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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1화 (101/1,064)

<-- 암약하는 자들 -->

끼이익!

커다란 문 한 짝이 쓰러졌다. 가로막던 문이 사라지자 이미 지척까지 와 있던 아군 병사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시오도크 놈들이다!”

“막아!”

정체 모를 적들과 시오도크가 아닌, 멜루니악군과의 전투가 시작됐다. 군터와 그의 병사들은 슬쩍 뒤로 빠졌다.

‘이만하면 할 만큼은 했다.’

길 찾기에 침투하여 문까지 열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제 몫을 하고도 남았다. 저 혼란스러운 판에 끼어 칼부림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런 단순한 즐거움보다는 실리를 찾을 때다. 살라스가 일깨워준 깨달음은 아직 그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디파르그를 찾아야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디파르그다. 당장 성주가 원하는 것이 놈의 목이었고, 또 놈을 찾아야 이 정체모를 집단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다.

살라스가 저격조였던 병사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산채의 크기를 보고 짐작은 했지만, 상당히 많군요.”

“그간 빼돌렸던 병장기가 다 이놈들에게 흘러갔을 테니, 최소한 백 명은 넘지 않겠느냐.”

적들은 아직까지도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죽은 놈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백 명은 훌쩍 넘고, 이백 가까이도 되어 보였다.

‘이놈이 정말로 반란이라도 획책했던 건가.’

설사 반란의 의도가 없었다한들, 군수물자를 빼돌려 이 정도의 사병을 육성했다면 그 자체로 반역과 다름없다. 이곳에서 놈의 목을 잘라 성주에게 가져간다 해도 아무런 책을 잡힐 일이 없다는 뜻이다.

“디파르그를 찾아야 한다.”

“이 소란에도 아직까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도주를 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살라스가 말했다. 그에 군터는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했다.

“반대쪽 문으로 향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으나, 은밀한 길이 있을 수도 있지요.”

“음?”

“지하통로가 산채 안에 있지 말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젠장!”

산채 안에 지금 눈에 보이는 목조 건물만 해도 최소 수십 개였다. 그 전부를 일일이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장 모디레스의 병력은 쏟아져 나오는 적들을 상대하느라 발이 묶인 상황. 그렇다 하여 자신과 휘하 병사들만으로 저 수십 채의 건물들을 뒤지는 것도 무리.

“수가 있겠느냐?”

“달리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 한 명을 심문하지 않는 이상 북문을 눈에 두고 그럴싸한 건물들 위주로 수색하는 수밖에는…….”

살라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군터는 뒤늦게 합류하는 적 두 명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한 그가 대뜸 허벅지에 창을 박았다.

“끄으윽!”

“디파르그는 어디에 있느냐.”

가슴을 밟힌 쪽은 독기 가득한 눈을 한 채 노려보고, 허벅지를 찔린 쪽도 고통에 몸부림치다 곧 똑같은 독기를 풍겨댔다. 군터는 그들이 어지간한 고문으로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은 어지간한 수준을 넘는 고문을 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우득!

발로 걷어차 머리통을 으깨고 창으로 목을 찔렀다.

심문은 포기다. 이제는 정말 뒤지는 일일이 수밖에 없다.

“할렌. 네가 4명을 이끌고 반대쪽 문을 지켜라. 혹 빠져나오려는 놈들이 있거든 즉시 효시를 쏴라.”

“옛!”

군터는 살라스에게 한 무리를 맡기고 둘로 나뉘어 수색을 시작했다. 큼직해 보이는 집들 위주로 들이닥쳐 수색을 했는데, 집들은 전부 텅텅 비어 있었다. 간단한 담요며 침상 같은 것들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 것도 없어 삭막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군영이나 다름없군.’

만약 이곳이 생활의 터전이었다면 지금 밖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의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텅 비었다는 것은 이곳이 오직 병력들만이 주둔하는 군사기지, 혹은 거점이라는 뜻이다.

이런 곳까지 마련해두고 대체 디파르그는 뭘 꾸몄던 것일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지만,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나으리라.

“대장님! 찾았습니다!”

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군터의 눈이 번뜩였다.

“어디냐!”

*

발견한 것은 디파르그가 아니라 지하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살라스와 병사들은 아직 들어가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할렌을 불러올까요?”

“아니. 혹시 모르는 일이다. 너희 다섯은 할렌을 도와 문을 지켜라. 여차하면 모디레스에게 지원을 청하고.”

군터가 바로 들어가려하자 살라스가 슬쩍 입을 열었다.

“괜찮겠습니까? 이 안에 뭐가 있을지 모릅니다.”

“어차피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놈들이다. 있어봐야 뭐 대단한 게 있겠느냐.”

군터는 디파르그의 목이 눈에 보이는 듯해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그는 살라스를 비롯한 몇몇 병사들만을 데리고 지하로 들어갔다.

‘두더지도 아니고, 땅은 정말 잘 파는군.’

딱 사람 셋 정도가 지나갈 정도의 너비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시오도크에서 산으로 이어졌던 길도 그렇고 이 지하통로도 그렇고, 숙련된 공병 몇 명씩 붙어 공을 들여도 이런 길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

얼마나 달렸을까. 저 앞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터는 뒤따르는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발소리를 죽였다. 앞에 이어지는 길이 직선으로 뚫린 게 아니라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

‘지쳤군.’

조심스럽게, 하지만 느리지 않게 접근할수록 거친 숨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있었음에도 저들이 오래 가지 못했던 것은 숨소리의 주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제님. 이제 곧 출구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헉…헉. 미안하네. 젊었을 적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사제. 꽤나 낯설고,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단어가 들렸다. 군터는 그 이질감을 느끼면서 저 너머에 있는 적들의 수를 추측했다.

‘최소 넷에서 최대 일곱 정도.’

그의 예민한 귀는 신경을 기울이면 숨소리만으로 적의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군터는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곧장 굽은 길을 뛰쳐나갔다.

“이런!”

‘여섯인가.’

당황한 적들 사이에서 디파르그를 발견한 군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총 여섯. 개중 두 사람은 그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모자가 달린 로브를 입은 노인과 청년 하나. 디파르그가 그런 그들의 앞에 지키듯 섰다.

“이놈!”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는 셋 중 둘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회의 때 본 얼굴이었다. 디파르그의 동생, 그리고 매제다. 나머지 한 명은 모르는 자였다. 허나 제국군의 무장에 시오도크의 문양이 가슴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디파르그의 심복쯤 되는 모양이었다.

“백인장 씩이나 되는 놈들이 부하도 없이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

“흥! 멜루니악의 잡졸이 파지오의 사냥개가 되었구나!”

“내가 파지오의 개라면, 너희는 누구의 개란 말이냐?”

세 명이 앞을 가로막듯 섰다. 동시에 로브를 입은 두 명과 디파르그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를 본 군터가 즉시 쫓으려 했으나 세 명이 일제히 검을 뻗어왔다.

“지나갈 수 없다!”

내지르는 일수에 그들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백인장 두 명의 실력은 우습기 그지없었고, 그나마 디파르그의 심복 같아 보이는 한 명이 쓸 만했다. 허나, 합도 제대로 맞지 않는 공격으로는 군터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살라스! 먼저 가겠다!”

“맡겨주십시오!”

군터는 세 명의 공격을 흘려내고 내달렸다. 벗겨내진 세 명이 급히 뒤따르려 했으나 살라스와 병사들이 그들을 붙들었다.

“크윽!”

얼마 달리지 않아 금세 디파르그와 정체 모를 두 명은 금세 따라잡았다. 디파르그는 낭패한 기색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군터는 그의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포기해라.”

디파르그는 겁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풍기는 기세만 보아도 그는 꽤 실력 있는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다. 상대와의 수준차이를.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사제님! 이곳은 제가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아니. 그럴 수는 없네. 여기서 자네를 잃을 수는 없어. 내가 돕겠네. 저 자를 쓰러뜨리고 함께 가세나. 이반 너도 돕거라.”

“예. 스승님.”

디파르그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두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포기한 듯 검을 고쳐 쥐었다.

‘웃기는 놈들이군.’

동료애라고 할지, 전우애라고 할지.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애틋한 마음이 우습기만 했다. 서둘러야 할 필요를 없애준 것은 고맙지만, 대체 누굴 쓰러뜨린다는 말인가? 주제파악을 못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저 둘…무언가 있다.’

자신은 있으나 경시하는 마음은 없기에, 군터는 디파르그의 뒤에 위치한 둘을 예의주시했다.

젊은 쪽은 술사인 것 같았다. 몸에서 묘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인 쪽도 비슷했지만, 그는 제자로 보이는 젊은 자와는 비슷하면서도 뭔가 달랐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시험해볼까.’

군터가 한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조심하게. 저 자, 무언가 불길한…….”

노인이 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세 줄기 빛살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디파르그가 재빨리 하나를 쳐냈지만 나머지 둘이 남아 노인에게 향했다.

우드득!

단검 두 자루가 노인의 머리에 꽂히려던 순간. 느닷없이 허공에 나타난 무언가가 그를 보호했다. 단검은 허공에 나타난 그 형체에 틀어 막혔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현상에 군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저건…….’

빛이 없어 색까지는 구별이 안 가지만, 무언가 반투명한 것이 노인의 주변을 돌고 있었다. 그것은 뱀 같기도 하고 다리가 짧고 몸이 긴 다른 짐승 같기도 했다.

“늙은이.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군.”

시간을 끌면 유리한 것은 그였다. 살라스와 병사들이 뒤따라 올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술사(혹은 다른 신기한 능력을 가진)와 싸워볼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놈. 파지오에게 매수당했느냐?”

“그런 셈이지. 네놈은 어지간하면 살려 데려갈 생각이다. 성주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더군.”

“그럴 일은 없다. 넌 여기서 죽을 테니까.”

“뒤에 두 놈을 너무 믿는군.”

“아니. 널 죽이는 건 네 그 오만함이다.”

“응?”

뜻 모를 소리에 눈을 꿈틀 댄 순간. 갑작스레 발밑의 땅이 들썩이는가 싶더니 손 두 개가 발목을 덥썩 움켜잡았다.

‘이게 무슨!’

손 다음엔 팔, 팔 다음에는 머리가 나타났다. 그것은 흙으로 된, 사람 같은 형체였다. 하지만 결코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비슷하게 생겼을 뿐.

다급히 발을 빼려 했지만 두 다리가 묶인 상태서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고, 토인(土人)의 붙드는 힘은 꽤나 강했다.

“큭!”

심상치 않은 기세에 고개를 든 순간. 디파르그는 이미 검을 찔러오고 있었다. 군터는 발을 빼기를 포기하고 다급히 그에 맞섰다.

========== 작품 후기 ==========

모든 응원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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