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약하는 자들 -->
모디레스와 합의가 이뤄진 순간 디파르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사실 살아서 시오도크로 가더라도 결국에는 죽었을 테니, 그의 운명은 일찍부터 결정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다만 운명의 집행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
군터는 디파르그의 목을 베는 대신 심장을 찔렀다. 깔끔하려면 목만 베어가는 편이 좋겠지만, 나름대로 성주를 위한 배려였다.
그리고 짐작했던 대로, 성주는 목만 베어오지 않고 몸뚱이에 붙여 가져온 데 기뻐했다.
“오오! 수고했소. 수고했어!”
성주는 어째서 살려서 데려오지 않았느냐 묻지 않았다. 설령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해도 디파르그와 함께 온 이백여 개의 수급과, 그만큼의 피 묻고 상한 무구들을 보고서 어찌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그가 편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무렵, 그들은 달빛을 맞으며 수백 명이 부딪치는 전투를 벌인 것이다.
“저희가 능력이 부족해 놈을 생포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모디레스가 적절하게 선수까지 치니, 성주는 그들을 치하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괜찮소. 최선을 다했음을 내가 알고 있으니,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허허. 드디어…드디어 내가 네 원한을 갚는 날이 왔구나…….”
군터와 모디레스는 성주가 감상에 젖도록 놔두고 그의 관저를 나섰다. 그리고 서로의 노고에 대해 몇 마디 치사를 건넨 후 언제고 술 한 잔 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한 채 헤어졌다.
모디레스와 헤어진 후. 군터는 그의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놈은?”
할렌이 답했다.
“의식을 차렸습니다. 살라스님이 병사 셋과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좋아.”
기분이 좋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갔다. 성주가 내준 쉽지 않은 일도 깔끔하게 처리했고, 전혀 기대치 않았던 술사(추정이지만)까지 손에 들어왔다. 이보다 더 순조로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오셨습니까.”
급히 마련한 장소. 예전에 여관이었다는, 지하가 달린 허름한 건물에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드러나지 않는 위치에서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지하에는 살라스를 비롯한 몇 병사들과, 의자에 앉은 채 결박된 사내가 있었다.
“저, 저를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그는 잔뜩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과 목소리가 너무 적나라해서 도리어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보고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아는 것은 다 털어놓겠다고 하더군요. 묻지 않아도 이것저것 다 말할 기세라, 대장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살라스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말 다한 셈이다. 그 역시 이놈이 단순한 겁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다분히 인간적인 상대라 낯설었다.
그는 부하 병사가 가져온 의자에 앉아 사내와 마주보았다.
“아는 것을 다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묻는 말에만 착실하게 답해라.”
“그, 그럼…살려 주실 겁니까?”
“글쎄. 지금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말하지 않거나 거짓을 말하면 즉시 죽이겠다는 것 하나다.”
“…….”
“이름.”
“모페이브입니다.”
“넌 술사인가?”
“예. 주술사입니다.”
군터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가 곧바로 가라앉았다.
“좋아. 넌 뭐하는 놈이지? 디파르그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같은 교단 소속입니다. 디파르그는 교단의 성전사(聖戰士)이고, 저는 수습 사제(司祭)이지요. 교단의 사제이신 스승님을 돕고 있었습니다.”
“교단?”
“예. ‘벌판의 파수꾼’을 섬기는 교단입니다. 달리는…….”
“고스바니악.”
“맞습니다. 그렇게도 불리지요.”
군터가 살라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에 살라스는 짧게 답했다.
“사교(邪敎)입니다.”
그 말에 모페이브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사교? 바칼을 섬기는 놈들과 같은 부류인가?”
“베이고르가 바크렌을 다스릴 당시 바칼 교단의 세가 가장 컸기에 사신하면 바칼이 대표적으로 꼽힙니다만, 그 외에도 사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다수 있습니다. 모두 바크렌의 토착신들이시지요. 제국의 통치가 시작된 후 그들은 모두 사신이 되었고, 그를 섬기는 신도들도 사교도가 되어 개종하거나 음지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일파가 이런 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군요.”
군터는 사교에 대해 상당히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지하의 사교도 마을에서 바칼과 맞닥뜨렸을 때의 그 기억은, 아직도 가끔씩 악몽으로 재현되곤 했다. 그것이 지금 그의 표정이 미미하게나마 굳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디파르그는 처음부터 사교도였던 건가?”
“예. 그의 집안 모두가 신자입니다.”
“너희는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시오도크를 치려는 생각이었나?”
“그렇습니다. 베이고르군이 쳐들어오면 내응하여 시오도크를 무너뜨릴 계획이었지요.”
“베이고르군……?”
잠시 베이고르군이 무엇인가 생각했던 군터는 곧 그것이 반군의 명칭임을 떠올렸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너희는 반군과 통하고 있었던 건가?”
“예. 저희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교단들도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재건할 왕국에서 저희의 신앙을 보장하겠노라 약조했습니다.”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아무리 생각을 한다 해도 사교도의 세가 이 정도까지 규모 있을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계획은 원대했건만, 일을 진행시키는 솜씨는 서툴렀군. 성주가 눈치 채지 못할 줄 알았나?”
내응을 계획했다면 응당 되도록 성주의 의심을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디파르그는 대놓고 성주의 반감을 샀다. 계획을 생각했다면 그런 멍청한 짓은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많이들 그것을 우려했지요. 하지만 디파르그가 워낙 강하게 밀어붙였고, 또 그만큼 성과도 얻어내는 터라 다들 불안해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상하군. 몇 번 본 것이 전부긴 하지만, 꽤나 신중한 놈처럼 보였는데.”
“맞습니다. 신중하지요. 본래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율린과 틀어지고 난 후부터는 사람이 변했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부터는…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죠.”
군터는 율린이라는 여인이 성주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시비라는 것을 알아챘다.
“율린? 그녀와 디파르그는 무슨 관계지?”
“연인이었습니다. 시오도크의 일이 끝나고 나면 아이까지 갖기로 약속한 사이였죠.”
“허!”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왔다. 자신만 그런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살라스를 비롯해 내막을 알고 있던 부하들이 모두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럼, 성주의 시비로 들어가기 전부터 둘이 연인관계였다는 건가?”
“예. 율린을 성주에게 접근하도록 시킨 것이 디파르그입니다. 그녀는 디파르그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으면서도 성주의 관심을 끌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니까요.”
“성주는 디파르그가 그녀를 죽였다고 믿던데.”
“맞습니다. 그가 율린을 죽였지요.”
“어째서?”
“율린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마음?”
“본래 율린의 임무는 성주의 총애를 얻은 뒤, 그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교단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꼭두각시로 만들어? 그런 것이 가능한가?”
“성주는 신체가 강건한 무인도 아닌, 책상 앞에 앉아 글이나 끄적이는 문인입니다. 약간의 약과 술법의 도움이 있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좋아. 그렇다 치고, 그럼 뭐가 문제였지?”
“어느 날부터인가 율린이 이상한 태도를 보이더군요. 일의 진행도 생각보다 지지부진했고…….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랐습니다만, 성주와 그녀간의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의심이 들기 시작했지요.”
“성주와 눈이 맞았다고 생각했나?”
“예. 디파르그가 그녀를 따로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다그치기도 했지만 율린은 따로 생각이 있다며 시간을 달라 하더군요.”
대충 이야기가 어찌 흘러간 것인지 그려졌다. 아마 디파르그나 사교도들은 그 율린이라는 여인이 성주의 정실이 될 기회를 맞았다는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흔들릴 만도 하지.’
성주는 그 율린이라는 여인에게 진심으로 대했다. 정실로 들이려 한다는 것도 진심이었을 것이고, 여인 역시 그를 느꼈을 터. 신앙심이건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에 대한 애정이건, 성주의 정실이라는 자리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율린이라는 여인이 속물이어서가 아니라, 욕심이라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은 다 그럴 수밖에 없다. 미래도 불투명한, 숨어살아야 하는 사교 집단의 일원으로 있느니 당당한 제국의 성주와 맺어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결국, 치정으로 시작해 치정으로 끝난 건가.’
그러고 보면 디파르그라는 놈도 웃기는 놈이다. 뭐한다고 자기 연인을 성주에게 보냈단 말인가? 그렇게 굳게 연인을 믿었던 걸까? 하지만 군터는 그였더라면 아무리 믿음이 있었더라도 디파르그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여인에게 그런 일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벨리사를 성주에게 보낸다? 차라리 성주의 목을 따고 말지, 그런 짓을 절대 할 수 없다.
‘멜루니악에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런지…….’
적어도 아이가 나오기 전에는 돌아가고 싶건만, 현 상황을 보고 있자면 뜻대로 될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렇게 그녀가 찾아와 또 한 번 변명을 늘어놓았을 때, 디파르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찔렀습니다.”
“멍청한 놈이군.”
자기 여자를 도구처럼 쓰고, 그 도구에게 배신당해 망가져버린 사내에게 군터는 그 이상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