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페이브 -->
하루에도 몇 번씩 전령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대 반군 전선을 형성하는 각 도시와 성들에서 오는 연통이 줄을 이었고, 반군의 움직임을 살피는 정찰대로부터는 하루에 두 세 번씩 소식이 왔다.
“반군들이 호르빈켈에 주둔한 채 성벽을 쌓고 있다 하오.”
성주가 서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상 밖이군요. 곧장 어디로든 움직일 줄 알았는데…….”
모디레스의 말이 모두의 마음이었다. 시오도크의 백인장들을 제치고 성주의 바로 앞자리에 착석한 그는 지도 위, 자그마한 점으로 표시된 호르빈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호르빈켈일까요? 호르빈켈이 한때는 바크렌 전역에서도 손꼽힐 만큼 융성한 도시였다 하나, 그건 베이고르가 건재하던 시절의, 거의 백 년이나 다 된 옛적의 일입니다.”
한때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아주 오랜 옛적, 호르빈켈은 도시의 사방을 뒤덮은 황금 평야로 유명세를 떨쳤다. 바크렌에서 나는 곡물 중 오분지 일은 호르빈켈에서 난다는 말마저 돌았을 만큼 비옥한 곡창 도시였다. 허나 베이고르가 멸망하면서 호르빈켈은 급속도로 몰락했다. 바크렌 북부를 덮친 혹독한 추위와 눈발에 호르빈켈은 다른 북부의 도시들과 다를 바 없이 파묻혀버렸다. 이제 호르빈켈은 바크렌에서 쇠락한 도시의 대명사로만 불리고 있었다.
“그곳에 남은 건 옛 도시의 터와 얼어붙고 파묻힌 성벽뿐입니다. 2만에 달하는 대군이 주둔할 곳이 못 됩니다.”
반군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이제는 2만에 달하는 규모에 이르렀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보고들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단지 얼마간 머물 것이라면 성벽을 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아직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성벽을 쌓는다는 것은 호르빈켈을 다시 세우겠다는 의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망국의 재건을 외치는 이들이니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닐지요. 망국을 이야기 할 때면 꼭 나오는 도시 중 하나가 호르빈켈 아니겠습니까?”
시오도크의 백인장 둘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그들은 디파르그와 소원했던 이들로, 디파르그를 치기 전 모디레스에게 회유된 이들이었다. 디파르그가 반역죄를 지고 죽은 지금, 그들은 잔뜩 기가 살아 있었다.
반면, 디파르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두 명의 백인장은 있는 듯 없는 듯하며 제일 끄트머리에서 자리만 채우고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시오도크의 판세는 완벽히 뒤집혔다.
군부의 우두머리로서 성주와 대립각을 세우던 디파르그가 죽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반역죄로.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성의 광장 한복판에서 수많은 이들이 보는 가운데 사지와 목이 뜯겨졌다. 그 광경을 본 모든 이들의 모골이 송연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7명의 백인장 중 3명이 반역죄로 목이 날아갔다. 나머지 2명은 디파르그와 친밀하게 어울렸던 과거 탓에 알아서 몸을 사려야 했다. 남은 2명의 백인장은 기세를 탄 성주에 거스르기보다는 시류에 편승하는 쪽을 택했다.
“음. 일리가 있소. 호르빈켈을 재건한다면 망국이 다시 일어섰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힘이 되겠지.”
“성벽을 쌓기 전에 그들이 다 얼어 죽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성주의 호응에 안색이 밝아졌던 백인장은 뒤이은 군터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다소 원망스런 눈초리를 했지만 군터는 개의치 않았다. 상징적인 의미?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전쟁이 장난인가?
“당장의 보급품도 부족해 대규모 약탈대를 꾸리는 놈들이 한 자리에 멈춰 서서 성벽이나 쌓는다? 말이 안 되지 않소.”
“허면 그대의 생각은 뭐요?”
퉁명스레 받아친 사내는 군터가 지그시 노려보자 슬쩍 눈길을 피했다.
군터가 한 마디를 던지고, 어느새 회의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인이 아닌 성주 같은 경우에는 이마에 땀까지 맺혀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언짢아지니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사나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나운 고함처럼 들렸다.
“내가 아는 건 하나요. 놈들은 바보가 아니라는 것.”
졸지에 바보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 백인장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반박하거나 하지는 못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 군터의 사나운 시선을 받으며 태연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멍청한 놈들!”
“회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뿐이겠느냐. 놈들은 성벽 뒤에 숨어있기만 하면 적들이 알아서 무너져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시오도크 놈들이야 기대도 안 했지만, 멜루니악 놈들은 좀 다를 줄 알았건만.”
군터는 지금까지처럼 소규모 정찰대가 아닌, 규모 있는 정찰대를 꾸려 반군의 동태를 살필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금방 퇴짜를 먹었다. 그만한 병력을 빼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무슨 싸우러 가자는 것도 아니고 정찰대를 더 크게 운용하자는 데 전력누수를 운운하느냔 말이다.
또, 전력누수보다 그를 화나게 한 것은 “공연히 반군을 자극할 수 있다”는 핑계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겁쟁이의 발언이 아닌가.
군터는 내심 성주가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성주도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무슨 법정의 법관처럼 중립을 지키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은근슬쩍 겁쟁이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멜루니악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거기라고 이곳보다 낫겠냐마는, 적어도 그곳에는 벨리사가 있었다. 이제 곧 세상에 나올 아이도 있었다. 지금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가족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대장님. 조금 진정하심이.”
살라스가 한 걸음 물러난 것을 보며 군터는 다소 격양된 감정을 가라앉혔다.
“또 흥분해버렸군.”
상황에 따라 감정이 춤을 추는 것이야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 같은 경우는 감정에 따라 기세가 일어나버리니 그것이 문제였다. 어지간한 사람은 겁에 질려버리고, 나름대로 칼밥 좀 먹었다는 이들조차 거북해하니 말이다.
‘확실히 문제다.’
어디 깊은 산속에 처박혀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이래서는 곤란하다. 부하들을 대할 때도 불편할뿐더러, 무엇보다 벨리사나 곧 태어날 아이 앞에서 이래버리면 어찌한단 말인가.
‘방도를 찾아봐야겠군.’
지금까지는 별 생각 없었으나, 이제는 심각성을 느낀 만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했다.
“모페이브는?”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대장님의 창 앞에서 보낸다는군요. 혼자 인상 쓰고 웃고 하는 꼴이 꼭…….”
잠깐 망설이던 살라스는 조금 줄어든 목소리로 “미친 놈 같답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군터는 크게 웃으며 모페이브가 머물고 있는(?) 지하실 향했다. 혹여 따라붙을 수 있는 눈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디파르그를 쫓으면서 잠행에 솜씨를 보인 부하 몇이 그의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추적자라도 붙는다면 즉시 처리하거나 신호를 보낼 테니 꼬리를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나저나 언제 한 번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터인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로 엊그제…….”
“그건 제대로 된 자리라 할 수 없지 않느냐.”
엊그제 군터는 힘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부하들을 치하하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간단히 술과 안주만 낸 자리였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난 그리 생각지 않는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에 내가 얻은 것은 매우 크지 않더냐. 그러니 날 따라준 너희에게도 마땅히 챙겨주어야지. 아…따로 마련하는 자리보다는 차라리 상급으로 주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군.”
일찍이 십인장이었던 시절, 군터는 친우였던 로크에게서 크게 배운 바가 있었다. 부하들을 이끄는 지휘관이라면 수하들을 챙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군터는 그 이후 한 시도 그때의 깨달음을 잊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참 바보 같았지.’
그 역시 말단 병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제 욕심만 챙기는 상관 밑에서 구르고 구르며 얼마나 상관을 씹어댔던가.
“내일 아침에 모두 불러 모아라.”
생각난 김에 하기로 했다. 부하들에게 일일이 상급을 주고나면 사재가 거의 동나버리겠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그는 딱히 돈 쓸 데도 없다. 가끔씩은 자작을 하기도 하지만 여자를 안을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조금은…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받쳐줄 부하가 있어야 대장질도 해먹는 법이다. 내가 많이 먹여두면 너희가 그만큼 튼튼하게 받쳐주지 않겠느냐?”
군터는 살라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지하실로 들어갔다.
*
“뭔가 알아낸 게 있나.”
지하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느껴지던 울림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더욱 강해졌다. 이건 숫제 상사병이 걸린 채 애인을 기다리는 수준이었다. 그 간절함이 가슴 깊이 절절이 틀어박혔다. 군터는 화난 벨리사를 달래듯 창을 잡았다. 그러자 지독하리만치 웅웅거리던 울림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모페이브가 피식 웃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초췌한 얼굴에 걸린 웃음은 초라하다 못해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주인을 알아보는 무기라는 건 그럴싸하게 치장할 때 으레 쓰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게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들렸나?”
“느꼈습니다. 어제는 몰랐습니다만, 계속 집중하고 의식하려 하니 조금씩 느껴지더군요. 그 창은 당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게다가 맹수처럼 아주 사납지요. 다른 자가 손을 대면 거침없이 위협합니다. 아마…심지가 약한 자가 잡았다가는 그대로 먹혀버릴 겁니다.”
“먹혀?”
“그 창은 영성(靈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령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죽은 신의 잔재가 피를 먹는 술법과 만나 기이한 형태로 발아한 겁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이지요. 어찌 그런 것이 가능한가 싶지만…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흐흐.”
모페이브를 감시하던 부하가 말하길 미친 것 같다 하더니, 실제로 그래 보였다. 얼굴은 다 썩어가고, 시커먼 그림자를 단 눈에는 핏발이 섰다. 보아하니 어제 봤던 이후로 한 숨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알아낸 건 그게 다인가?”
“직접 손을 댈 수가 없고, 술법을 쓰기도 지켜보는 눈 덕에 여의치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단지 끝없이 인지하고 느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비루한 변명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뭐 제대로 손을 댈 수도 없어, 그렇다고 장기인 술법을 쓰려고 하면 당장 목을 날릴 것 같은 감시가 몇 명씩 붙어 있으니 뭘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참작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럼…….”
“그렇게 알아낸 것은, 그 창에 실로 상당한 수준의 귀기(鬼氣)가 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알아낸 것이 없다고 해도 이해해주려 했건만, 모페이브는 그런 상황에서도 기어이 무언가를 알아낸 모양이었다.
“귀기?”
“흔히 과일을 분류하면 껍질과 알맹이로 나누지요.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혼으로 나뉘지요. 비유하자면 육체가 껍데기, 혼이 알맹이입니다. 인간이 죽으면…아니,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죽는 순간 그 혼은 육체를 떠나 세상에 깃들게 되지요. 부르는 명칭은 다 다릅니다. 제국에서는 원신의 보옥(寶玉)이라 부르는 모양이지만, 저희는 그것을 하나의 물결이라고 부릅니다.”
“하나의…물결?”
“예. 세상만물을 내고, 또 거둬가는 끝없는 존재. 절대적인 흐름이지요. 뭐…그건 그렇고, 아무튼 모든 것은 마지막이 되면 자연히 그 물결에 합류해야 합니다. 허나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어떤 힘에 의해 속박이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쌓은 무게에 짓눌려 흘러가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 창의 경우에는 명백히 전자입니다. 본래 그 창에 걸린 주술은 생명의 핏속에 흐르는 생기를 빨아들이는 것인데, 거기에 신의 잔재가 덮이고 영성까지 생기면서 본래는 없던 힘이 생겨버린 듯합니다. 핏속의 생기만이 아니라, 혼에 깃든 영기(靈氣)마저 흡수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추정이긴 합니다만…그게 아니면 이리 비정상적으로 쌓인 귀기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생명을 앗은 무기에는 자연히 귀기가 서린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은 느껴지지 않습니까? 제가 처음 그 창에 서린 귀기를 느꼈을 때, 저는 한동안 두려워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
느껴지지 않냐고? 물론 느껴진다. 하지만 그 정도로 엄청난 귀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두렵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일정부분, 그의 창과 일체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남들이 자신의 몸 어딘가를 보며 흉측하다 해도 본인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 역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뭐…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그 창은 위험합니다. 귀기라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흔하다면 흔한 것이지만 일정량 이상이 쌓이면 종종 끔찍한 사고를 낳지요. 하물며 그토록 터무니없는 수준이라면…….”
“쓸데없는 걱정이다. 병기는 본래 흉한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물건이 불길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뭐가 문제란 말이냐?”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걱정보다, 뭔가 쓸모 있는 걸 알아내지는 못했나? 네 말이 맞다 친다면, 예를 들어 그렇게 흡수한 귀기를 사용하는 방법이라던가, 효과라던가.”
“…그런 것은 모릅니다. 음…상대를 오싹하게 만들 수는 있겠군요. 아무래도 귀기라는 것이 결국 사기(死氣)와 비슷한, 생기와 대치하는 기운이니까 말입니다.”
“별로 쓸 만하게 들리지는 않는군.”
결국 알아낸 것 중에 담아둘 만한 것은, 그의 창이 영성을 지녔다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이전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던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공약했던 연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