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약하는 자들 -->
두 발이 묶인 채 디파르그의 검을 받아내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었다. 따라가는 공격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들어오는 공격을 걷어내며 간간이 반격을 섞는 것이 고작이었다.
콰득!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예상치 못한 술법 공격이 가장 문제였다. 땅에서, 벽에서, 천장에서 뻗어오는 돌의 돌기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성가셨다. 특히나 시선이 닿지 않는 뒤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은 그저 감각으로 느껴야만 했다. 만일 그의 기감(氣感)이 탁월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뒤통수나 등에 구멍이 나 쓰러져야 했을 것이다.
“이런! 어떻게!”
또 한 번 뒤편에서 들어온 돌기를 피하고 팔꿈치로 찍어 박살내자 저쪽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하앗!”
맞댄 검을 힘껏 밀어내고 다시 한 번 두 다리에 온 힘을 줬다. 하지만 이번에도 발을 빼낼 수는 없었다. 다만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토인의 손이 살짝 움찔거렸다. 동시에 노인의 신음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이 토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노인의 재주인 듯싶었다.
‘내가 힘을 쓰는 만큼 저 늙은이도 힘을 쓰는 건가.’
슬쩍 노인의 기색을 살피니 고개가 앞으로 나오고 허리는 뒤로 빠져 있었다. 영락없이 지친 모습. 몇 번 더 힘을 주면 이 빌어먹을 토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러나게!”
갑자기 디파르그가 훌쩍 옆으로 몸을 굴렸다.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뒤편이 보였다. 노인의 양 팔을 둘러싸고 반투명한 기류 같은 것이 활발히 회전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 군터는 급히 몸을 빼려 했으나 토인의 손아귀가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꽤 느슨했기에 한 발 자국 정도는 뗄 수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우우우웅!
광풍(狂風)이 덮쳐왔다. 몸은 쇳덩이에 짓눌린 것처럼 무거워졌고 머리카락은 미친 듯이 휘날렸다. 눈도 제대로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우어어어어어!]
무언가 크게 번뜩였다. 노인에게서 뻗어 나온 반투명한 빛 덩이는 향연은 그의 앞에서 온전한 형체를 이뤘다.
빛의 짐승.
찬란하게 빛나는 짐승의 형상이 그를 들이받았다. 군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그를 속박하던 토인은 어느새 흙으로 돌아간 뒤였기에, 그는 화살처럼 뒤로 쏘아져 나갔다. 만약 도중에 벽에 부딪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멀리 날아갔을 것이다.
콰앙!
벽이 으깨지고 토사가 흘러 내렸다.
“커헉!”
흙먼지가 입과 코로 흘러들어왔다. 허나 그런 것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턱 막혔던 숨이 등에 닿은 충격으로 트이자 군터는 피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으…으윽!”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이었다. 빛의 짐승에 부딪친 순간 온몸은 물론이고, 정신 자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만약 충돌의 순간에 등에서 스며든 정체 모를 기운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다.
‘네 녀석이냐. 무슨 조화를 부린 게냐.’
바닥에 널브러진 창검을 쥐었다.
틀림없다. 충돌하던 순간, 등에 매고 있던 창검에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와 그의 몸을 감쌌다. 그 기운이 방패가 되어 충격을 완화시켰다. 그는 그 짧은 순간에도 기운에 서린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내 것이지만 모르는 것투성이군.’
몸통 중간이 부러진, 나머지 반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검을 버리고 창검을 지팡이 삼아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충격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어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말도 안 되는…….”
뿌연 흙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키자 탈진이라도 한 것처럼 헐떡이는 한 명과, 우두커니 선 두 명이 보였다. 하나 같이 볼 만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뜨거나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들은 모두 방금 전 그 빛나는 짐승에서 대해서 아는 듯했다.
“영악한 놈들.”
애초에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 한 방을 위한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방 제대로 얻어맞았더니 고통도 고통이지만 분기가 치밀었다.
‘저 늙은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군터는 디파르그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노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공간이 협소하니 길게 가져가는 건 안 되겠군.’
애당초 처음부터 검창을 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통로의 너비가 꽤 널찍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그의 키보다도 더 긴 창을 자유롭게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검이 부러져버렸으니 이제는 별 수 없었다.
“와라. 죽이지는 않겠다.”
“허세 부리지 마라 이놈!”
가벼운 도발에 디파르그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마 군터의 몸 상태가 최악인데 연기를 하고 있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군터의 몸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카앙!
창날이 검면을 후려쳤다. 동시에 창대 끝이 그의 어깨를 올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디파르그가 나뒹굴었다. 그 순간 군터는 땅을 박차, 또 다시 무언가 수작질을 부리려 손을 꼼지락 대던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노인이 다급히 몸을 뒤로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이 땅을 제대로 밀어내기도 전에 창극이 그의 허벅지를 깊게 파고들었다.
“크악!”
군터는 노인이 쓰러지기도 전에 창을 놓고 또 한 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역시 무언가 수작질을 부리려던 젊은 사내의 목을 움켜잡았다.
“커, 커컥!”
억센 손아귀에 틀어 잡힌 사내의 몸이 볼썽사납게 대롱대롱 흔들렸다. 사내의 두 손이 군터의 팔뚝을 더듬었지만 그의 빈약한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깔짝깔짝…어지간히 귀찮게도 굴더군.”
군터는 승자의 여유를 만끽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디파르그나 노인에 대해서는 주의를 놓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핏기가 가셔가는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하…하려…….”
돌아가기 일보직전인 눈에 진한 두려움이 어렸다. 그것이 꽤나 색달랐다. 왜냐하면, 이곳에 와 상대한 모든 이들은 하나 같이 독기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금 목이 잡혀 숨이 반쯤 넘어가고 있는 사내는 굉장히 인간적이었다.
“살고 싶나?”
“그르륵…….”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기어이 눈이 돌아가 버리고, 사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 즈음에서 군터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눈이 돌아가기 직전, 사내의 몸이 움찔거린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리들 틈에 웬 똥개가 한 마리 섞여있군.’
나쁘지 않다. 이리는 길들이기가 힘들지만, 똥개라면 이야기가 다르니까.
*
“이놈은 따로 챙겨라.”
살라스에게 아직까지 의식을 잃고 있는 사내를 던졌다. 살라스는 별 물음 없이 그를 병사들에게 넘겼다.
“대장님. 이 노인은?”
“사제라고 부르더군. 술법 같은 기이한 힘을 사용하는 늙은이다.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조심해라. 목에 칼이라도 대고 있던가, 아니면 허튼짓거리를 하려 할 때마다 허벅지의 상처를 쑤셔버려라.”
노인과 사내를 부하들에게 넘기고, 군터는 디파르그를 맡았다. 어깨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그는 그 상태서도 저항하다 허벅지 뼈도 으스러지고 말았다. 덕분에 지금은 거의 인사불성의 상태였다. 역시 아무리 독기가 가득해도 한계를 넘는 고통 앞에서는 이처럼 혀를 빼물게 되어 있었다.
“군터 대장!”
군터 일행은 통로를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모디레스들과 마주쳤다.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했던 듯, 모디레스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전투를 끝마치자마자 바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안심하시오. 달아나던 쥐새끼는 이렇게 잡았으니.”
엉망이 된 몰골의 디파르그를 들어 올리니 모디레스가 안도하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군터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입장이 바뀌었더라면 그 역시 저런 표정을 지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결과는 났고, 웃는 쪽도 정해졌다. 이제는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해야 할 때였다.
“바깥의 상황은 어떻소?”
“다 정리되었소. 수색을 명하고 오는 길이오. 그 자들은?”
포로는 여섯이었다. 신중한 살라스가 상대하던 백인장 둘과 나머지 하나를 생포해버린 것이다.
“나도 모르오. 심문을 해봐야겠지.”
“이곳에서 말이오?”
“그대는 어찌하고 싶소? 그대의 뜻에 따르지.”
군터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디레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성주가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적당한 명분과 디파르그다. 쉽게 말해, 여기서 디파르그의 목과 저 밖에 있는 증좌들만 가져가도 아무 문제없다는 것이다.
물론 군터는 디파르그의 의도나,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세력의 정체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굴복의 빛을 내보인 술사(로 추정되는) 사내, 더 욕심을 부린다면 노인까지였다. 때문에 이곳의 진상을 적당한 선에서 묻고 싶은 것이다. 만약 디파르그를 시오도크에서 심문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포로들도 엮여 들어갈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솜씨가 좋군. 은근슬쩍 내게 선택을 미루는구려.”
허나 모디레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살라스가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 얕은 수는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역시 살라스가 말한 대로 터놓고 거래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터놓고 말하지. 난 저놈을 갖고 싶소.”
“응?”
군터는 부하에게 붙들려 있는, 아직까지 의식이 없는 사내를 가리켰다. 모디레스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째서지?”
“저놈, 술사 비슷한 놈이오. 그래도 왜냐고 묻는다면 개인적인 흥미라 해두지.”
“…해서, 저 자를 가지기 위해 일을 묻고 싶다는 거군.”
“맨입으로 요구하지는 않겠소. 여기까지의 공적, 정확히 반으로 나누지.”
“바깥에 있는 놈들을 처리한 것은 내 병사들이오.”
“여기까지 이끈 것은 이쪽이지. 달아나는 디파르그를 잡은 것도 이쪽이고.”
결과적으로, 세운 공의 정도를 논하자면 7:3 정도였다. 무엇보다 디파르그를 쫓아 잡은 것이 컸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모디레스도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제안이오. 어찌 하겠소?”
“…혹여 따로 내게 숨기는 것은 없겠지?”
“물론.”
“좋소. 그리 합시다.”
수락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였다.
노인을 붙들고 있던 군터의 휘하 병사 한 명이 손에 들고 있던 단검으로 노인의 목을 찔렀다. 단순히 찌른 것만이 아니라, 찌르고 나서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굵은 핏줄기가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무슨 짓이냐!”
모디레스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군터가 먼저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노인을 찌른 병사가 즉각 고개 숙였다.
“송구합니다! 이 늙은이가 이상한 주문 같은 것을 외우려 하기에…….”
“이런…그렇다고 꼭 죽일 필요는 없었잖느냐!”
“워낙 경황이 없어…송구합니다.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군터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사이 다른 병사 한 명이 노인의 상태를 살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그를 보고 군터가 또 한 번 크게 혀를 찼다.
“미안하오. 워낙 지독한 늙은이라 사로잡을 때도 고생을 많이 했다오. 그래서 그런지 부하 놈이 과민반응을 했구려. 내 대신 사과하겠소.”
군터가 모디레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모디레스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했으나, 결국에는 입술을 씹으며 말을 삼켰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제목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