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2화 (92/1,064)

<-- 체시콘 강의 전투 -->

말 머리는 멜루니악이 아니라 시오도크로 향했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규모가 작은 중간 규모의 성인 시오도크는 체시콘 강의 동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멜루니악과 말레이드의 중간에 위치한 시오도크는 이번 작전에서 고안된 대(對) 반군 전선의 허리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때문에 반군의 견제를 최대한 한 후, 빠져야 할 때는 시오도크로 향하기로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

“2중 성벽이군요.”

시오도크 성이 눈에 들어올 무렵. 살라스가 높낮이가 다른 두 겹의 성벽을 보고 눈을 빛냈다. 내륙에서야 흔하지만, 바크렌 북부에서는 다중 성벽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좀처럼 공성전이 일어나지도 않을뿐더러, 일어난다고 가정을 해도 주 상대가 기마이기 때문이다. 기마를 상대로 성벽을 두 겹이나 세우는 건 낭비에 지나지 않으니.

“이 정도라면 수천 군세가 포위해도 쉽게 함락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지. 공성무기를 사용하면 어찌 될지 몰라.”

“공성무기? 거…투석기 같은 거 말인가?”

“공성추라던가…뭐 많잖아? 듣기만 하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하긴. 뭐 우리가 공성전을 치러봤어야 알지. 바크렌에서 마지막으로 공성전이 일어난 게 수십 년 전 아니야?”“아마 그럴게야.”

시오도크의 이중 성벽은 무료하던 이들에게 좋은 대화거리가 되었다. 군터는 휘하 십인장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시오도크를 눈에 담았다.

*

“어서 오시오. 고생이 많으셨소. 시오도크의 성주 파지오라 하오.”

“처음 뵙겠습니다. 멜루니악의 백인장 모디레스라 합니다.”

“백인장 군터입니다.”

성주라는 직책은 살마드의 지방 정부가 임명한다. 정확하게는 살마드의 성주가 임명권을 가지고 있는데, 물론 그 혼자 결정하여 임명하는 것은 아니고 관리들과 상의를 하여 결정한다.

그런데 이렇게 임명되는 성주들은 대개 문관이다. ‘대개’라고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문관이다. ‘모두’라고 하지 않은 것은 북부에 있는 성들의 경우에는 무관이 성주직을 겸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드문 경우다.

하지만 시오도크의 경우는 그 드문 경우에 속하지 않았다. 스스로 파지오라 소개한 시오도크의 성주는 복스럽게 배가 나온 중년이었고,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손가락은 검 한 번 쥐어보지 않은 티가 역력했다.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피부도 거칠했다. 볼록한 배나 몸에 걸친 고급스러운 옷을 보면 몸에 좋은 것은 알아서 잘 찾아먹을 것 같은데도 이리 초췌한 몰골이라는 것은, 그가 요 며칠 동안 어떤 이유에서 불안에 시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반군의 북상이었을 터. 그가 이렇게 성문 앞까지 나와 반가이 맞아주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의 서신을 받았네. 그분께서는 오지 않으시는가? 직접 군을 이끌어주신다면 반군 놈들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장군께서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어찌 장군의 의중을 헤아리겠습니까.”

모디레스의 말에도 통통한 성주는 우려스런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그를 보며 군터는 체시콘 강에서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 참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시오도크로 오지 않고 멜루니악으로 돌아갔다면, 그리고 반군이 시오도크를 치기라도 했다면 이 겁 많은 성주는 반군의 규모를 보자마자 성벽 위에 백기라도 내걸었을 테니.

‘이런 겁쟁이를 요지의 성주로 두다니.’

백인장으로 보낸 세월이 이제 년 수를 헤아리면서, 군터도 권력의 판세라는 것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특별히 알려고 하지 않아도 풍문으로 듣게 되는 바가 있기 떄문이다.

무관들을 성주로 두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두렵기 때문이다. 리에론 가문으로 대표되는 무관 세력은 결집력이 강하다. 장군들과 그 휘하의 장교들, 그리고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한 조직으로 뭉쳐있다 보니 그 단결력이라는 것은 펜대만 굴리는 문관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당연히 문관들도 그것을 알고 있고, 성주 역시 알고 있다. 물론 무관들이 암만 단단하게 뭉친다 해도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당장에 무관들의 대표격인 리에론이 살마드에 뿌리를 둔 토호 가문인데다, 다른 장군가(將軍家)도 토호들이 많고 바크렌 같은 제국의 궁벽한 지방에서 아무리 큰소리를 쳐봐야 중앙정부의 입김 한 번이면 벌벌 떨어야 하는 신세인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성주를 비롯한 문관들은 무관들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관들이 성주를 중심으로 뭉쳤다면 무관들은 총독을 중심으로 뭉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바크렌의 통치 권한을 가진 성주와 그런 성주를 견제해야 하는 총독은 태생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을 따르는 각기 다른 두 무리는 언제나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성주들이 죄다 문관들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성주의 임명은 살마드 성주의 권한이기에 총독도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러한 인사 조치는 살마드의 권력 싸움에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전시가 된 지금, 그 나름 괜찮았던 수는 악수가 되어 돌아왔다. 두터운 성벽과 성을 지킬 충분한 병력을 지니고도 두려워 떠는 이런 자가 전투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성주님. 소개 작업은 어찌 되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까지 여섯 개 마을의 백성들이 지나갔다네. 이제 최대 서너 개 정도 남은 것 같군. 부디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앞으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체시콘 강을 넘은 이상, 반군 놈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요.”

반군들의 과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 세를 넓히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본거지를 얻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저항하는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면서 보급을 충당해왔지만, 그 세가 장정의 수만 1만 가까이 될 정도로 불은 이상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주둔할 근거지가 필요해졌다. 특히나 정말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대로 나라를 재건하겠다고 한다면 왕이 머물 수도와 세금을 바칠 백성들의 존재는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데 필수적이다.

“원행에 지쳤을 터인데, 일단 마련해둔 숙소로 들어가 쉬도록 하게. 못 다한 이야기는 저녁에 이어서 하도록 하지.”

중요한 사항들에 대한 보고를 마치자 성주는 모디레스와 군터, 그 밖에 백인장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고서 본인의 관저로 돌아갔다.

*

군터는 성주가 마련해준 숙소로 들어갔다. 백인장이라고 대접해 준 것인지, 자그마한 2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할당됐다. 거기에 젊은 시비까지 두 명이나 있었다. 둘 모두 젊고, 미모도 반반한 축에 속했다. 성주가 문관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제법 섬세한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시비들은 교육이 잘 되어 있었다. 뜨끈한 물이 담긴 목욕통 앞에서 부드럽게 군터의 옷을 벗겼다. 군터의 키와 덩치가 워낙 커서 두 명이 달라붙어도 낑낑대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편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됐다. 너희는 벗을 필요 없다.”

“예?”

군터의 옷을 다 벗기고 나서 자신들의 옷도 벗으려던 시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군터는 됐다고 손 사레를 친 뒤 목욕통 안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물이 몸을 적시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시비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본래는 그녀들이 함께 알몸으로 목욕통에 들어가야 했다. 목욕시중이라는 것이 본디 몸을 씻는 것도 씻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주목적은 ‘대접’에 있기 때문이다. 알몸으로 함께 목욕통에 들어가 그런저런 일들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군터는 옷도 벗지 말라 하고, 심지어 세 명이 들어가도 그럭저럭 공간이 남는 목욕통에 혼자 들어갔음에도 공간이 거의 찼다. 워낙에 덩치가 크다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부 겪어본 바 없는 일들이라 숙련된 시비인 그녀들로서도 당황스럽기만 했다.

‘당기긴 하는군.’

군터는 그런 그녀들의 사정을 대강 짐작했다. 솔직히 백인장 정도 되면, 특히 군터와 같이 인정받는 기병대장이라면 이 정도 대접은 어딜 가도 자연스럽게 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부류의 대접은 항상 고사해왔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그가 부인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내가 여러 여인을 품는 것은 결코 흠이 아니었다. 싫다는 걸 강제로 취한다면 모를까, 취하라고 떠미는 여인들까지 내밀 이유는 전혀 없었다.

군터도 자신이 과할 정도로 미련하게 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수도사와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안고 싶고, 바로 앞에 야시시한 차림으로 있으면 당장에 옷을 벗기고 거칠게 눕히고 싶다. 손만 뻗으면 가능한 일이다.

허나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까닭은, 역시 벨리사가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비 두 명과 마음껏 뒹군다고 해도 벨리사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안다 해도 무어라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 전에 말했듯, 사내가 여러 여인을 안는 것은 흠이 아니니까.

미련한 짓이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공처가도 이런 공처가가 없다고 비웃을 일이다.

안다. 하지만 괜찮다. 이렇게 치미는 욕구를 마다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인내를 거듭하며 그는 스스로에게 당당해질 수 있었으니까.

이러고 있기에, 군터는 벨리사에게 애정을 드러내며 항상 당당할 수 있었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노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거짓말쟁이들이 가면을 쓰고 뻔뻔히 내뱉는 말들과는 다른, 진정으로 솔직한 마음으로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야기나 좀 해보아라.”

“예?”

“어떤 이야기든 좋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좋고, 요 근래의 소식 같은 것도 좋아. 심심하니 귀라도 즐겁게 해다오.”

서로 눈을 마주친 시비들이 곧 주뼛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장가처럼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군터는 느긋이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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