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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1화 (91/1,064)

<-- 체시콘 강의 전투 -->

“…물러납시다.”

군터가 물꼬를 터 준 덕에, 모디레스는 좀 더 수월히 내야 할 답을 낼 수 있었다.

막판의 실책이 있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전체적으로 임무 실패라 보기에는 애매했다. 어차피 그들은 정면으로 반군에 맞설 수 없는 입장이었고(심지어 반군의 규모는 보고로 들어 예측한 것보다도 훨씬 컸다), 막판의 실책 역시 실책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적의 계책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규모 면에서 절대적 약세인 멜루니악군은 넓게 펼쳐서 적을 감시한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했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닷새라도 번 것도 나름 성과라면 성과였다.

“정확히는 엿새입니다. 적들도 오늘 하루 정도는 쉴 테니 말입니다.”

“그렇군. 엿새라…….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그래?”

군터가 웃으며 말했다.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는 붕대를 감은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같이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은 병사들도 대동소이한 모습이었다. 간간이 멀쩡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크고 작은 부상 한 두 개 씩은 가지고 있었다.

“간 놈들은 간 거고, 남은 우리는 또 계속 살아가는 거다.”

승전이라고 해야 할까 패전이라고 해야 할까. 적의 도강을 허용하고 물러났다는 점에서는 패전이고, 수천 적군의 한복판을 돌파해 냈다는 점에서는 승전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설령 승전이라 해도, 같이 말을 달리던 전우들을 잃었다는 점에서 달갑지만은 않았다. 패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둘러앉은 이들의 분위기는 제법 우울했다. 동료를 잃었고, 힘껏 함성을 지를 만한 큰 승리도 얻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패잔병의 몰골이었다. 군터 기병대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뭉치기 전, 일찍이 경험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금 드리우려 하고 있었다.

군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 그는 성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표정들 펴라! 우리가 아니었다면 멜루니악의 오백 군세가 멀쩡히 퇴각할 수 있었겠는가!”

무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군터는 그 시선들에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할 일을 했다! 떠난 놈들은 부끄럽지 않은 마지막을 맞은 거다!”

전투에서 전사자가 나오는 것은 말을 달리며 바람을 맞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로 인해 흩날리는 것은 머리칼이 아니라 눈물이기 때문이다. 함께 싸운 전우는 가족과 같이 각별하고, 그런 각별한 이를 떠나보내는 감정은 값싼 위로로 달랠 수 없다. 또한, 매번 전투 후마다 아이를 달래는 어미처럼 붙어 달랠 수도 없다.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 각자가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버티지 못하는 자는 무너질 것이고, 무너진 자는 망가지거나 떠나게 될 것이다.

군터는 그 모두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그의 부하들이 굳건히 이겨내기를 바랐다. 전사가 밟고 일어서야하는 것은 피와 시신뿐이 아니다. 눈물도 밟고 서야 한다. 그 눈물은 남의 것일 수도, 자신의 것일 수도 있다.

“떠나간 모든 놈들을 자랑스러워해라. 놈들이 웃지 못한 만큼 호탕하게 웃고, 떠들지 못한 만큼 시끄럽게 떠들어라. 그것이야말로 놈들의 죽음을 밟고 선 너희의 권리이고, 의무다.”

궤변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는 그의 신념이었다. 군터는 진정한 전사라면 모든 것을 피함 없이 받아들이고, 결국 이겨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러했고, 자신의 부하들 역시 그러기를 소망했다.

“술이 없어 아쉽구나! 뭐 아쉬운 대로…….”

군터는 물주머니를 들었다.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아 홀쭉해진 주머니가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덜렁대며 흔들렸다.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는 소리들이 새어나왔다. 군터는 그들을 탓하거나, 시선 주지 않았다. 그저 씩 웃으며 얼른 들라는 듯, 팔을 고쳐 들었다.

곧 모든 병사들이 저마다 물주머니를 치켜들자, 그는 호탕하게 외쳤다.

“든 것은 물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쓴 술처럼 마시도록! 이제 더는 마시지 못할 놈들을 대신해서 말이다!”

주머니에 남은 물을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맛이 매우 썼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

모디레스와 군터는 체시콘 강을 뒤로 하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물러서기로 마음먹었으니 적의 추격을 경계하면서 최대한의 속도로 퇴각했다. 그러다 한 이틀 정도 멜루니악을 향해 강행군을 거듭했을 때에야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며 한숨을 돌렸다.

“흐음.”

군터는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쿠센을 돌보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에서 상처를 입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군마 역시 적의 창칼에 무수히 베이고 찔렸다. 쿠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격전의 와중에도 최대한 쿠센이 상처입지 않게 신경 쓰며 싸웠지만, 그래도 모든 적의 공격을 다 걷어낼 수는 없었던 터라 매끈한 근육질의 몸에 상처 몇 개가 생기고 말았다.

“조금 쓰릴 거다. 참아라.”

약을 듬뿍 묻힌 손으로 상처를 더듬자 쿠센이 거센 콧김을 뿜어댔다. 그래도 참으라는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약을 바르는 내내 별 다른 소리는 내지 않았다.

“잘 참았다.”상처에 약을 다 발라주고서 잘 참은 쿠센을 장하다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쿠센도 낮게 울며 군터의 얼굴을 핥았다. 큼지막한 혀가 얼굴을 훑고 지나가니 끈적거리는 침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군터는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웃었다.

“대장님. 이렇게 일찍부터…….”

피곤한 얼굴로 밖에 나온 이는 살라스였다.

“새삼스럽군.”

가장 먼저 잠에서 깨는 이는 매번 그였다. 도시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는 항시 잠이 별로 없었다. 좀처럼 쉽게 피로해지지 않는데다 그나마 쌓이는 피로도 조금만 자면 깔끔히 풀리곤 했다. 본래부터 체력이 좋기도 했지만, 신물의 힘으로 신체능력이 급격히 오른 후부터는 그것이 비인간적이라 할 정도로 심해졌다.

“하지만…부상을 입으셨잖습니까.”

“큰 상처도 아니었다.”

일전에 입었던 복부의 관통상은 정말 그를 죽음의 코앞까지 데려갈 만큼 심각한 상처였다. 하지만 그런 심각한 상처마저도 며칠 만에 털고 일어선 그였다. 그에 비하면 이번 전투에서 입은 상처들은 찰과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내 걱정은 말고, 너야말로 몸조리 잘 하거라.”

이번 전투에서 홀로 선봉에 서서 적진을 돌파한 군터가 가장 큰 부담을 졌다면, 그 다음은 단연 살라스였다.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군터를 바로 뒤에서 묵묵히 받친 그였다. 군터 만큼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라고 할지, 부대 내에서 가장 많은 부상을 입은 것이 바로 살라스였다. 그의 몸, 특히 상체는 붕대로 온통 휘감겨 있었다. 본인이 말하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못해도 열 개 이상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우습지만, 저 파리한 안색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닌 것이다.

“들어가 쉬어라. 괜히 상처에 찬바람이 들어가면 좋지 않다.”

괜찮다고 하는 살라스를 윽박지르듯 하여 돌려보낸 후. 군터는 쿠센의 옆에 앉아 새벽바람을 쐬었다. 방금 전에 상처에 찬바람이 들면 좋지 않다 말하기는 했지만, 군터는 그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만한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

군터는 갑옷 속 얇은 옷 안쪽을 뒤져 목걸이를 빼냈다. 튼튼하게 몇 번이나 겹쳐 묶은 줄에 고정된 자그마한 돌멩이. 한때는 부족의 신물이었던 물건이다.

‘결국, 노인네의 선물이 날 몇 번이나 구한 셈이군.’

이 물건을 받았을 때가 마지막이다.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거기까지 찾아갈 여유도 없었고, 있었다한들 가지 않았을 것이다. 선물은 고맙지만…그뿐이다. 원수 같은 노인네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아마 죽었겠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하긴,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부족 내에 그 노인네보다 나이가 많은 이가 없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살기도 참 오래 살았다. 무녀라서 그런 것일까?

“음.”

신물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리던 군터는 문득 신물이 예전보다 조금 작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손에 쥐면 손가락 끝이 손바닥에 약간 모자란 정도로 떴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주먹이 쥐어졌다.

‘전투 중에 깨지기라도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깨지거나 한 것은 아닌 듯했다. 특유의 매끄러운 감촉과, 무엇보다 기이하면서도 묘하게 자연스러운 문양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기 줄어든 것은 분명하니, 이게 무슨 기이한 조화인가 싶었다.

‘뭐, 언제는 이해가 가는 게 있었던가.’

이제와 죽었을 게 (거의)분명한 노인네를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신물이 쪼그라든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딱히 물을 곳도 없었다. 이런 신비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너무도 귀하고 은밀하여 그와 같은 범부(凡夫)는 좀처럼 가까이 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모르는 채로 있을 수도 없으니,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좀 배워둬야겠군.’

생각해보면 그는 이제껏 이런 신비와 얽힌 일이 적지 않았다. 일단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신물이 그랬고, 예전에 사교도 마을에서 맞닥뜨렸던 바칼이 그랬다. 또 오테론에 갑작스레 닥친 혹한이라던가, 그를 해결하기 위해 쿠엘단의 법보를 사용했던 일 등. 짧은 시간 동안 신비와 관련한 꽤나 많은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 중에 사교도 마을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그가 제대로 알거나 이해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흘러가는 대로, 방관자적 입장에서 바라만 보았을 뿐.

‘거 참. 꽤나 막막하군.’

당장이 아니라 언젠가 라고는 했지만, 그런 지식들을 어디서 어떻게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자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것 마냥 아무런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더욱 그랬다. 그나마 술사 중에 인연이 있는 이라고 하면 일전에 임무에서 함께 했던 팔라미우스가 있기는 했지만, 그와는 오테론에서 헤어진 뒤 말 한 마디 나눈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오테론이 함락당하고 나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살라스도 특별히 아는 건 없는 것 같고.’

다방면에 지식이 있는 살라스이긴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책을 통해 접한(그것만 해도 대단하긴 하지만) 것들뿐이었다. 말하자면 기본적인 개념 같은 것들. 그래서 살라스도 스스로 책은 제법 읽었지만 깊게 아는 것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원점이군.’

깔끔한 무지(無知)다. 평소 배움이 부족한 것에 대해 딱히 불편함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는 게 없음이 상당히 답답했다. 필요한 답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리도 괴로운 것이었던가?

“너는 고민이 없어 좋겠구나.”

푸르르

부럽다는 듯 쳐다보자 쿠센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입술을 떨었다.

========== 작품 후기 ==========

연참 시작입니다.

얼마나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비축분이 조금은 있으니 힘내 보겠습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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