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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백인장이 시비를 죽였다는 말입니까?”
“직접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소. 허나 이전부터 그런 소문이 돌았다오. 디파르그가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치정싸움인가.’
점점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설마하니 한 성의 최고 실력자 둘이 한낱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갈라섰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남녀 간의 정이라는 것이 때때로 상상치도 못한 일을 만들어내고는 한다. 성주와 선임 백인장, 그리고 시비가 얽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군터는 흥미진진하게 경청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이미 그 아이와 내가 마음을 주고받았을 때였소. 나도, 그 아이도 불편한 마음은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했소. 아무리 디파르그가 그 아이에게 마음이 있다한들 받아주지 않으면 그뿐이고, 내가 그 아이를 정실로 맞이하고 나면 그가 감히 더는 그런 마음을 품지 못할 테니까 말이오.”
성주는 괴로운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힘겨운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는 진한 원독이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아이가 사라졌소. 방에 쪽지 하나를 남겨둔 채.”
“쪽지?”
“쪽지에는 내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해결 하겠다 적혀 있었소.”
“해결? 디파르그와의 일…말입니까?”
“그렇소. 그 아이는 전부터 자신 때문에 나와 디파르그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우려했었소. 정확히는 디파르그와 사이가 벌어지며 내가 부담을 지게 될 것을 걱정했지.”
‘멍청한 년이군.’
그것도 터무니없을 정도 멍청한 계집이다. 일개 시비 주제에 무슨 그런 오지랖을 부린단 말인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성주는 그 멍청한 계집의 독단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그 이야기를 하며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아마도 그는 그 계집의 행동이 자신을 위한 희생 비슷한 무언가 쯤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남녀의 연정이라는 것은 이다지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말 잘하던 사람도 바보천치 벙어리로 만들어버리니까 말이다.
“그게 마지막이었소. 그날 밤 이후.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지.”
“다른 것은 없었습니까? 목격자라거나…….”
“없었소. 야심한 시각이었고 그 아이는 내 관저의 구조를 잘 알았기 때문에 인적이 뜸한 곳을 통해 빠져나갔을 거요. 본 사람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외다.”
“그렇다면…디파르그 백인장이 일을 저지른 것을 목격한 사람도 없겠군요.”
“맞소. 하지만 난 그놈이 일을 저질렀음을 확신하오! 왜냐하면 그 다음날 놈이 날 보던 눈이 변해 있었거든!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듯 날 보더란 말이오!”
“으음.”
“그 아이는 디파르그를 만났던 거요. 만나서 나와의 관계를 이야기를 했겠지. 그리고 디파르그는…그놈은…….”
물기가 찬 목소리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성주는 군터와 모디레스를 앞에 두고서도 끅끅 거리며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모디레스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했고, 군터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잠시 후. 실컷 울고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성주가 다시 입을 떼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소. 그런 게 있었다면 내 그놈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요. 허나 그 아이가 남긴 쪽지 하나……. 그 작은 증거 하나만으로 놈을 건드리기에는 놈을 추종하는 군졸들이 만만치 않소. 내가 성주라고는 해도 변방의 성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적이오. 때문에 나는 매일 밤 속을 끓이면서도 놈을 내버려둔 채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거요.”
되도록 천천히 마셨건만, 그럼에도 결국 찻잔이 비고 말았다. 군터는 빈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줄곧 성주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모디레스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와중이었다.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나 들려주겠다고 이 야심한 시각에 은밀히 그들을 부른 것은 아닐 터. 군터는 슬슬 성주에게 본론을 내보일 것을 요구했다.
“아아. 추한 모습을 보였군. 미안하오. 아직도 그 아이만 생각하면 감정이 올라오곤 한다오. 무엇을 바라느냐고 했소? 그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보여줄 것이 있소.”
성주는 자신의 책상에서 두툼한 두루마리들을 가져왔다.
“이게 무엇입니까?”
“보면 알 것이오.”
두라마리는 여러 개였다. 군터와 모디레스는 각기 하나씩 붙들고 묶은 끈을 풀었다. 그리고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이건 군수물자가 아닙니까?”
모디레스가 물었다.
“맞소. 달마다 군졸들에게 지급되었던 보급품의 목록이오.”
두루마리에는 각종 물자들의 품목과 수량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시오도크의 7개 백인대에게 지급되었던 보급품이다. 두루마리 하나에 석 달 분량이 적혀 있었고 두루마리는 수십 개가 넘었으니 족히 수 년 간의 기록이었다.
“헌데 이것을 저희에게 보여주신 까닭은?”
모디레스의 물음에 성주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군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군터가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많군요.”
“알아보는군. 그렇소. 많지.”
모디레스가 다시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살폈다. 그리고 곧 탄성을 뱉었다.
두루마리 속에 적힌 보급품의 수량은 너무 많았다. 화살 같은 소모품에만 집중된 것도 아니고 종류별로 고르게 많았다. 군터가 본 것은 3년 전의 기록이었는데, 일곱 개 백인대에게 들어가기에는 충분히 많은 양이었다. 게다가 시오도크는 갈색초원으로부터 제법 떨어져 있는 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두루마리의 내용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가장 최근의 목록이오.”
성주가 또 다른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
성주가 건넨 두루마리를 본 군터는 가장 위에 적힌 수량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터무니없군요.”
“그렇소. 터무니없지. 무관이 보기에도 그런가 보군.”
문관, 무관을 따지기 전에 두루마리속의 내용은 정말로 터무니없었다. 이 정도 수량이면 전장의 1선에서 싸우는 부대에게나 갈 법한 양이었다. 군터는 맨 위의 몇 줄만 보고서 두루마리를 모디레스에게 넘겼다.
“초원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하더군. 그러니 보다 철저히 훈련을 해야 한다며 성 밖으로 훈련을 자주 나갔소.”
“핑계는 좋군요.”
“물론 그때쯤에 흉흉한 소문들이 돌기는 했소. 완전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야. 하지만…그렇다 해도 터무니없는 것은 마찬가지지.”
모디레스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만…여기 적힌 수량대로 다 지급하셨군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둘 참이었소. 그리고 빌미를 잡아 놈을 처리해버릴 생각이었지. 실은, 원래대로라면 올해 안에 끝낼 계획이었소만.”
실로 냉철한 계획이다. 두루마리를 보면 점차적으로 지급되는 물량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많다 싶은 정도로만 요구하다가, 아무 말 없이 요구를 들어주니 점차 양을 늘여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마 디파르그를 비롯한 백인장들은 유약하고 멍청한 성주라고 여겼겠지. 속으로 어떤 흉계를 꾸미는 줄도 모르고.
“하지만 그대들도 잘 알다시피…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지. 덕분에 나는 어리석은 성주가 되었고, 놈은 선지자가 되었소.”
전란이 디파르그의 명줄을 이어준 셈이다.
“하지만 내 장담컨대, 놈은 순수하게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이 아닐 것이오. 설령 예견했다한들 제국을 위한 준비는 아니었겠지.”
“디파르그가…그가 역심이라도 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놈이 그 많은 물량을 훈련하는 데에 썼을 리는 만무하지 않겠소?”
군터도, 모디레스도 말을 아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골치 아픈 일에 엮이게 됐다는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리를 동시에 스쳤다.
“난 놈을 믿지 못하오. 놈의 손에 놀아나는 군졸들도 믿지 못해. 언제 이 성이 전장으로 바뀔지 모르는 판국에 불안요소를 안고 갈 수는 없소.”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놈을 쳐내야 하지 않겠소? 그를 위해, 난 두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소.”
예상했던 말이 나왔건만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군터는 눈을 감았고, 모디레스는 반문했다.
“왜 저희에게?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성주님께서는 오늘 저희를 처음 보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일을 맡길 만큼 저희를 믿고 계십니까?”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생기면 믿음이라 부르지도 않겠지. 내가 믿는 것은 내 눈이오.”
“예?”
“오랫동안 백인장으로 지내지 않았소? 이제는 슬슬 더 높은 곳을 노리고 싶지 않은가?”
“…….”
성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난 귀족이 아니지만 성주 자리에 있지. 왜일 것 같소? 아니,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으음.”
“나는 개인적으로 모시는 분이 있소. 그분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성주직에 평민을 앉힐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분이지. 그대들이 나의 어려움을 덜어준다면 내 그분께 추천장 두 장 쓰는 것이 무에 어렵겠소?”
노회한 정치인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결코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었다.
군터는 손을 뻗어 이미 오래 전에 비어버린, 이제는 다 식어 미적지근한 찻잔을 어루만졌다.
*
“하아.”
밤이 늦었건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이 슬금슬금 올라치면 복잡한 머리가 한숨을 시켜 내쫓아버렸다.
‘기로(岐路)로군.’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성주는 선선히 그러라 하였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어떤 선택이든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도 아는 것이다.
‘성주의 요청을 받아 무사히 일을 끝낸다면, 생에 다시없을 기회를 얻는 셈이다.’
물론 일을 끝내고 나서 성주가 입을 싹 닫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성주는 처음 얼굴을 본 그들에게 속내를 터놓았다. 이는 그로서도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만약 군터와 모디레스가 냉큼 거절하고 돌아선다면 그가 밤에 두 다리 뻗고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었을까?
‘성주도 더는 뒤가 없다고 여겼겠지.’
당장 성내의 군졸들이 디파르그의 명을 따른다고 한다면, 이 성에 그의 편은 기껏해야 관저에서 부리는 시비와 시종들뿐이다. 막말로 내일 당장 디파르그가 성주를 친다고 하면 누가 그를 지킬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본다면 성주에게 있어 오늘 당도한 멜루니악군은 그야말로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틀림없이 그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
군터는 새벽별이 지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첫닭이 울었을 때, 사람을 시켜 살라스를 불러들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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