는 예전부터 요주의 대상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제법 신경도 썼었건만, 이렇게까지 신출귀몰한 용병이라니. 예측했던 바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밖을 치러가자니 안에서 움직일 것이고, 좁혀 들어가자니 바깥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지.’

변명할 여지도 없는 명백한 실착이다. 갑작스레 뒤편에서 나타난 미끼에 정신을 팔렸으면 안 됐다. 조그마한 산이라 무시하며 놔뒀어도 안 됐다.

‘애초, 살마드를 곧장 함락시키지 못한 것부터 잘못이었는가.’

나름대로 공성전에 대한 각오는 했었건만, 저 두터운 3중 성벽 앞에서는 각오만으로는 부족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면 뚫을 수야 있겠으나, 그런 큰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었다. 살마드를 함락시킨다고, 바크렌을 얻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 후에는 본격적으로 진노한 제국과 맞서야만 했다. 이런 곳에서 흘릴 피 따위는 없다는 거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 뼈아프군.’

무재(武才)는 많다. 하지만 군재(軍材)가 없다. 그가 아란딜 페레모어를 치러 가면 본군을 맡아 지휘할 자가 필요한데, 그럴 만한 재목이 없었다. 대족장이 있었다면 둘이 역할을 나눴겠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다.

‘시간이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선…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에,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떠올리자 다시 한 번 노기가 차올랐다. 지금쯤 그 멍청한 작자는 저 도시 안에 있겠지. 도시를 함락한 뒤에는 실책의 대가를 물어 곧바로 목을 베어버리리라.

*

초원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은 새까맣게 포진한 군대를 내려 보며 쓰게 웃었다. 최소 1만이다. 반면 이쪽은 오천. 수가 배 이상 차이난다 하여 겁을 먹거나 싸우는 데 주저하는 일은 없지만, 그럼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토록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제국의 저력이라는 것을 살마드를 포위할 때까지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저 무수한 적들. 저 정도의 수가 이토록 기민하게 움직였다면 살마드를 포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출병했음이 분명하다. 급하게 파견한 원군인 셈이다.

“타라냐드와 본다인.”

제국의 두 주(州)에서 그렇게 보낸 병력이 도합 일만 이상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원군의 수는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마드를 함락시킨다고 해도 도시 안에 갇혀 농성이나 하는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치는 수밖에 없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혼자 중얼거린 말에 뒤편에 묵묵히 서 있던 전사장 카이렌이 응답했다. 타르가이 베르겐이 맹수의 발톱처럼 변한 손톱으로 미간을 그었다. 얇은 핏줄기가 코를 타고 흘렀다.

“바르바피들을 준비시켜라. 내가 군을 이끌고 맞붙을 테니 너는 그들을 이끌고 우회하여 적의 옆구리를 쳐라.”

“옛.”

명령이 떨어진 직후 군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 챈 제국군이 대응하기 시작할 무렵, 콰이렌이 이끄는 바르바피 500기는 이미 멀찍이 전장을 우회해 몸을 숨긴 후였다.

뿌우우우-!

선두에 선 기수들이 뿔 나팔을 불었다. 동시에 열을 맞춘 초원의 군대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군대보다 홀로 한참을 앞서 있었다, 그는 적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수한 적이 발산하는 거대한 투기를 한 몸에 받아냈다. 그냥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라 훈련된 제국의 정병들이 발산하는 기세였다. 그를 태우고 나아가는 빼어난 군마는 등을 으스러뜨릴 듯 조이는 힘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도망쳤을 만큼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하아.”

그의 혼은 극지의 만년설보다 차갑게 식고 얼어붙었다. 동시에 그의 피는 불꽃보다도 더 뜨겁게 끓어올랐다.

[……….]

죽은 신이 몸을 일으켰다. 살을 도려낼 듯 몰아치던 광풍이 한순간에 숨을 죽였다.

속박에서 풀려난 광신(狂神)이 고개를 든 이 순간. 천지만물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오오오오오오오-!]

히히힝!

“이, 이 녀석들이 왜 이래!”

있는 힘껏 내지른 소리 없는 포효가 구릉을 휩쓸었다. 사람보다 예민한 말들이 먼저 눈을 뒤집어 깠고, 기감이 발달한 무인들이 인상을 구겼다. 허나 그들조차 무엇이 그들을 주눅 들게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발로 말의 배를 두드렸다. 겁에 질린 말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위에서, 그는 도신이 긴 칼 한 자루를 뽑아들었다.

“대족장을 따라라!”

수천 전사들이 타르가이 베르겐의 뒤를 따랐다. 칼 같았던 전열이 역동하는 바람처럼 거칠게 요동쳤다. 투지가 들끓는 전사들이 심심찮게 앞으로 뾰족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들의 대족장보다 앞서지는 못했다. 여분의 무기는 물론이고, 그럴싸한 갑옷 하나 없이 가벼운 차림인 그는 누구보다 앞선 상태로 시작해 누구보다 더 많이 나아갔다.

“제 정신이 아닌 놈이구나!”

단기질주에 자극을 받았던지, 제국군에서 체구가 큰 사내가 홀로 말을 몰고 달려 나왔다. 화려한 갑옷이나 무장의 정도, 그리고 무엇보다 풍기는 사나운 기세로 보아 제법 이름 있는 자임에 분명해 보였다.

“네 놈의 그 만용이 죽음을 자초했느니라!”

큼지막한 창이 점이 되어 뻗어왔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해서 말을 재촉했다.

두 사람과 말이 근접했을 때. 대기가 작게 일렁였다. 길게 내뻗은 창의 창두가 싹둑 잘려나가고, 동시에 투구에 싸인 머리통이 허공 높이 붕 떠올랐다.

타르가이 베르겐과 그의 말이 스쳐 지나가고, 핏물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땅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저, 저런!”

경악하는 무수한 이들 중 한 명. 그는 그 한 명을 향해 말을 몰았다. 수십의 병사들이 길을 가로막았고, 그 뒤로 또 다시 수십이 겹겹이 벽을 쌓았다.

히히힝!

주인의 뜻에 따라 말이 힘껏 뛰어 올랐다.

퍼퍼퍽!

뛰어오른 말의 배에, 머리에 수십 발이 넘는 화살이 꽂혔다. 꼬챙이처럼 치켜 든 창들이 피 흘리는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 듯 대기했다.

“수고했다.”

타르가이 베르겐은 오테론에서 그러했듯, 또 한 번 말을 디딤돌 삼아 뛰어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돌로 된 성벽이 아니었다.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인의 장막이었다.

“어딜!”

수십 개의 창이 찔러왔다. 대기가 일렁이며 십여 개의 창두가 잘려나갔지만 그래도 남은 것이 수십 개. 그 중 서너 개가 기어이 얇은 가죽옷을 뚫고 들어왔다.

“혼자서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정녕 미친놈이로구나!”

백여 명이 넘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제국의 지휘관이 일갈했다. 몸 곳곳이 창에 꿰여 허공에 뜬 타르가이 베르겐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이를 드러냈다.

“필요할 때는 기꺼이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오늘은 아니야.”

“뭐…….”

유창한 제국어에 지휘관이 조금 놀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눈은 진한 자줏빛에 물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수십 개 창이 일순간 산산이 터져나갔다. 자주색 선이 수십의 무리를 지나 지휘관의 앞에 내리꽂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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