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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을 받은 살라스는 곧 도착했다. 군터는 살라스에게 성주와 나눈 대강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살짝 눈이 흐리던 살라스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굳어갔다.
“그러면…성주의 구체적인 요구는 무엇입니까?”
“디파르그를 제거해달라는 거다.”
“제거에도 여러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단순한 실각, 혹은…….”
“에둘러 말했지만, 죽이라는 거겠지.”디파르그의 이야기를 할 때 성주의 눈에서는 섬뜩한 설기가 비쳤었다. 성주와 나눈 은밀한 회담에서 그가 보였던 가장 진실한 감정이 바로 그 증오였다.
“음.”
“성주가 약속한 것은 추천장이다. 물론 일을 끝내고 나서 입을 싹 닫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찌 되었든,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
“하지만 난 이것이 기회인 동시에 위험인 것을 안다. 해서 네게 의견을 구하고 싶었다. 내가 어찌해야 할지 말이다.”
살라스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군터는 느긋하게 살라스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기다려주었다.
“…말씀하신 대로 기회이면서 동시에 위기이군요. 그의 제안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성주가 그렇게까지 속내를 보인 이상 만약 대장님께서 성주의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성주는 필시 대장님을 경계할 것입니다.”
“음?”
“이제껏 그가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시오도크의 군졸들을 잠재적인 적이라 생각했다면 그는 밤마다 잠자리도 뒤숭숭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오늘 이렇게 속을 내보인 것은 그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절박할 것이고, 주변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있겠지요. 대장님께서 그의 제안에 대해 거부를 표하시는 순간부터 그는 대장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헌데 그 사람이 쓱 한 번 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물에 빠진 사람은 지나간 사람을 원망하게 될 거다.
“피곤한 일에 얽혔군.”
군터가 탄식을 토했다.
“예. 난처하게 됐습니다.”
이런 똥물에 자신을 끌어들인 성주를 탓하고 싶었으나 마냥 그럴 수도 없었다. 살라스의 말처럼 성주가 절박한 심정이었다면 뭐라도 하고 싶은 것이 당연할 테니까.
“그렇게까지 힘들었다면 살마드에 있다는 그의 상전에게 도움을 청했으면 될 것이 아닌가.”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아마도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지요.”
“음?”
“그 상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지는 모르나 귀족도 아닌 평민을 성주로 앉혔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는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 부담을 앉고 성주자리에 앉혔는데, 성주 일 하나 제대로 못해 자신에게 손을 벌리는 부하를 상전이 어찌 보겠습니까?”
“성주가 디파르그에 대한 악감정이나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 상전의 실망을 더 두려워했다는 소리냐?”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권력자들은 목숨보다 권력을 중요시한다는 말을 숱하게 들은 터라,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정말 살라스의 말처럼 상전에게 밉보일까 두려워 혼자 끙끙 앓았던 것이라면, 그는 죽었다는 시비를 위해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언제까지 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까?”
“오늘.”
“촉박하군요.”
“그렇지. 하지만 시간을 길게 끌 수도 없는 일이다. 내일 당장 반군 놈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판국이 아니더냐.”
“대장님의 의중은 어떠하십니까?”
“내 의중이라. 글쎄…….”
군터는 의자 등받이 뒤로 머리를 젖히고 생각에 잠겼다. 그도 자신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실은 살라스가 오기 전까지 그가 했던 고민은 성주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군터는 성주의 제안을 받아 디파르그를 처리하였을 때 성주가 약조를 지키지 않을 때를 걱정했다. 그런데 살라스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너무 이 일에 대해 가벼이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맹수의 등에 올라타는 형국입니다.”
“무슨 뜻이냐.”
“성주가 일이 끝난 후에 약속을 지키느냐는 둘째 치고, 대장님을 가만히 둔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살라스의 말은 이랬다.
디파르그가 무슨 짓을 했건, 그는 엄연한 제국의 백인장이고 성주의 휘하다. 그런 그를 외부의 인사가, 그것도 같은 백인장이 벌하는 것은 결코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힐 수 있다.
이처럼 성주와 한 배를 타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부담을 지는 일이었는데, 더 큰 문제는 성주를 믿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남과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 공유를 했더라도 일을 마치고 나면 되돌리고 싶기 마련이다. 게다가 상대는 성주가 아닌가. 일개 백인장 둘을 상대로 수를 쓰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은 전시인지라 가만 두고 본다 해도, 나중 일은 모르는 게 아닌가?
“그래서 맹수의 등에 탔다는 거군.”
이제 와 순순히 내려도 문제고, 끝까지 올라탄 채 달려도 문제다. 추천장은커녕, 도리어 후에 배신을 하지는 않을까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넌 내가 제안을 거부하기를 바라는구나.”
“예. 당장은 밉보일 수 있겠지만 어차피 성주도 대장님을 어쩌지는 못합니다. 당장 혐의가 있는 디파르그조차 가만히 두고 있는 걸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불편한 동거를 하라는 소리다. 불편한 것이 위험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타당한 조언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살라스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옳아 보였다.
하지만 선뜻 그러마 하는 말이 나오지 못하는 까닭은, 그런 많은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성주가 제시한 대가가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었다.
백인장이라는 자리는 다소 애매한 지위였다. 병졸이 오를 수 있는 실질적인 마지막 단계이지만 고관이라고는 절대 부를 수 없는, 말하자면 맨몸뚱이 하나로 군문에 들어선 이들의 한계선이었다.
기병대장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 대공을 세운다한들 그 공은 대부분 높은 분들의 것이 되고, 그가 얻을 것은 자투리 공에 대한 포상금 얼마가 전부일 것이다. 정말 하늘이 돕지 않는 한 천인장에 오르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허나 평민을 성주로 꽂을 정도의 권력자에게 연이 닿는다면, 그 현실의 한계를 넘어볼 수도 있다. 일전에 막시밀리언이 리에론 가에 연을 대었던 것처럼 말이다.
막시밀리언이 어찌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군터는 자신의 앞가림에 대해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백인장에 오른 지도 벌써 수 년. 이제 그의 야심은 더 큰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터는 뒤로 젖혔던 고개를 도로 당겼다.
“마음을 굳히셨군요.”
“그게 눈으로 보이느냐?”
“대장님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편이십니다.”
“그렇군. 말릴 생각이냐?”
“아닙니다. 그러고 싶지만 그러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대장님의 선택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일이 제대로 풀리고, 성주가 약속을 지킨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겠지요.”
“네 말대로 맹수의 등에 올라탔다. 그렇다면 나는 끝까지 가볼 참이다. 만약 마지막에 가서 맹수가 이를 드러낸다면, 그 즉시 놈의 목을 부러뜨리고 말겠다.”
군터의 눈이 뜨겁게 끓었다. 동시에 입가에는 서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
군터는 시비를 통해 성주를 만나고자 함을 알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날 밤처럼 안내가 이루어졌다. 인적이 드문 밤이 아닌 아침이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시비는 이번에도 용케 사람이 없는 길을 찾아 그를 안내했다.
“기대가 헛되지 않았구려. 고맙소.”
“성주께서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하셨으니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믿어주시오. 내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소.”
“제가 먼저입니까?”
“음. 아무래도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겠지.”
짐작은 했지만, 모디레스는 아직 답을 내놓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지금도 열심히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터였다.
“만약 모디레스 대장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저 그에게 비밀을 지켜주기를 부탁할 밖에.”
“만약 모디레스 대장이 거절한다면, 저 혼자서라도 일을 처리하도록 하지요.”“그것이 가능하겠소?”
성주는 불안한 기색이었다. 모디레스가 빠진다면 그를 따르는 멜루니악군 5백이 빠지는 셈인데, 괜히 어설프게 벌집을 건드렸다가 어그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말이다.
“제가 성주님을 믿는 것처럼, 성주께서도 저를 믿어주십시오. 단언컨대,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군터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성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믿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뒤는 없다. 후의 일은 후에 생각한다. 이제 당면한 과제는 디파르그였다.
*
모디레스는 밤이 되어서야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을 전해왔다. 결국 그 역시 달콤한 대가를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그날 밤. 모디레스는 군터의 숙소로 왔다. 성주와는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했다. 그가 군터를 찾은 것은 앞으로의 계획을 논하기 위함이었다.
“일단…디파르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오. 성주께서는 그가 군졸들을 이끈다 하셨지만, 모든 군졸들이 그의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오. 백인장들 중에서도 그와 가까운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을 수 있소.”
“적과 아군을 구분하자는 말이군. 하지만 괜찮겠소? 혹여 놈이 이상하다는 기미라도 느끼면 일이 어려워질 거요.”
“걱정 마시오. 그런 일이 없도록 내 최대한 신중히 알아보리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요. 어차피 성벽 바깥에서 반군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상황이니, 그들에게 우리는 예비 전우가 아니겠소? 아래서부터 술 한 잔 걸치며 떠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요.”
“그렇다면야…그 부분에 대해서는 믿고 맡기겠소.”
“음. 그럼 군터 대장. 그대의 계획은 뭐요?”
“난 디파르그의 뒤를 한 번 파볼 생각이오. 놈을 노리려면 우선 그놈이 어떤 놈인지 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소?”
“그거야말로 위험한 일이군. 괜찮겠소?”
“걱정 마시오. 내 부하들 중 날랜 놈이 여럿 있으니 은밀히 놈에게 붙여 놓으리다.”
밤이 늦도록 군터와 모디레스는 향후의 일들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군터는 휘하 십인장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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