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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4화 (94/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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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맛만큼이나 술맛도 좋았다. 값싼 맥주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이 과실주였는데, 그 풍미가 각기 달라 택해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하하하하. 그랬소?”

“예! 그래서…….”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니 분위기도 느슨하게 풀어져 웃음 섞인 대화가 끊이지 않고 오갔다. 주로 성주가 어떤 주제를 던지면 그에 대해 백인장들이 장황하게 답하는 식이었다. 성주는 능수능란하게 그들이 잘 답할 수 있는 주제를 꺼냈고, 백인장들은 무부 특유의 자신감과 허세가 반쯤 섞인 답을 내놓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군터에게도 성주가 몇 차례 말을 붙였다. 그럴 때면 군터는 과하지 않게 적절한 선에서 답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허풍을 떠는 것이 내키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일단 그는 성주와 말을 섞는 것이 불편했다. 성주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낯설었기 때문이다.

성주는 말을 잘했다. 그는 모든 대화를 주도했다. 물론 그의 직위가 가장 높고, 이 성을 다스리는 이가 그이니 만큼 주인으로서 중심에 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을 제하더라도 정말 말을 잘했다. 말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야 할까? 그의 주도 하에 대화는 단 한 번도 끊이지 않고 마치 강물처럼 부드럽게 흘러갔다.

또한 그는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모두가 웃음 짓게 만들면서도 그 자신의 격을 단 한 순간도 잃지 않았다. 모두가 웃으면서 그와 말을 하지만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그는 전혀 고압적이지 않게 자신이 이 자리의 주인공임을 모두에게 인지시켰다.

군터는 그가 뭐랄까…자신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는 군터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고 한다면 막시밀리언이겠지만, 그나마 비슷한 것이 막시밀리언이라는 것일 뿐이지 들여다보면 그와도 또 달랐다.

낯선 것을 처음 보면 경계하게 된다. 좋고 싫고를 떠나 그게 본능적인 반응이다. 지금의 군터가 딱 그랬다.

‘어쨌거나, 성주 자리를 도박판에서 따낸 건 아니란 건가.’

저런 말솜씨가 있다면 그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높으신 분들을 대할 때 중요한 능력은 다른 것보다도 저런 말솜씨가 아닐까 싶었다.

역시 귀족도 아닌 평민이 성주까지 되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가 싶었다. 높으신 뒷배가 있다 해도, 그 높으신 뒷배의 마음에 들기까지의 과정이 있을 게 아닌가. 이는 운도 운이지만 역시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능력이 있는 거군.’

능력이라는 것은 굉장히 큰 범위를 아우른다. 무재(武才)가 뛰어난 이가 있을 것이고, 잔꾀를 잘 부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또 잔꾀와는 달리 전술을 잘 짜내는 이도 있을 것이고, 정무를 잘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각기 다른 무수한 분야에서 재주를 보인다면 그 사람은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껏 군터는 사람을 대할 때 굉장히 편협한 시각으로 대해왔다. 그가 사람의 가치유무를 판단한 기준은 첫째로 무재였고, 둘째로 기개였다. 지극히 좁고 어리석은 관점이었다.

끝없이 사람을 만나고, 갖가지 경험을 하면서 점차 안목과 사고의 틀을 넓혀왔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오늘만 하더라도 낮에 보았던 성주는 겁쟁이였으나, 저녁에 식사자리에서 다시 만난 성주는 어느새 능력 있는 성주가 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이 반나절도 안 되어 다른 사람이 될 리는 없으니, 이는 낮에 내린 판단이 얼마나 성급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인 셈이다.

‘경시했지.’

오판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저 말 잘하는 성주가 졸장부임을 확신했다. 다만 능력 있는 졸장부였을 뿐이다.

문제는 겁쟁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주를 경시했다는 점이었다. 처음 단 한 번 본 인상을 가지고 무능한 겁쟁이라고 여겨 우습게보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고작 백인장 주제에 성주를.

‘좋은 경험을 했군.’

이름 모를 현인이 이르기를, 어떤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말 하나를 할 때도 한 번 더 생각을 하라 하는데, 사람을 판단할 때는 어찌 해야겠는가. 적어도 말을 뱉는 것보다는 몇 배 더 신중해야 함이 당연하다.

군터는 새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 볼일 없다 여겼던 백인장들이 다르게 보였다. 그들에 대한 인상이 그저 적당히 능력 있고 운 좋은 이들에서 어떤 다른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이들로 바뀌었다. 이는 그가 세상을 조금 더 신중하게 보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배웠다. 군터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지는 이유였다.

*

적당히 올라온 술기운을 즐기며 숙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시비들 중 한 명이 슬쩍 다가와 말을 전했다.

“성주님께서 뵙자 하십니다.”

“지금 말이냐?”

“예. 조금 전에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의아했다. 지금 막 한참 동안 이어진 식사를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따로 만나 할 말이 있었으면 그때 언질을 주었으면 될 것을, 이제야 사람을 보내 찾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있는 건가.’

따로 불렀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하지만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이쪽으로.”

말을 전한 시비가 앞장섰다. 그에 군터는 의외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네가 안내하는 것이냐?”

“예.”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느꼈을 터인데도 시비는 태연했다. 그녀는 인적이 드물고 복잡한 샛길로 군터를 안내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지날 때, 군터는 이 부름이 굉장히 은밀한 것임을 눈치 챘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성주는 시오도크의 책임자다. 이 성에서 그보다 지위가 높은 이는 없다. 그런데 그런 성주가 이렇게 은밀히, 그것도 조금 전에 얼굴을 본 사람을 다시 찾을 때는 무언가 구린 이유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대개 구린 것은 귀찮고 골치 아프다.

“성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좁다란 골목길을 몇 번이나 꺾어 지났을까. 시비는 군터를 자그마한 쪽문 앞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정갈한 옷차림의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자였다. 아마 성주를 섬기는 집사 정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성주께서는 이 몸만 찾으신 건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정말이든 거짓말이든 어차피 곧 알게 될 터. 군터는 노인을 따라 들어갔다.

“아. 오셨구려. 갑작스레 미안하오.”

향한 곳은 저녁식사를 했던 연회장이 아니라 성주의 집무실로 보이는 방이었다. 그곳에는 성주와 모디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한데…무슨 일이신지.”

슬쩍 모디레스를 보았으나 그 역시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에 도착한 것인지 그의 앞는 아직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차가 놓여 있었다.

“먼저,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겠소. 허나 사안이 급박하여 어쩔 수 없이 결례를 범했소. 부디 양해해주기 바라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성주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결례를 범했다 해도 그 같은 지위의 사람이 일개 백인장들에게 보이기에는 너무 과한 사과였다. 모디레스가 급히 일어나 마주 고개를 숙였다. 반면 군터는 조금 눈을 크게 떴을 뿐, 찻잔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너무 과합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오. 지금부터 나는 그대들을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게 될 것이오. 내 이 사과는 그에 대한 것이기도 하오. 그러니, 전혀 과하지 않소.”

“위험한 일…이라시면?”

자리에 앉은 성주가 몇 번 망설이다 입을 떼었다.

“아는지는 모르겠소만, 시오도크에는 7명의 백인장이 있소.”

7명의 백인장이 있다는 것은 7개의 백인대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의 성에 주둔하는 병력치고는 조금 규모가 작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개중 실질적으로 군을 이끄는 것은 선임 백인장인 디파르그라는 자요. 혹 그의 이름을 들어보았소?”

군터는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모디레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말을 하는 모디레스의 태도는 퍽 조심스러웠다. 성주가 그를 알아보고 흐릿하게 웃었다.

“그대는 멜루니악에서 오랫동안 복무했다 하지 않았소. 소문을 들은 적이 있겠지.”

“음. 그것이…….”

“소문은 사실이오. 이 성에 사는 이들 중 나와 디파르그 사이의 알력을 모르는 이는 없소.”

군터는 둘 사이의 대화에 끼지 않고 방관자적 입장에서 있었다. 그는 묵묵히 차를 마시면서 상황을 추리해 보았다.

‘디파르그라는 자가 시오도크의 군졸들을 대표한다. 그런데 성주는 그와 알력이 있다.’

일찍이 모디레스에게 시오도크의 성주가 군졸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으레 있는 문인 상관과 무인 부하들의 갈등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성주는 디파르그라는 이름을 콕 집어 언급했다. 그렇다는 건 이 갈등이라는 것이 둘 사이의 알력이라는 뜻.

아주 살짝, 흥미가 생겼다. 조금 있으면 귀찮아질지도, 짜증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럭저럭 듣는 재미가 있었다. 이제 막 성주가 그의 개인사를 꺼내려는 참이었다.

“내가 시오도크에 부임한 지 벌써 3년하고 10개월이 흘렀소. 디파르그는 그때도 선임 백인장이었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특별히 사이가 좋고 나쁘고 할 것 없이 그저 데면데면했었소. 그는 그의 영역이 있었고, 내게는 나의 영역이 있었지. 서로가 그것을 인정하고 지냈소.”

문신과 무신 사이에 그 정도면 아주 무난한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1년여가 지났을 무렵.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지.”

“사건이라면 어떤?”

“부끄럽지만, 이곳에 와 내가 마음을 준 아이가 있었소. 성의 시비였는데, 성격이 밝아 그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지.”

슬쩍 고개만 들었던 흥미가 비로소 온전히 자리잡았다. 군터는 찻잔을 놓고 이어지는 성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아이 역시 내게 마음을 주었소. 난 젊어서 처를 잃은 뒤로 줄곧 혼자였던지라 그 아이를 새로이 정실로 들이려 마음까지 먹고 있었지. 그런데…디파르그가 일을 저질러버렸소.”

“일을 저질렀다 함은……?”

“놈이 그 아이를 죽였다는 말이오. 끔찍하게.”

성주가 괴로운 얼굴을 한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흰 머리를 움켜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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