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약하는 자들 -->
얼마 후. 모디레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왔다. 군터는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상기되었음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단지 급하게 달려와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셨소.”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달려오는 길이오. 설마하니 이런 비밀 통로까지 있을 줄은……. 만약 이 통로가 성 밖까지 연결되어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디파르그를 쳐내기에 충분한 빌미가 될 것이오.”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긴장하시오. 이 통로의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그 말에 상기되었던 모디레스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돌았다.
군터의 말대로,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성 밖의 타 트인 벌판이 나올지도 모르고, 적진의 한 가운데가 나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성내의 다른 어딘가가 나올 수도 있다.
“총 몇 명이오?”
“이백이오. 더 데려오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병력이 움직이면 눈에 띌 수 있어 어쩔 수 없었소.”
“그 정도면 충분하오. 갑시다.”
군터는 모디레스와 나란히 앞서 걸었다.
“놀랍다 못해 기이하구려. 어찌 성의 지하에 이런 길을 뚫어 놓았을지…….”
“확실히. 나도 놀랍소. 단순한 동굴도 아니고, 이건 확실히 제대로 만든 통로요.”
땅 밑에 길을 만드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기는 하지만, 그 흔하지 않은 경우도 보통은 토굴 형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널찍하게 길처럼 만든 지하통로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하긴, 이렇게 은밀하게 만들어 놓는다면 과연 누가 알아챌 수 있겠는가.’
비밀통로라 함은 그만큼 은밀하기에 비밀통로인 것이다. 쉬이 알려질 거라면 비밀이라는 말을 붙이지도 않았겠지.
“끝이 보이는 듯하오.”
“그게 무슨 소리요?”
“바람소리가 들리는군.”
“바람소리?”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 모디레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듯했으나 들릴 리 없었다. 날카로운 바람소리는 인간을 넘어 짐승 수준에 이른 군터의 청력으로도 아주 자그맣게 들릴 정도로 작았으니까.
“아직은 조금 더 가야 하오. 갑시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군터의 말처럼 길었던 길의 끝이 드러났다. ‘갈색말발굽’의 주방에서 통로로 내려올 때 보았던 것과 같은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군터와 모디레스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각자 쥔 검을 고쳐 잡았다.
“특별히 들리는 소리는 없소. 조용히 나갑시다.”
“…….”
모디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터와 그는 소리 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가로막은, 아마도 문으로 추측되는 그것을 천천히 힘주어 밀었다. 다행히 위에서 걸쇠가 걸리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힘을 주어 미니 어렵지 않게 밀렸다.
끼이익!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건만, 그 소리가 문을 미는 두 사람과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오르는 이백 하고도 십 수 명에게는 마치 바로 앞에서 치는 천둥소리 마냥 크게 들렸다.
“…….”
문을 열고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온 군터는 몸을 낮춘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나무들이 보였다. 중간 중간에는 바위도 보였고, 발목 높이 정도로 자란 풀숲도 있었다.
‘산?’
아주 작게 들려오는 물소리. 뒤쪽으로 보이는 경사 진 땅과 수목. 그야말로 산속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일단 성 밖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다만 얼마나 떨어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주변에 나무를 비롯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워낙 많아 성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산이라는 것은 확실하오. 어디에 적이 있는지 모르니 소리를 낮추시오.”
예민한 감각을 통해 최소 지근거리에는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그 의도는 바로 먹혀서 모디레스를 비롯하여 병사들이 몸을 낮추고 숨소리마저 죽이게 만들었다.
“길은 이쪽인 것 같군.”
군터는 유난히 고르게 눌린 땅을 손으로 쓸었다. 바람을 타고 내려온 나뭇잎이며 흙먼지 등이 흔적을 가렸지만 규칙적으로 오랫동안 사람의 무게를 고스란히 견딘 땅은 짧은 시간으로는 지울 수 없는 뚜렷한 흔적이었다.
“마렉. 하켄. 나무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펴라.”
“옛.”
군터의 휘하 병사 중 체구가 작은 두 사람이 일제히 높은 나무 하나씩을 붙잡고 날다람쥐처럼 타 올라갔다. 그들은 적당히 나뭇잎이 많이 달리고 몸무게를 견딜 수 있을 법한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살폈다.
“불이 있습니다.”
“산채로 보입니다.”
같은 방향을 보며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얼마나 떨어져 있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서두르면 차 한 잔이 식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충분하다.”
군터는 나무에서 내려온 두 사람에게 여러 가지를 더 물었다. 산채까지 이어지는 길에 적은 보이지 않았는지, 산채 주변의 지형은 어떤지 등.
마렉과 하켄이 자신들이 본 것을 성실히 답하고 나서, 군터는 모디레스에게 말했다.
“병력을 나눕시다. 이백이 넘는 인원은 한꺼번에 몰려다니기에는 너무 많소. 스무 명 정도씩으로 쪼개어 들어갑시다.”
“스무 명이라면 너무 적지 않소? 자칫…….”
“모두 같은 곳을 향해 좁혀 들어가는 모양세요. 적과 마주쳐 교전하게 된다 해도 금세 지원을 갈 수 있으니 염려할 이유는 없소.”
모디레스는 욕망 앞에서는 대범하지만 위험 앞에서는 소심한 인간 특유의 본성을 내비쳤다. 군터는 그를 윽박지르지 않고 좋은 말로 설득했다. 그러자 모디레스도 곧 납득했다. 사실 시야와 이동이 제한되는 산속에서 다수의 군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소수로 흩어져야 한다는 위협을 받아들이기가 겁이 났을 뿐. 그 겁을 걷어내니 잠깐 흐려졌던 판단력이 되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합시다.”
군터와 그의 휘하 병사들은 흩어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인원이 스물 조금 안 됐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그들은 인원을 나누는 절차 없이 곧장 이동에 나섰다.
*
조용했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도, 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심지어 새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불어오며 나무들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만이 스산한 목소리를 냈다.
군터가 살짝 손을 들었다. 뒤따라오던 부하들이 걸음을 멈추고, 다른 쪽에서 움직이던 병력들도 덩달아 멈춰 섰다.
아무도 보지 못하지만 군터는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우거진 나무와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는 목책의 모습. 그 위로 오가는 경계병들. 저마다 제대로 된 병장기로 무장한 그들을 보자 매달 과다하게 보급된 물자들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것 같았다. 제국의 깃발도 휘날리지 않는 저곳이 시오도크의 비밀 요새쯤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들어 올린 손으로 천천히 수신호를 보냈다. 적, 다수, 무장.
가뜩이나 높았던 긴장감이 터질듯 부풀었다. 거칠어진 호흡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듯했다. 군터는 멀찍이 몸을 숨기고 있는 모디레스에게 먼저 움직이겠노라 신호를 보냈다.
“목책 위에 정찰병이 열넷이 있다. 창을 들었고 활과 칼도 가지고 있으니 주의해라.”
“아주 다 가지고 있군요.”
할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창은 손에, 칼은 허리춤에, 활은 등에 맸으니 다 가진 셈이다. 군터는 부하들이 너무 상실감을 느낄까 싶어 갑옷은 가죽 갑옷으로 보인다고 친절히 덧붙여주었다.
“활로 먼저 쏘아 잡습니까? 아니면…….”
살라스가 물었다. 군터는 잠시 목책 위에 있는 적들을 살폈다. 특히 그들의 동선을 집중해서 보았다.
‘망루에 각기 둘. 주기적으로 돌아다니는 놈이 넷.’
애매하다. 멀찍이 떨어진 망루가 두 개라 한 번에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는 눈에 보이는 적 모두를 쏘아 맞출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럴 능력이 되지 못했다. 저 안에 적이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르는 이상,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 일이 골치 아파질 터.
“침투조와 저격조, 반으로 나눈다. 침투조는 내가, 저격조는 살라스가 이끈다. 신호를 보내면 망루 쪽에 있는 네 명을 쏴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옛.”
군터와 침투조 병사들은 몸을 최대로 낮춘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한 순간, 군터가 신호를 내자마자 일제히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저격도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망루의 적들이 쓰러졌다.
‘흡!’
군터가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비상하는 새처럼 높이 뛰어오른 그는 그래도 목책 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소리를 듣고 적이 고개를 채 다 돌리기도 전에 목에 단검을 박아주었다. 적이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지만 억센 손이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흐으으……!”
발악은 길지 않았다. 목을 쑤신 검을 거칠게 좌우로 틀어 긁어대니 곧 발버둥을 멈췄다.
이와 같은 일은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2인 1조로 도움닫기를 하여 목책에 올라온 병사들이 암살자처럼 은밀히 적들의 목에 칼을 꽂았다. 못 다 처리한 적은 저격조가 쏜 화살에 머리가 꿰뚫려 쓰러졌다.
군터와 침투조가 목책 위의 적들을 모두 처리하자 대기하고 있던 아군 병사들이 일제히 목책 쪽으로 접근해 왔다.
“웬 놈이냐!”
“쳇!”
하지만 모든 일이 끝까지 순조롭지는 않았다. 목책 아래, 또 다른 적이 침투조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곧 머리통에 화살이 박혀 쓰러졌지만, 곧 이것저곳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군터는 재빨리 목책 문 쪽으로 내달렸다. 다른 침투조 병사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적이다! 놈들이 산채의 문을 열려고 한다! 막아라!”
생각보다 적의 반응이 빨랐다. 경계수위도 예상 이상이었다. 발각이 되거서 곧장 달렸건만, 벌써 세 명의 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오도크 놈들인가!”
“역적들을 벌하러 온 토벌군이시다!”
창검을 내질러 가장 앞선 적의 머리를 찔렀다. 족히 수백 명의 목숨을 머금어 살벌한 예기를 갖게 된 그의 창은 코에서부터 뒤통수까지를 깔끔하게 꿰뚫었다.
콰직!
창대 끝으로 뒤따르는 적의 턱을 부쉈고, 뽑아낸 창날로 도끼처럼 내리찍어 마지막 적을 세로로 양단했다.
한 호흡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뤄진, 인간을 뛰어넘은 완력과 날카로움만은 천하기병(天下奇兵) 못지않은 창검이 합쳐져 만들어낸 결과였다.
“문을 열어라!”
순식간에 세 명을 처리하고, 군터는 훌쩍 뛰어올랐다. 뚝 떨어지는 그의 몸과 함께 기다란 창날이 목책의 커다란 문을 지탱하던 걸쇠를 쪼갰다.
========== 작품 후기 ==========
내일 올릴까도 했지만, 써진 김에 그냥 올리자 해서 올립니다.
음...100회입니다. 사실 처음 글 쓸 때 여러 목표를 세웠었는데, '완결까지 가자'라는 최종 목표는 다소 막연한 목표였기 때문에 1차 목표였던 '100회 가자'가 제게는 가장 현실적인 목표였고, 그만큼 동기부여가 되는 목표였습니다.
제가 처음 글을 쓸 때는 멋들어진 판타지를 써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 수입을 얻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당연하지요. 만약 수입에는 전혀 욕심이 없었다고 하면 왜 굳이 노블레스에 썼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 글은 어쩌면 실패한 글입니다. 적어도 돈벌이 용으로는 실패한 글이지요. 솔직히 나오지 않는 선작수나 조회수를 보면서 내 글이 재미가 없나, 내 글은 못 쓴 글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진 때도 제법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도 꾹 참고 계속 글을 썼습니다.
쓰고, 쓰고, 또 썼습니다. 조금 우스울 수도 있지만, 조회수가 늘지 않는다면 편수라도 늘리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설령 일정 부분에서는 실패한 글일지라도 이 글을 마무리 하면 내가 크게 성장하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람이기도 했구요.
앞으로 얼마나 더 써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써보겠습니다.
이건 사실 독자분들께 드리는 말이 아니라 제게 하는 못질입니다. 이렇게 썼고, 여러분이 보셨으니 제게는 계속 쓰고 써서 끝맺음을 내야 하는 책무가 생긴 겁니다.
1차 목표였던 100회를 달성했으니, 2차와 3차, 그리고 마지막 목표까지 꾸준히 가보겠습니다.
항상 재미있게 봐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