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시콘 강의 전투 -->
체시콘 강의 대치가 시작된 지 닷새째가 되는 밤.
둥! 둥! 둥!
오늘도 어김없이 달밤의 북소리는 요란하게 울렸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은 별 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리고 욕을 내뱉는 정도가 전부였다.
둥! 둥! 둥!
“시끄러운 놈들. 오늘은 또 언제까지 두들기다가 가려나.”
강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된 병사는 반쯤 감긴 눈으로 강 건너를 주시했다. 며칠 째 피로가 야금야금 쌓이다보니 몸 전체가 노곤했지만 그 와중에도 본연의 임무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어떻게든 치켜뜨는데, 어둑한 건너편 강가에서 검은 점 같은 것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뭐지?’
그 순간 한참 동안 그를 괴롭히던 졸음도 달아나고,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이 머리카락이 주뼛 섰다. 병사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눈에 힘을 줬다.
검은 점들이 계속 강가로 나오는 듯싶더니 조금 더 커다란 점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본 병사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맹세컨대, 그가 살면서 내질러 본 가장 큰 소리였으리라.
“도강이다! 적이 도강을 한다아아아!”
*
적이 도강…한다아아아아……!
잠이 싹 달아나는 외침이었다. 군터는 잠자리를 박차고 막사를 달려 나왔다.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리저리 달려가고 있었다.
“도강이라고! 애 태우더니 이제야 오는군!”
상황 설명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어둑한 강의 반대쪽 끄트머리에서 물 위에 둥둥 뜬 형체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보였으니.
따로 부르기도 전에 군터 기병대의 병사들은 모두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미리 주지시켰던 대로 모두 활을 들고 있었다.
“좋아. 움직인다.”
강가에는 미리 흙이며 나무 판 같은 것으로 만들어 둔 고지대가 있었다. 적의 도강을 대비한 장치였다. 군터와 병사들은 그곳에 올라가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또 다른 고지대에 멜루니악의 궁병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다소 굼뜨기는 했지만, 저쪽도 늦지 않게 준비 완료다.
“방패병이 앞을 막고 있겠지. 곡사(曲射)다. 아까운 화살을 낭비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
어차피 이쪽도, 저쪽도 서로의 수는 뻔히 읽고 있을 터. 바보가 아니라면 도강 도중에 쏟아질 화살비에 대비하여 큼지막한 방패를 준비했을 것이다.
“명령하기 전에는 쏘지 마라.”
예전 군터 기병대의 병사들은 기병이지만 궁술에도 능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이 들어온 병사들은 활을 쏠 줄 모르는 이들이 다수였다. 지금 활을 잡고 있는 것은 70남짓. 나머지는 뒤에 떨어져서 말들을 붙들고 대기 중이었다.
“쏴라!”
멜루니악의 궁병들이 먼저 시위를 당겼다. 지휘관의 호령에 일제히 화살이 쏘아졌다. 하지만 태반 이상의 화살이 뗏목에 닿지도 못하고 강물에 빠져버렸다. 그나마 제대로 날아간 화살조차 뗏목 전면에 버티고 선 방패의 벽에 맥없이 막혔다.
군터는 혀를 끌끌 찼다. 지금 궁병들을 지휘하는 것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도 성급한 판단이었다.
“대장님.”
“아직이다. 기다려라.”
부하들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군터는 단호하게 대기를 명했다. 그 사이 멜루니악군이 다시 한 번 활을 들었다.
슈슈슝!
뗏목이 더 가까이까지 와서인지 그래도 방금 전보다는 많은 화살이 제대로 목표에 닿았다. 다만 이번에도 방패에 막힌 것은 변함없었다.
“지금! 쏴라!”
멜루니악군의 화살이 방패 벽에 두 번째로 틀어 막힌 직후, 군터는 신호를 내고 곧장 위로 활을 쏘았다. 하늘을 꿰뚫을 듯 치솟던 화살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뗏목 위로 뚝 떨어졌다. 뗏목 위의 거무튀튀한 형체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어디에 맞았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맞기는 맞은 것이다.
뒤따라 수십 발의 화살이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일부는 강물을 때렸고, 일부는 뗏목 위로 떨어졌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에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크게 흔들리던 뗏목 위의 반군이 부리나케 진형을 바꿨다. 전면에 방패로 벽을 세운 것은 여전했지만, 이번에는 머리 위쪽으로도 방패를 들었다.
그를 본 군터가 혀를 찼다. 생각보다 반응이 기민했다. 다만 대응을 했다고 해도 급히 꾸린 것이라 진형이 그리 두텁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쉬지 않고 쏜다.”
두드리다 보면 열리든, 깨지든 할 터. 군터의 신호가 떨어지자 병사들이 쉼 없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군터 역시 시위를 끝까지 당겨 직사(直射)와 곡사를 섞어 쏘았다. 멜루니악군에 이어 군터 기병대도 연사에 돌입하자 강 위의 뗏목들이 점점 위태롭게 흔들렸다.
“계속 쏴라! 쏴!”
뗏목의 움직임이 멈추자 멜루니악의 지휘관은 신이 났는지 연신 크게 외쳐댔다.
강 위에 떠 있는 뗏목의 수는 8개였다. 그 중에 조금이라도 앞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세 개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화살 세례에 밀린 것인지 제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싱겁군.’
몇 번째인지 모를 화살을 날렸다. 기계적으로 화살 통에 손을 가져갔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옆에 내려놓은 화살 통을 집어 드는데, 살라스가 다가와 말했다.
“뭐가 말이냐.”
“너무 쉽지 않습니까. 그나마 앞으로 나오던 세 개 뗏목도 멈춰 섰습니다.”
“앞으로 나온 놈들에게 공격을 집중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 아닌가.”
“뒤편의 뗏목도 멈춰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군터는 퍼뜩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살라스의 말처럼 뒤편의 뗏목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앞으로 튀어나온 뗏목들을 노리느라 상대적으로 공세가 옅어졌는데도 말이다.
“너무 소극적입니다. 도강을 하는데 이리 질질 끌어서 득이 되는 게 없습니다. 게다가 뗏목의 수도 적습니다. 저 위에 백 명씩 타고 있다고 해도 고작 700이 아닙니까.”
“그래서 뭐냐. 저 병력은 속임수라는 거냐?”
살라스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적진에서 또 다른 뗏목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다섯 개였다. 후발대가 등장하자마자 멈춰 있던 후열의 뗏목 4개도 다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네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이구나.”
군터가 빈 화살 통을 내던지며 말했다. 살라스도 말문이 막혔던지 다시 활을 들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들인 것 같긴 하다만, 그래봐야 오합지졸이다. 놈들이 어떤 잔꾀를 부리던,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야.”
있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활이 부러질 듯 거친 소리를 내며 휘었다. 활이 내는 비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화살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가장 앞으로 나오던 뗏목으로 향한 화살은 전면의 방패를 그대로 때리고 방패병을 뒤로 쓰러뜨렸다.
단단한 방진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리자 그곳에 화살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곧 쓰러졌던 방패병이 일어나며 막아서기는 했지만, 그 사이 뗏목은 앞으로 나오던 기세를 잃고 멈춰 서고 말았다.
“쏴라! 쉬지 말고 쏴라!”
가진 화살을 오늘 밤 모두 다 써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쉬지 않고 쏟아 부었다. 반군은 큼지막한 방패로 최대한 버티며 전진하고 있었지만 피해를 입지 않을 수는 없었다. 벌써 수십을 넘어, 어쩌면 백이 넘을지도 모르는 인원이 찬 강물에 굴러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반군은 계속해서 노를 저었고, 멜루니악군은 그를 저지하기 위해 화살을 퍼 부었다.
“화살이 부족하다!”
궁병들이 손이 터지도록 시위를 당기는 동안, 다른 병사들은 꾸준히 화살 통을 나르는 한편 곧 도달할 적을 상대하기 위해 진형을 갖췄다.
“마지막이다!”
세 번째 화살 통을 비운 군터는 즉시 쿠센에 올랐다. 병사들도 뒤따라 말에 올랐다. 그렇게 말 머리를 돌려 고지대를 내려가려 하던 그때.
피융-!
요란한 소리를 내는 효시가 쏘아져 올라갔다. 강 위의 뗏목에서 솟아오른 한 대의 화살은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약간의 불그스름한 빛을 냈다.
‘뭐지?’
아무 것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 한 대의 화살이 눈에 들어온 순간, 군터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타고난 본능과 이제껏 전장을 돌며 쌓은 경험이 내지르는 경고였다. 무언가 일이 틀어졌다는,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
“살라스!”
다만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어도 어떤 판단은 내려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 군터는 살라스를 부르짖었다. 그가 아는 가장 똑똑한, 이 상황에 답을 내어줄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부하를 찾은 것이다.
“이건…설마!”
그러나 살라스는 군터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불길함이 현실이 된 뒤였다.
와아아아아!
침략자들을 몰아내라!
베이고르를 위하여!
북쪽. 어두컴컴한 수풀 속에서 무수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각색의 복장을 하고서, 통일되지 않은 무기를 들고 끝도 없이 몰려나오는 이들. 어떻게 저곳에서, 저 많은 수가 나타날 수 있는가. 그런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군터는 급변해버린 전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애초에 눈앞의 도강은 미끼였습니다! 도강을 하는 척하며 아군의 주의를 끌고, 주력은 강 상류로 은밀히 이동시켜 그곳에서 강을 건넌…….”
“시끄럽다! 지금에 와서 그런 것을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군터는 속을 통째로 태워버릴 것처럼 들끓는 노기를 품고 어떻게든 냉정하게 상황을 보려 노력했다.
갑자기 강을 건너 나타난 적의 대병력에 아군은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지휘관들이 나서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진형을 맞추고 있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기세마저도 꺾여버린 상황.
“…돌파한다.”
“옛?”
“말은 필요 없다! 따르라!”
우격다짐으로 부하들을 이끌며 진지 한가운데를 주파하는 와중, 군터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병사들을 다잡는 모디레스를 발견했다.
“모디레스 대장! 우리가 시간을 끌 테니 병사들을 뒤로 물리시오!”
“뭣?! 군터 대장은……!”
“강에 머물러 있는 놈들까지 몰려오기 전에 속히 움직이시오!”
모디레스의 반응은 볼 틈이 없었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달린 쿠센 덕에 군터는 어느덧 진지를 벗어나 무수한 적을 눈앞에 두었다.
“수가 아무리 많아도 어차피 잡졸들이다! 간단하게 돌파하는 거다! 이랴!”
오른손에는 검창을 들었다. 왼손으로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두 다리는 쿠센의 등을 조였다.
“으아압!”
콰직!
어설프게 창을 들이밀던 적병의 머리통을 깨부수며, 군터는 있는 힘껏 기합을 내질렀다.
========== 작품 후기 ==========
우선은 즐겁게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 토요일(22일, 내일 모레)에 연참을 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어느 정도 베스트 상단 근처라도 올라가 봐야 글이 다수 독자분들에게 노출이 될 것 같아 계획했습니다.
얼마나 연참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자정부터 시작해 3시간-3시간 30분 마다 글을 올리려 합니다. 많은 독자분들의 성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