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시콘 강의 전투 -->
“와아아아!”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위압적으로 들리던 북소리가 갑자기 끊어지고, 기병대장이 고함을 지르는 상황으로 군터가 무언가를 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그들에게 유리한 ‘무언가’였다. 그것만으로도 함성을 지를 충분한 이유는 충분했다.
“군터 대장! 이게 무슨 일이오!”
모디레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군터는 활을 다시 안장에 걸며 태연히 답했다.
“적의 기세가 너무 등등하니 한 번 꺾어주었을 뿐이외다.”
“아니, 저러다 적이 분개하여 도강이라도 한다면 어찌 하려 하시오!”
“그럼 싸우면 되지, 뭘 걱정하시오. 어차피 적이 도강할 가능성도 생각해두었지 않소.”
“으음! 하지만 불필요하게 적을 자극할 필요까지는…….”
“적의 수에 아군이 너무 위축되어 있었소. 뭘 해보기도 전에 기가 꺾여서야 안 되지. 해서 한 번 나섰을 뿐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오.”
군터가 좋은 말로 달래자 모디레스도 더는 말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군터는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혀를 찼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굴을 몇 번이나 볼 일이 있었던 만큼, 군터는 그에 대해 이제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딱 보통의 사람이었다. 위험하거나, 위험할 것 같은 일은 최대한 피하고 되도록 안전하게 가려고 하는 유형의.
그래서 그는 작전회의를 할 때도 은연중에 전투를 피하는 쪽으로 일이 갔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내곤 했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충돌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피하기 위해서 너무 얌전해질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적의 기세가 너무 과할 정도로 올라오고, 아군이 그에 눌려있을 때는 풀어주는 게 옳지 않겠는가. 아군이 적을 두려워한다면 오히려 적이 아군을 우습게보고 강을 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전투는 전장에서 사는 맹수들의 것이다. 순한 양으로 있고 싶다면 어디 한가한 곳에서 풀이나 뜯고 놀면 된다. 양이 엄한 곳을 얼쩡대면 잡아먹히기 밖에 더 하겠는가.
“대장님의 활솜씨는 그야말로 신궁(神弓)이라 부를 만하군요.”
“아부는 관둬라.”
아무렇지 않은 듯 물리쳤지만 살라스의 말이 아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군터는 자신의 활솜씨에는 나름 자부심이 있는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확실히 도발은 된 것 같군요. 이것을 의도하셨습니까.”
“글쎄. 그랬을 것 같으냐?”
“…….”
살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군터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강 건너에 동요하던 반군이 서서히 분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요란한 고함소리와 함께 살벌한 적의가 치솟았다. 장교, 혹은 독전관들이 열심히 목을 혹사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반군은 기세와는 달리 곧장 도강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뒤로 물러나는 모양새였는데, 처음에는 강을 우회하려나 싶었지만 어느 정도 멀어지는 것 같다가 멈춰섰다.
그를 본 군터는 실소를 머금었다.
“겁은 어지간히도 많군.”
그들은 진을 치고 있었다. 혹시나 또 화살이라도 맞을까봐 걱정이라도 됐는지 화살이 절대 닿지 않을 멀찍한 곳에 막사를 펴는 것이다. 그 모양새가 상당히 우스웠다.
“뭐…어쨌든,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건가.”
조금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저렇게 본격적으로 진을 치는 것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으로 여겨도 좋을 듯싶었다.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는 또 다른 이유다.
*
“그 시건방진 놈의 목을 당장 베어 와야 하오!”
백발에 백수(白鬚)가 인상적인 노인이 잔뜩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여기저기서 그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반면, 상석에 가까운 이들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전하. 진정 도강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명이 상석에 앉은 화려한 의복의 사내에게 물었다.
망국 베이고르의 재건자. 한때 명맥이 끊긴 트라펠 왕가의 계승자. 마지막으로 반왕(反王).
모두 한 사람, 지금 상석에 앉은 사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치욕을 안긴 적을 앞에 두고 말머리를 돌리는 것은 왕이 할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소장이 나서겠사옵니다! 선봉에 세워주소서!”
사내의 단호한 대답에 열띤 호응이 일었다. 하지만 질문을 한 이를 비롯한 몇몇은 속으로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이런…결국 일전을 피할 수 없겠군.’
반발은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아직 군주의 면이 서야 할 시기다. 제대로 된 기반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신하를 자처하는 자가 군주의 위신을 깎아먹을 수는 없다. 가까스로 첫 걸음을 뗀 국가는 모든 것을 군주의 정통성과 위신에 기대고 있었다. 세작들을 통해 퍼뜨리고 있는 반왕이라는 별칭 또한 그를 위한 것. 큰 포석을 위해서는 왕의 행보에 다소 무리나 잘못된 점이 있다 해도 거슬러서는 안 된다.
“강의 폭이 너무 넓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강물도 차 도강을 시도하기에 쉽지가 않습니다.”
“허면? 도강을 포기하고 돌아가자는 말인가?”
왕의 기색이 좋지 않자 그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니옵니다. 다만 적이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도강을 시도했다가는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큰 피해를 보고 큰 피해를 입어야 할 터. 그러므로 도강은 신중하고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흐음. 야밤을 틈타자는 말인가?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예. 그것을 적들도 예상하고 있을 터이니 적의 신경을 흐릴 필요가 있사옵니다.”
“작전이 떠올랐나 보군.”
반왕, 주앙 칼 고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
둥! 둥! 둥!
와아아아아!
요란한 소리가 잠을 깨웠다. 군터는 막사에서 잠들어 있다가 즉각 창을 집어 들고 뛰쳐나갔다. 갑옷을 입은 채 누워 있었기에 다른 준비는 필요치 않았다.
“도강인가!”
그의 외침에 번을 서던 휘하 십인장이 급히 다가왔다.
“아직까지 도강의 전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강가까지 몰려나온 것은 확실합니다만…….”
강가까지는 나왔는데 도강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 말인즉 뗏목을 띄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온갖 소란은 다 떨어댄다?
“기만인 듯싶습니다.”
어느새 뛰쳐나온 살라스가 말했다.
“기만?”
“당장 도강할 듯 요란을 떨면서 아군을 혼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얻을 이득이 뭐가 있지?”
“하나는 일단 아군의 피로를 증대. 시킬 수 있겠지요. 또 경계도 무디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피로야 저쪽도 쌓일 것이고, 경계야 놈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굴던 꾸준히 튼튼하게 유지하면 될 일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대장님처럼 단단하지는 않습니다. 긴장감이라는 것은 같은 자극을 여러 번 주면 무뎌지게 되어 있지요.”
현재 상황에서 공격의 선택권은 반군이 쥐고 있다. 적의 공격 시기를 모르는 한 이런 수법에는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몇 번 당하다보면 자연히 긴장감도 누그러질 수밖에 없으니, 이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계책이었다. 그렇다고 진을 뒤로 물리자니, 적이 실제로 도강을 시도할 때 반응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짜증나게 구는군.”
군터는 잠시 후 모디레스의 부름을 받고 지휘관 회의에 참석했다.
그들은 반군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토의했고, 거기서 군터는 살라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러자 모디레스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놀란 눈으로, 의외라는 듯이 그를 보았다. 그들의 그런 시선에 군터는 조금 우쭐하기도 하고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 기만이라니…반군에도 머리 쓰는 자는 있다는 얘기군.”
“강 건너라고 해서 무작정 마음 놓을 일이 아닙니다. 적의 동태를 늘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심각하게 시작된 지휘관 회의는 싱겁게 끝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원론적인 말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폭이 넓은 체시콘 강은 반군에게도 벽이었지만 아군에게도 벽이었다.
*
둥! 둥! 둥!
시끄러운 북소리는 밤이면 밤마다 울려 퍼졌다. 벌써 사흘째였다. 이제는 저 소리를 들어도 아군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같이 들리지 않는다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해도, 잠이 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에는 병든 닭 마냥 선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들도 보였다.
점점 살라스의 말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익숙해져가고, 지쳐갔다. 잠을 편히 잘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고통이었다.
‘지루하고, 피곤한 싸움이군.’
머리로는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한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사고와는 반대로, 몸은 점점 지쳐가고 그만큼 경계심도 무뎌져갔다. 그는 아직 버틸 만했지만 병사들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색이 바래갔다. 가뜩이나 수도 적은데 이래서야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꺾이는 것이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강가에 앉아 북을 두드리고 싶었다. 저쪽도 하루 종일 깨어있는 것은 아닐 테니 잠자는 시간은 있을 터. 그렇다면 아예 하루 종일 북을 두드리면서 적에게도 똑같은 괴로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600명 조금 넘는 군대가 움직이며 전고를 가져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령 전고가 있어 강가에 앉아 신나게 두드린다 해도 강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반군에게 그 소리가 얼마나 전달될 지도 알 수 없다. 이래저래 강가 부근에 진을 친 아군만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꼭 상황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그만큼 시간도 착실하게 흐르고 있었다. 당초 목표로 했던 것이 반군의 발길을 붙드는 것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그들은 착실히 목적을 달성해나가고 있는 셈인 것이다.
‘무모한 놈은 없는 것 같지만, 결기 있는 놈도 없는 모양이군.’
군터는 강 건너의 쥐 죽은 듯 조용한 적진을 보며 혀를 찼다. 적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마 밤에 못 잔 잠이라도 청하고 있는 모양이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라!”
십인장들이 돌면서 피로한 병사들에게 잠을 자라 전하고 있었다. 편한 잠은 잘 수 없겠지만, 이렇게 쪽잠이라도 자야만 버틸 수 있었다.
“대장님께서도 조금 주무시는 것이……”
“나는 괜찮다. 병사들이나 푹 재워라.”
군터는 쿠센의 배에 기대어 누웠다. 그가 앉은 자리 옆에는 활과 화살 통이 놓여 있었다. 적이 조금이라도 강가 가까이에 온다면 곧장 쏴줄 셈이었다. 그는 첫날에 고수(鼓手)에게만 활을 쏘았던 것을 후회했다. 적이 이렇게 약삭빠르게 나올 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머리에 화살을 박아줬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푸르르.
쿠센도 야밤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곧 규칙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자장가라도 되었는지, 눈을 감고 있던 군터도 곧 잠들어버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전 챕터의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혼전-〉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