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시콘 강의 전투 -->
군터 기병대는 수천의 적 한 가운데를 돌파해 들어갔다. 군터는 그 선두에서 앞만 보며 창과 칼을 휘둘렀다. 칼이 번뜩이면 피가 솟구쳤고, 창이 움직이면 한 명의 목숨이 끊겼다.
창극이 머리를 꿰뚫었다. 날을 돌려 세우고 당기니 두개골이 갈려나가며 피 묻은 창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창두에서부터 창대 끝에까지 이어진 붉은 문양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쉼 없이 피를 빨아들이며 창에 깃든 피 먹이 주술은 끝없이 강화되어갔다.
“죽기 싫은 놈은 썩 꺼져라!”
쿠센은 조금도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는 적은 군터가 모두 쓸어버렸기에 전력으로 내달리는 말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챙강!
얼마나 내달렸을까. 적병의 머리를 반쯤 갈라 멈춘 칼이 부러져버렸다. 군터는 냉큼 부러진 칼을 버리고 빈손으로 고삐를 쥐었다.
“물러서라!”
방패와 창을 든 병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군터는 창을 몽둥이처럼 휘둘러 그들을 물리쳤다. 창두를 막은 방패는 으스러지고 주인은 팔이 부러져 창을 든 병사와 함께 나뒹굴었다.
‘젠장!’
한 번 창을 휘둘러 떨쳐냈지만, 쿠센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 사이 주변의 적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재차 달려 나가려 하지만 한 번 죽은 속도는 다시 붙지 않았다.
창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이 고비다. 여기서 발이 묶인다면 죽을 것이고, 뚫어낸다면 살 것이다.
“돌파하라!”
뒤따르는 부하들에게 하는 명령이자, 스스로에게 내는 고함이었다. 쿠센의 배를 세게 치니 젊은 흑마가 콧김을 뿜으며 더 세게 땅을 박찼다. 바로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머리로 들이받기라도 할 것처럼.
“막아서는 놈은 모두 죽는다!”
붉게 빛나는 창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찌르고, 베고, 후려쳤다. 말발굽이 한 번 땅을 찍을 때마다 두엇이 죽고, 병신이 되어 나가 떨어졌다. 커다란 말 위에서 날뛰는 군터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귀의 광란, 그 자체였다. 압도적인 수를 믿고 사방에서 조여들어오던 반군 병사들은 수십, 수백을 압도하는 흉악한 기세에 질려 다가오는 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뒤에서 목청껏 외치는 지휘관들의 독려도 본능적인 두려움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었다.
“적은 고작 백 남짓이다! 밟으면 터질 벌레 같은 놈들이란 말이다!”
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한 군터는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 살기어린 눈을 번뜩였다. 그는 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주인의 의도를 읽은 쿠센이 냅다 앞으로 달렸다. 그러다 배를 한 번 채였을 때,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어, 어엇?!”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화려한 갑주. 당황한 듯 크게 뜨인 눈. 그에 드러난 감정이 당황에서 공포로 바뀌는 데는 귀기로 번들거리는 눈과 마주친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푸욱!
섬전처럼 뻗어간 창극이 갑옷과 투구 사이를 꿰뚫었다. 목을 관통당한 몸뚱이가 창에 들려 덜렁거리며 흔들렸다. 그때까지는 숨이 붙어있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그의 목을 뚫은 창은 일반적인 창이 아니었다. 창 전체의 반 정도가 칼날인 기형적인 창이었다. 몸을 빼려 버둥거리던 그의 손은 날카롭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창날에 싹둑 잘려나갔다.
“흥!”
군터가 크게 창을 휘둘렀다. 손가락 잘린 지휘관의 몸뚱이가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정확히 정면. 군터와 그의 기마들이 달려 나가야 할 방향이었다.
“이랴!”
크게 도약해 지휘관을 찌르기까지 불과 한 호흡. 그를 내던지고 다시 달리기까지 두 호흡.
총 세 호흡.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또 짧은 그 시간 동안 그를 둘러싼 주변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가 다시금 달리기 시작하면서 얼어붙었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멈춰 섰던 반군의 병사들도 다시 움직임을 찾았다.
‘묘한 느낌이군.’
막아서는 적들을 베어 넘기며, 군터는 우습게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생사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에 이런 사치를 부린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그런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한계를 넘나드는 힘을 쓰며 온 몸이 뒤틀리는 것 같았고, 창을 쓰는 팔에도 슬슬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 전장에서, 이 적들에게 죽을 거라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자만과는 달랐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자유롭구나.’
너른 초원 위에 혼자 말을 달리는 것만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바람과 짧게 자란 풀들 외에 아무 것도 없고, 그조차 힘껏 내달리는 말발굽 아래 모두 몸을 뉘였다.
‘시원하다!’
창날이 튕긴 핏물이 얼굴을 적신다. 가로막는 적들은 짚단처럼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그들은 바람이었다. 그의 나아감을 거스르지만 힘주어 내달린다면 그저 시원할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간지럽구나-!”
더 강하게, 더 세게 부딪치기를.
그는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치면서도 끝끝내 나아갔다. 그리고 그런 시도에 시도 끝에, 마침내 그를 막아 세우고 있던 커다란 문을 힘껏 열어 젖혔다. 활짝 열린 문으로 세찬 바람이 밀려들었다.
비로소 군터는 환히 웃었다. 여기저기 진하게 얼룩진 붉은 웃음이었다.
*
“말도 안 되는! 어찌 고작 저 정도의 적을 막지 못한단 말인가!”
속절없이 뚫려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한 지휘관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의 얼굴은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검을 빼들고 달려 나갈 것처럼 흥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없이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유그 칸디시아렌이 바로 그런 부류였다. 그는 기어이 포위망을 뚫고 아군을 통째로 가로질러가는 적의 기병대를 보며 소리 없이 감탄했다.
‘대단하군.’
훈련된 기병의 가치는 보병의 열배다. 그렇기에 기병이 홀로 동떨어져 나와 아군에게 돌격해왔을 때, 아군은 오직 기병대를 포위 섬멸하기위해 움직였다. 두터운 포위망을 짰고, 기병의 진로에 따라 몇 겹씩 따라붙었다.
그런데, 그리 했음에도 뚫렸다.
훈련이 부족한 아군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을 고려하여 과하다 할 정도로 두텁게 포위진을 운용했으니까. 돌파를 허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예상외의 변수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선두의 기병대장. 실로 보기 드문 용맹이다.’
지금의 돌파에서 저 자에게 죽은 병사의 수만 수십을 넘어 백에 가까울 것이다. 설마하니 이런 자그마한 전장에서 저런 광경을 목도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정도용력이라면 응당 이름이 알려졌을 터인데, 그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바크렌 뿐 아니라, 인근 지방의 이름 있는 인사라면 죄다 줄줄이 꾀는 그가 모른다는 것은…믿기 힘들지만 저 기병대장이 무명(無名)이라는 뜻이다.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저 정도의 용력. 게다가 추측컨대 지금의 돌파는 본대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과감한 결단. 이 둘을 묶어 헤아린다면 일신의 용맹에 담대함까지 갖추었으니 그야말로 호걸이라 할만 했고, 장군감이라 할만 했다. 인재가 턱없이 모자라는 신생 베이고르 왕국의 인사로서 탐이 날 수밖에 없는 인재.
‘포박했다면 투항이라도 권유하련만, 놓쳤으니 모두 부질없게 되었군.’
치미는 안타까움에 입맛을 다시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칸디시아렌 공. 이제 어찌 하는 것이 좋겠소? 역시 추격을?”
“아니오. 이미 늦었소이다.”
“허면?”
“조금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당초 목표했던 대로 도강에 선공하고 적을 몰아냈으니 그걸로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끄시는 본군이 마저 도강을 할 때까지 자리를 잡고 기다리도록 하지요.”
순조롭게 진행되던 작전이 끄트머리에 약간의 씁쓸함을 남겼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았다. 도강에 성공했고, 적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당초의 목적은 모두 이루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유그 칸디시아렌은 답답한 가슴을 그리 달랬다.
*
“군터 대장! 무사했구려!”
계속 달려 물러난 본대와 합류했을 때, 모디레스는 집안의 은인이라도 맞는 것처럼 헐레벌떡 달려 나와 군터를 맞이했다. 그는 피칠갑을 하여 거의 혈인(血人)이 된 군터를 보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군터가 말에서 내려서자 상관에게 하듯 깍듯이 군례를 취했다.
“귀공이 우리를 구했소.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그대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바요.”
“낯간지럽군. 과례를 거두시오.”
“과례가 아니오. 귀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오. 어쩌면 전멸에 가까운…….”
약간의 과장이 섞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기습적으로 도강한 수천 군세에게 옆구리를 찔렸다면 가뜩이나 혼란에 빠져 기세도 꺾여 있었던 본대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어쩌면 괴멸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보다, 이제 어찌 할 셈이오.”
“으음.”
사실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 뿐이었다. 반군이 도강을 성공시킨 이상, 답은 후퇴밖에 없었다. 단지 최고 지휘관으로서 크나큰 실책을 저지르고, 그 직후에 후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못내 어려운 것일 뿐.
군터는 그런 모디레스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았다. 하여 그는 모디레스가 하기 힘들어 하는 말을 대신 해주기로 했다.
“물러납시다.”
“…….”
“다른 수가 없지 않소? 열 배도 넘는 적을 상대로 정면으로 부딪쳐 뭘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물러날 밖에.”
모디레스의 답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창을 지팡이처럼 짚었다. 뒤편에서 살라스가 다가와 부축하려 했으나 손짓으로 물렸다.
‘물러나면 먼저 몸 상태부터 확인해봐야겠군.’
전장의 흥분은 마약과 같다. 전투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몸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피로, 고통, 등등. 하여 몸이 지쳐도 지친 줄을 모르고, 상처를 입어도 상한 줄을 모른다. 지금 뒤집어 쓴 이 흥건한 핏물 중에는 모르긴 몰라도 그의 피 역시 섞여 있을 터. 어쩌면 하루 정도는 된통 고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분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