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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5화 (105/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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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페이브는 그의 앞에 꽂힌 창을 위아래로 살폈다.

“창…이군요. 뭔지 모를 술법이 걸린.”

그게 다인가?”

일전에 초원 부족의 신녀였던 라일라는 처음 그를 보자마자 그의 창에 기이한 힘이 서려 있음을 알아챘다. 허나 모페이브는 달리 특이한 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술사로서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일까?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지.’

모페이브는 제법 솜씨 있는 술사였다. 디파르그를 추적하며 전투를 벌였을 때, 그의 술법 덕에 꽤나 귀찮아졌었으니까 말이다. 만약 라일라가 그보다 실력이 뛰어난 술사였다면 어찌 그가 그리 쉽게 그녀를 사로잡았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술사의 능력이라는 것이 전투능력으로만 평가받아야 되는 것은 아니라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렇더라도 군터는 라일라의 술사로서의 역량이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창에 서린 기운을 알아본 것이 술사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다른 능력이라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무언가가 있군요. 제가 모르는…….”

반문하는 목소리에 담긴 실망감을 읽은 모페이브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훨씬 더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물론 묶여있는 터라 꼼꼼하게 한다고 해봐야 눈에 힘을 주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는 처음 살필 때보다 서너 배 이상 시간을 들였다.

“역시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는 그저 법구로만 보이는군요. 제법 많은 힘이 응축되어 있는 것 같지만…그렇다고 법보라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까?”

혹여 그가 다른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가 싶어 면밀히 보았지만 모페이브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뻑였다. 그는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이야기해도 되겠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이다. 터놓고 물어볼 이가 없어 혼자서 의구심만 키워 왔지만, 모페이브에게라면 털어놓을 수 있었다. 여차하면 언제든 처리해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창에는 피먹이 주술이라 불리는 술법의 힘이 깃들어 있다.”

군터는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가 초원 출신이며, 그의 부족에 대대로 내려오던 피먹이 천을 이용한 술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창에도 그 술법이 걸려 있으며, 이제껏 숱한 적을 해치우고 그 피를 먹여왔다는 것 등.

이제껏 모페이브가 입이 아프도록 설명을 했다면, 이제는 군터가 그랬다. 그는 그가 처음 창을 쥐었던 그때부터 겪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간략하게나마 모두 이야기했다.

모페이브는 처음에는 표정변화 없이 가만히 군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담담하던 표정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괴인들과의 싸움에서부터였다. 그러다 사교도 마을에서 바칼을 만났던 부분에서는 턱이 빠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을 떡하니 벌렸고, 라일라가 그를 처음보자마자 했던 말을 전해 듣고는 흥미롭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군.”말이 창에 대한 설명이지, 반쯤은 제국의 군인 군터의 인생역정이었다.

“놀랍군요. 솔직히…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듯합니다.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개인적으로 이해가 안 되던 부분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해가 안 되던 부분?”

“예. 제 스승께서 사용하신 법술은 신언을 통해 얻은 것. 엄밀히 말해 신의 힘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위력은 두터운 성문조차 단번에 박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맹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정면에서 맞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 창이…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요.”

“생각하는 그것?”

“영(靈)이 가장 강한 빛을 발하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모른…아니.”

묻는 말에 답은 안 하고 갑자기 딴소리인가 싶었지만, 그의 질문은 뭔가 익숙했다. 이와 같은, 아니 비슷한 질문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죽기 직전이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존재가 소멸할 때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생명이 있는 것에만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 모든 존재는 마지막에 가장 강한 빛을 발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빛이라는 것은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가장 거대해짐을 뜻합니다. 힘이란 것은 그 안에 포함된 부수적인 일부에 불과하지요.”

서론이 장황하다. 그가 말하려는 본론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기를 바랐다.

“모든 존재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존재했던 증거, 즉 잔재를 남깁니다. 동물이 시신을 남기고 나무가 가지며 잎을 남기듯 말입니다.”

“난 너무 긴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되도록 짧고 간단한 것을 좋아하지.”모페이브가 답답하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가 짜증이 뚝뚝 묻어나는 군터의 표정을 보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세상만물이 그러하듯, 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소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나 그럼에도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당신께서 바칼의 마지막을 보셨다면, 그의 잔재가 그 창에 스며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바칼의 잔재라고……?”

“당신께서 말한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 피먹이라는 이름의 술법의 원리가 핏속에 깃든 생기를 빨아들이는 것이라면…가능하지요. 가능하고말고요. 본디 신은 형체 없는 기의 응집, 근원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은 없지만, 그들은 생명 있는 것들을 무수히 낳지요.”

생명이 없되, 생기는 있다. 아니면 생기의 뿌리가 되는 다른 기운을 지니고 있거나.

전자든 후자든, 가설에 대한 충분한 증빙이 된다.

“만약 제 가설이 옳다면, 그렇다면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유의 일입니다. 어쩌면 이 창은 법구…아니, 법보와도 비할 수 있는 보물일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흥미롭군요. 만약 당신께서 허락한다면, 저는 당신의 창을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이건 정말…….”

모페이브가 자기 목숨 외에 이렇게 의욕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창이 이토록 술사의 주목을 끌 만큼 특이하다는 뜻이다. 역시 창에 대해 숨기기를 잘한 것이다.

“…….”

모페이브는 그의 앞에 꽂힌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이 꼭 재미난 장난감을 앞에 둔 어린아이 같았다.

‘어찌할까.’

군터는 모페이브를 보며 고민했다.

포박을 풀어줄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풀려난 모페이브가 술법을 난사한다 해도 문제 없었고, 그러기도 전에 목을 벨 자신도 있었다.

다만, 그를 풀어주고 창을 살피게 하면 그때부터는 죽이거나 끌어안고 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군.’

애당초 모페이브에게 창을 보일 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게 아닌가? 이제와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새삼스럽고 우스운 일이다. 적당히 이용해먹으려는 생각이었다면 창은 보이지 말았어야 한다.

“좋다.”

덥썩 창을 쥐고 그대로 휘둘렀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을 만큼 쾌속하게 그어진 궤적은 정확하게 모페이브의 가슴 한복판을 갈랐다. 정확히는 그의 가슴팍을 둘둘 감싸 묶은 굵은 줄을.

“허억!”

모페이브가 기함을 토했다. 아랫도리서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진 않았지만, 표정만 봐서는 오줌이라도 지린 것 같았다.

군터는 다시 한 번 그의 코앞에 창을 내리 찍었다. 모페이브가 들썩이는 꼴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얼마든지 보고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라. 그 역시 네가 여기서 살아나가는 데 큰 영향을 줄 테니.”

몸을 돌려 지하실을 나가려하자 등 뒤에서 애틋한 부름이 느껴졌다.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닌, 마음에 직접 닿는 울림이었다. 그는 이 소리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한 녀석.’

이제는 대단한 녀석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부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 그의 창은 더 이상 단순한 무기라고만은 볼 수 없는 희한한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만 해도 날 두고 가지 마라는 듯 애처롭게 울고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봐야 미친 놈 취급이나 당할 테지. 신뢰하는 부하들에게도 말 못한 이유 중에 하나다.

“내일 다시 들르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으헉!”

모페이브가 창에 손을 갖다 댔다가 기겁을 하며 뒤로 넘어졌다. 군터는 웃음을 삼키며 지하실을 나섰다.

‘어느새 나도 전사로서 실격인가.’

예전 같았으면 무구를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몸에서 떨어뜨리는 것에조차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창이 주인을 가릴 만큼 특별하다는 것과, 창을 맡긴 모페이브를 지하실에 안전히 가둬두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말이다.

‘성장한 건가, 아니면 그저 변했을 뿐인가.’

아직도 강하지 못한 마음은 은근히 전자에 기울었다.

*

성주 파지오는 잉크통에 담겨 있던 깃펜을 들었다.

뾰족한 펜촉이 빈 종이를 위에서 아래로 거침없이 할퀴었다. 누가 보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멋들어진 필체가 순식간에 종이 전체에 가득 찼다.

한 장 가득 글을 쓴 그는 또 한 장의 종이에도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각기 하나씩, 얇은 가죽으로 말았다. 그 뒤에는 돌돌 말은 겉가죽 위에 기이한 열기가 감도는 인장을 찍어 봉인했다.

“됐소. 이것을 들고 가면 그분께서 만나주실 것이오.”

봉인을 마친 서신을 건네받은 모디레스와 군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약조한 것이었잖소. 이렇게 약조를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쁘군.”

빈 말이 아니었다. 성주의 원한은 그만큼 대단했다. 그는 디파르그의 시신을 본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차갑게 식다 못해 파리가 끓는 디파르그의 몸뚱이 중 목과 양팔, 다리에 굵은 줄을 묶었다. 그리고 다른 쪽은 말에 묶은 채 병사들로 하여금 말에 채찍질을 하게 했다.

어찌 되었겠는가? 디파르그의 시신은 다섯 갈래로 찢겨 나갔다. 몸 안에 그나마 남아있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끔찍함에 눈을 돌리는 백성들에게 성주는 역적의 말로라며 일장연설까지 했다.

군터는 그가 일의 전모를 알게 되었어도 그랬을까 궁금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이 실은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접근해온 사교도였음을 알았다면, 그래도 그는 그토록 순수하게 분노할 수 있었을까?

‘어차피 지나간 일. 그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어쨌거나 그는 지금 후련한 얼굴로 기쁘게 웃고 있다.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서신을 감싼 가죽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가죽 자체가 특별한 것인지, 아니면 장인의 손길이 닿아 부드러워진 것인지는 몰라도 안에 든 귀한 내용물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관재중신(管財重臣)이라니.’

살마드의 재정을 집행하는 관직으로, 급수로는 2급에 해당하는 중신 중의 중신이었다. 그 위로는 대신 둘만이 있을 뿐이니, 그야말로 살마드 정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성주의 뒤를 봐주는 이가 제법 거물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관재중신이라니.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이것이 바로 출셋길을 열어주는 통행증인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지만, 가치는 금화 수백 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바로 이것을 손에 넣기 위해 그 고생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조그마한 것을 위해서 말이다.

========== 작품 후기 ==========

제목과 소개글을 바꿨습니다.

연참은 오늘(토) 낮-오후 즈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쿠폰 주신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엊그제 주신 분도 계셨는데 제가 확인을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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