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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이 스물세 벌. 창이 서른일곱 자루. 칼이 열다섯 자루입니다.”
살라스가 준비해 온 서류를 보고 줄줄이 읊었다.
“여유분 포함인가?”
“아닙니다.”
당장 필요한 품목만 이 정도라는 뜻이다. 멜루니악을 출발할 때 분명히 물자를 넉넉히 챙겨 왔으니, 체시콘 강에서 한 번 전투를 치르고서 이렇게 거덜이 났다는 뜻이다.
“전투 한 번에 이 정도라. 그나마 말이 상하지 않아 다행인가.”
정말 다행스럽게도, 군마는 멀쩡했다. 하기야 전투 중에 군마가 상했다면 기수(騎手)도 같이 상해버렸을 테니, 전투 후에 군마의 보급이 필요해지는 경우는 드물 수밖에 없었다.
“성주에게 얘기해두겠다.”
“그러지 마십시오. 모디레스님께 말씀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건 어째서지?”
“우리가 시오도크를 지키기 위해 주둔하고는 있지만, 이런 보급을 성주에게 이야기하면 거부하지야 않겠지만 분명 탐탁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속이 좁다 여길지 몰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갑옷은 본래 무구 중에서도 비싼 편인데다, 기병들이 쓰는 창은 일반 창병의 그것과는 달라 꽤 값이 있는 편이고 칼도 마냥 싸지는 않다. 이것들을 전부 대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아깝지 않겠는가? 반군들과 싸우느라 그랬다고는 해도 직접적으로 시오도크를 지키다가 그리 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모디레스에게 대신 말하게 해라?”
“그는 분명 대장님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이런 요청 정도는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요컨대 빚쟁이에게 빚을 받으라는 뜻이다.
군터가 피식 웃었다.
“이런 꾀도 부릴 줄 알았더냐?”
“꾀가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실제로 체시콘 강에서 피를 흘린 것은 우리뿐입니다. 흘리지 않아도 되는 피를 흘렸지요. 멜루니악의 500보군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음.”
“우리는 그들을 위해 동료들의 목숨을 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우리에게 무구를 내주는 것쯤은 기꺼이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라스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빠르게 쏟아내는 말들이 구구절절 맞는 것뿐이라 금방 꾀 운운했던 군터가 다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리 하마.”
“송구합니다.”
“아니야. 정말 네 말이 옳다. 우리가 한 것이 있는데 저들도 응당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대장이랍시고 너희에게 고생만 시킬 뻔했구나.”
누구도 남의 밥그릇을 챙겨주지 않는다. 상관인 막시밀리언이 있었다면 그가 알아서 챙겨주었겠지만, 지금 그는 없었다. 군터는 홀로 부하들을 이끌어야 했다. 부하들을 챙길 책임은 온전히 그에게 있었다.
“오늘 저녁에 성주와 식사약속이 잡혀 있으니 그 전에 얘기하면 되겠군.”
얼마 후 저녁약속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을 즈음.
군터는 미리 모디레스를 만나 부족한 물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알겠소. 물자 보급에 대해서는 내가 성주께 직접 아뢰리다.”
모디레스는 대신 해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자신이 나서겠다고 했다. 군터는 이를 통해 그가 어느 정도의 염치는 있는 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맙소.”
“아니.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사실 그대가 내게 와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소. 성에 들어오고 나서 쓸 데 없이 바빴던지라.”
뭘 하느라 바빴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보다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욕시중이 한 쪽에만 붙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무언가를 털어낸 것 같은 얼굴만 봐도 짐작이 갔다.
“이곳 성주님에 대해서 알고 있소?”
저녁식사 시간 까지는 아직 여유가 조금 있었다. 군터는 모디레스의 권유로 그와 마주 앉아 차나 한 잔 마시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멜루니악에서 복무한 세월이 10년에 가까우니 어느 정도 들은 바는 있지.”
사실 성주쯤 되면 근방에서는 쉬이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남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입에 담기를 즐긴다. 막상 대면하면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만 숙이고 있겠지만, 없는 데서는 살마드 성주의 욕도 하는 것이(물론 그 정도로 간이 부은 사람은 드물긴 하지만) 사람 아니던가.
시오도크는 멜루니악과 가까운 편이다. 그런 만큼 도시와 성을 오가는 사람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보니 성주의 이야기도 가끔씩 들려오는 편이었다.
“이곳의 성주님은 전형적인 문신(文臣)이오. 성주로 부임하신 지는 이제 4년째 정도로 알고 있소. 본래는 살마드에서 제법 높으신 분을 보좌하셨다더군.”
낮에 성주를 처음 만났을 때, 성주는 자신을 파지오라 소개했다. 성이 없다는 거다. 성이 없다는 것은 귀족이 아니라는 뜻인데, 귀족이 아닌 이가 성주 자리에까지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시오도크의 성주는 그런 극히 드문 경우에 속했다.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운이 좋아서? 물론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성주쯤 되는 자리에 달랑 운 하나를 가지고 오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보좌했다는 그분이 상당히 높은 분이었나보군.”
“추측만 하는 거지. 그런 것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알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오.”
누군가의 뒷배로 관직에 올랐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성주 자리에 자기 뜻대로 사람을 심을 수 있을 정도의 권력자라면 자신의 이름이 가벼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 그의 덕을 본 성주는 입을 꾹 다물었으리라.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군졸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더군.”
“문신이 윗자리에 앉은 곳에서는 흔한 일 아니오.”
살마드에서 멀어질수록 덜한 경향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군관과 문관은 서로를 꺼려했다. 그러다보니 대개 살마드에서 곧장 내려오는 임명직 관리의 경우 그곳에서 장기간 복무한 군관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았다.
군터는 시오도크 역시 그런 흔한 경우가 아니냐는 뜻으로 말했는데, 모디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가 아니오. 성주께서 시오도크의 군졸들을 노골적으로 배척 한다 들었소. 그들의 성실함이나 충성심 등을 믿지 못하겠다는 등의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다 하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이오?”
“그건 모르겠소. 하지만 그렇지는 않겠지. 성주께도 무언가 그런 태도를 견지하실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보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꾸준히 시오도크의 군졸들과 척을 지신 것은 사실이고, 오늘 성주께서 보인 다소 과할 정도로 불안한 모습 역시 그와 관련이 없지 않다 생각하오.”
군터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우습군. 곧 반군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는 판인데 성주와 군졸들이 서로 반목한다?”
국적(國賊)을 상대하는 일에 사감이 끼지는 않으리라 믿고 싶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옛적부터 전시에 죽어나간 지휘관들 중에 불만을 품은 부하의 칼에 맞아 죽은 경우는 드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잡음이 일기 마련 아니겠소?”
“틀린 말은 아니나, 그래도 황당하군.”
모디레스는 찻잔을 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제 20대 중반을 넘긴 그와는 달리, 40대 초반인 모디레스는 이런 일들이 그리 놀랍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군터는 어쩌면 저런 것이 관록인가 싶었다.
*
족히 사람 열 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긴 식탁이 널찍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두 열로 늘어섰다. 식탁 위에는 고기류와 채소류, 과일에 마실 것까지 온갖 음식들이 즐비했다. 그런 호사스런 두 개의 식탁에 달랑 여섯 명이 셋씩 나눠 앉았다.
“차린 것은 없소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으니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라오.”
성주 파지오가 상석에서 일어나 웃으며 잔을 들었다. 여섯 명의 백인장들이 그를 따라 잔을 들면서 호사스러운 식사가 시작됐다.
‘말도 안 나오는군.’
성대하다 못해 위압적이기까지 한 식탁이었다. 상다리가 부러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식탁 위는 온갖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단언컨대 군터는 살면서 이보다 호사스러운 식탁을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자신만 이런 것인가 싶어 슬쩍 곁눈질로 모디레스를 비롯한 다른 백인장들을 살펴보았는데 그들도 역시 하나 같이 놀란 얼굴들이었다.
“많이들 드시오. 그래도 우리 성의 주방장이 여러분을 위해 가진 재주를 다 쏟아냈다오.”
있는 재주를 다 쏟아낸 게 아니라 없는 재주까지 다 부린 것 같았다. 성주는 백인장들의 놀란 얼굴을 감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너무나 과분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표로 모디레스가 일어나 성주에게 예를 취했다. 다른 백인장들도 앉은 자세에서 똑같이 따라 예를 취했다. 성주는 허허 웃었다.
“되었소. 여러분은 이 시오도크의 수호자로서 오신 게 아니오.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되지. 자, 듭시다. 음식이 식겠소.”
성주가 식기를 들자 백인장들도 본격적으로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맛있군.’
군터는 눈앞에 가득한 음식들을 맛보며 혀가 즐겁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어떤 음식을 먹든 순식간에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음식을 종류별로 한 번씩 맛보고, 그 다음에는 손이 가는대로 먹어치우다 보니 금세 그의 앞에 있는 그릇들이 비기 시작했다.
“허허. 군터 대장은 정말 잘 드시는군. 역시 보기 드문 장한답소.”
“내어주신 음식이 너무 훌륭해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민망하군요.”
“아니오, 아니오. 음식을 마련한 입장에서 손님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 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보기 좋소이다.”
성주는 인자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묘하게 기품이 있어 보였다. 낮에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겁만 많은 문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모습을 보니 과연 높은 자리에 있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투나 표정, 행동거지는 낮과는 달리 상당히 여유로웠다. 손님을 맞이하는 이상적인 주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군터는 그에게서 풍기는 품위에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그것을 보았는지, 성주의 입가에 걸린 인자한 미소가 더 진해졌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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