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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벨리사는 침울해 했다. 싸우는 일 없이 대치만 하러 가는 거라고(벨리사는 그 둘의 차이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씩이나 되풀이 하여 설명하고서야 그녀는 간신히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당장 가는 것도 아니야.”
“…알았어요.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하고픈 말이 많지만 꾹 눌러 참는 게 눈에 보였다.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칼에 찔리는 것처럼 아려왔다. 군터는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올 거라 약속하며 안아주는 것 외에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흘 뒤 출전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 군터는 간단한 아침 훈련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쉰 채 벨리사와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빨리 지나가, 사흘이 지났음에도 하루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다녀올게.”
“응. 다치지 말아요. 절대.”
“그래. 약속하지.”
무장을 마친 군터는 마지막으로 벨리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번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그는 간절히,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
“반갑소. 이번에 군을 이끌게 된 모디레스라 하오.”
“군터요.”
그론킨이 말했던 대로, 이번 반군의 견제 임무에 동원된 병력은 멜루니악군 오백에 군터 기병대를 포함해 육백이 조금 넘었다. 다만 멜루니악군이 전부 보병이었는지라 기병은 군터가 이끄는 백인대 뿐이었다.
‘말레이드군은 움직이지 않는군.’
교전은 최대한 피하고 견제에 주력하라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사실 말레이드군 까지는 필요 없다. 어쩌면 그들은 살마드 쪽으로 갈지도 모른다. 실질적인 힘은 그곳에 필요하니까.
‘무시당한 건가.’
조금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떤 이유가 있건, 어쨌거나 덜 중요한 전선에 배치되었다는 점은 사실이었으니.
다만 벨리사와 그녀의 뱃속에 머물고 있는 아이를 떠올리면서 치기어린 마음을 접었다. 공명심과 투쟁심은 어쩔 수 없는 본성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또 다시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되지 않겠는가. 수십의 부하들을 떠나보낸 얼마 전처럼 말이다.
군터는 기병대를 이끄는 기병대장으로서, 오백을 이끄는 모디레스에게 동급의 대접을 받았다. 그는 행군 중에도 군터와 필요한 이야기들을 종종 주고받았고, 그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닷새 전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적의 수는 대략 6천여. 닷새가 흘렀으니 어느 정도나 더 늘었을지는 모르겠소.”
이쪽은 600이 조금 넘는다. 닷새 동안 얼마나 수가 더 늘었을지는 모르나 최소 10배 이상은 된다고 봐야 할 터. 숫자만 놓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교전은커녕 견제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차이.
“수가 다는 아니오.”
병사의 수만 많다고 좋은 게 아니다. 병사들의 사기, 무장(武裝)의 질, 훈련의 정도, 병과의 구성 등 한 군대의 힘을 위한 조건은 무수히 많다.
“물론 그렇소만, 문제는 수가 불면 사기가 올라간다는 거요. 지금쯤 놈들은 이미 망해버린 나라가 다시 선 마냥 의기양양해 있지 않겠소?”
그제야 군터는 모디레스의 말뜻과, 그의 표정이 좋지 않은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머릿수가 늘면 사기가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감이 차게 되면 점차 대범한 일을 계획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놈들의 숫자가 만을 넘어가기라도 하면 정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오. 말레이드를 직접 치겠다고 나설지도 모르지.”
현재 말레이드에 주둔해 있는 군대가 3천 가량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적들이 최소한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알 테고, 그러면 정말 한 번 노릴 수도 있다.
“그리 되면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걱정할 바 아니오.”
말레이드군은 바크렌 최정예로 이름이 높다. 군터 역시 전에 그들의 실력을 직접 목격한 바가 있었다. 말레이드군 3천이 지키는 도시라면 1만이 아니라 2만의 병력이 들이쳐도 걱정이 없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오. 다만 말레이드군이 상대해야 하는 적이 그 반군 놈들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음?”
“지금 설치고 있는 것은 망국의 망령들만이 아니오. 무수한 사교도들과 도적놈들도 헤아릴 수 없이 들끓고 있지. 말레이드군은 바크렌의 최고 무력인데, 그런 그들이 초장부터 상처라도 입는다고 생각해 보시오. 놈들의 기세가 더욱 올라가지 않겠소?”
요컨대 상징성이라는 거다. 말레이드군은 그들이 지닌 실질 무력도 무력이지만, 바크렌 최고의 강군이라는 이름값이 있었다. 그 이름값이야말로 불순한 이들을 억압하는 무형적인 힘인데, 자칫 그 상징성이 위협이라도 받는다면?
“그런 골치 아픈 가정은 관둡시다. 칼은 뽑아서 쓸 때만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소? 정 말레이드군이 상할까 걱정이라면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봐주면 될 것이고.”
“그 무슨 소리요. 우리의 목적은 놈들을 견제해 발을 묶어두는 것이오. 그를 잊어서는 안 되오.”
“알고 있소. 허나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지.”
“…….”
모디레스는 살짝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군터는 묵묵히 쿠센 위에 앉아 편안한 얼굴을 했다. 표정만 보면 전장이 아니라 어디 놀러가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바로 그 태연자약한 얼굴이 모디레스의 불안감을 더 자극했다.
*
일단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반군의 이동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들은 작은 마을과 성 등을 돌면서 끊임없이 회유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저항하는 병력이나 일반 백성들을 짓밟고 있었다. 반군의 규모가 너무 크다보니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통해 착실히 발이 묶이고 있었다.
“세는 없는 것도 빼앗아 다 받아먹었으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제 역할도 하지 못하는군.”
부하들과 모인 자리에서 군터는 오늘 올라온 두 개 마을의 전소 소식을 듣고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은근히 살벌한 기세에 휘하 십인장들은 입도 뻥끗 못했다. 그나마 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부대장인 살라스가 유일했다.
살라스는 군터를 달래거나, 그의 말에 토를 다는 대신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는 편을 택했다. 실은 그 역시 지방 정부의 무능한 행태에 불만이 쌓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같이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장이 감정적이라면 그를 받치는 부하는 이성적이어야 하므로.
“어찌 되었든, 거의 다 따라잡았습니다. 이대로라면 당초 계획했던 대로 체시콘 강을 건너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군이 계속해서 북동쪽으로 이동하려면 필연적으로 체시콘 강을 건너야만 했다. 강을 피해 빙 돌아가는 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려면 너무 멀리 돌아야 하는 데다 그 동안에는 보급을 충당할 마을이나 도시 같은 곳도 없었으므로 감수해야할 제약 사항이 너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반군은 필히 체시콘 강을 건너려 할 터. 하지만 그러기 전에 미리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있는다면? 반군의 수가 얼마로 불었든 도강을 하기가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작전은 멜루니악에서 입안된 것 중 하나였고,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 반군의 동태를 보고로 들으며 확정한 것이었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반군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돌아가거나, 다소간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도강을 감행하거나.
“너라면 어찌 하겠느냐?”
지도에 시선을 둔 채, 군터가 살라스에게 물었다.
“적의 규모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저라면 돌아갈 것 같습니다.”
도강을 하지 않고 우회하게 되면 적어도 보름 이상의 시일을 지체하게 된다. 그 사이 소모하게 될 물자라던가, 강 건너의 마을을 돌며 얻게 될 여러 자원들까지 더하면 결코 가볍지 않은 손해다.
“어느 것이 낫다고 여겨 돌아갈 것 같다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어느 것이 더 나은지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저라면 강을 건너 손해가 있을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강을 우회하는 편을 택할 것 같습니다.”
“성향의 문제라는 건가?”
“예.”
일군을 이끌면서 성향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는 왕왕 있는 일이었다. 명확하게 어느 것이 더 낫다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지휘관의 재량대로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이며, 심한 경우에는 어찌 움직이는 것이 더 이득일지 명확히 판단이 서는데도 지휘관의 독선이 작용하는 일도 꽤 있었다. 이 독선이라는 것이 결국 지휘관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즉, 성향이다.
당장 지금의 경우만 봐도, 살라스는 강을 우회할 것이라 했다. 하지만 군터는 자신이 반군의 지휘관이라면 별 고민 없이 도강을 택할 거라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적, 그것도 아군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적이 무서워 말머리를 돌린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임무 완수고, 만약 도강을 한다면?”
“교전이 일어나겠지요. 다만 보고 받은 바에 따르면 적에게 기병이 거의 없다 하였으니 어느 정도 전투를 벌이다 퇴각하게 되겠지요.”
현재 반군은 그야말로 오합지졸, 어중이떠중이였다. 병력의 대다수가 본래 농기를 들거나 양을 치던 무지렁이 백성 출신이었고 당연히 훈련받은 기병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진정 망국의 잔당이라 할 수 있는 이들 가운데 몇몇 정도가 기병의 전부라 할 수 있을 터. 기동력은 걱정할 바가 없으므로, 치고 빠지기를 하기에 딱 좋은 상대다.
“얼마 전에도 눈이 내렸지. 하지만 강이 얼기에는 아직 이르다.”
“뗏목을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뗏목으로 얼마나 나를 수 있겠나? 기껏해야 한 번에 수백 정도겠지.”
물론 준비를 많이 한다면야 한 번에 천 이상이 옮겨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봐야 걱정할 바는 없다. 오기 전에 화살비를 듬뿍 먹여줄 테고, 건너 와서는 오느라 수고한 놈들을 창칼로 반가이 맞아줄 테니.
“수는 놈들이 내겠지요. 우리는 놈들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걱정할 바는 아니란 말이군.”
군터가 클클 웃으며 지도에서 시선을 뗐다.
*
둥! 둥! 둥!
요란한 북소리가 강 건너편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썩 물러나라는 듯 외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미쳤다고 물러나겠는가. 강 건너에서 열심히 땀 흘리는 고수에게는 안타깝게도, 횡으로 길게 늘어선 군대는 꿈쩍도 하지 않고 건너편의 반군을 주시했다.
“그러니까…저쪽에 한 나라의 왕이 계시다는 거군.”
한 눈에 들어왔다. 통일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전형이라 할 만한 군대다. 하지만 그 사기만큼은 겉으로 보기에도 꽤나 높아 보였다. 이쪽에 비해 월등한 자신들의 수를 믿고 있는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가 7천 이상이라고 했건만, 저건 만 정도는 되어 보이는군요. 아니, 그보다는 조금 안 되는가…….”
살라스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와는 달리 강 건너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군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만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적어 보이고, 7천 가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였다. 만에서 가까운, 그 중간 어딘가 정도다.
둥! 둥! 둥!
“생전 처음 보는 높으신 분인데, 인사 정도는 해야 예의겠지.”
“옛?”
군터는 안장에 걸어두었던 활을 들었다. 살라스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짓는 와중에 화살이 시위에 걸렸다. 그리고 그 뒤, 걸린 화살이 사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린 순간, 시끄럽던 북소리가 뚝 끊겼다. 반군 무리에 소요가 이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멀쩡히 씩씩하게 북을 쳐대던 고수의 머리에 화살이 꽂혔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되도 않는 장난은 집어치우고, 물러날 것인지 일전을 벌일 것인지나 속히 결정하라!”
군터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시끄럽던 군중에 한 순간 거짓말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분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