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86화 (86/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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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딜 페레모어의 앞에서 다시 한 번 보고한 이후, 군터는 조만간 전장에 투입될 것을 직감했다. 그가 마지막에 던진 의미심장한 말 때문이 아니라, 그날 이후부터 멜루니악의 달라진 공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무언가 일이 터지기 직전의, 한껏 달아오른 열기. 병사들과 전령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야 전부터 그랬지만 무언가 달라졌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라메인 백인대와 볼리드 백인대의 병사들은 어찌 하기로 했지?”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들도 생판 모르는 부대로 들어가느니 함께 싸운 우리 쪽에 붙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예상했던 바고, 기대했던 바였다. 보통 때라면 이렇게 마음대로 부대끼리 재편, 병합작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부대장을 잃고 그 위의 상관마저 잃어버린 그들은 어차피 어디로든 편입이 되어야 했다. 어차피 그들 모두는 현재 멜루니악에 묶이다시피 한 몸이니 자발적으로 뭉치겠다고 하면 그론킨도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 하게. 인원 초과이기는 하지만 기병대고 하니…….”

역시나 그론킨은 선선히 허락해주었다. 새로이 재편된 군터 백인대는 이제 총원 127명의, 백인대 규모를 살짝 초과한 덩치 큰 부대가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같은 식구다. 서로 거리를 두는 일이 없게 잘 어우러지기 바란다.”

군터는 십인장들도 부대의 인원에 맞게 더 뽑았다. 그로 인해 가장 신난 것은 할렌이었다. 이름뿐인 십인장에서 드디어 부하들이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출전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모두 마음을 놓지 말도록.”

새로운 부하들과 훈련을 같이 하는 한편, 군터는 그론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신생 군터 백인대는 군마부터 시작해 무구들까지 부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장에 대장인 군터조차도 자신의 군마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론킨은 이번에도 요청을 받자마자 즉시 충분한 지원을 해주었다. 부하들에게 보급품이 돌아갔고, 군터도 큼지막한 흑마를 얻었다. 전장에서 달린 경험도 없는 젊은 군마였다. 군터는 녀석에게 쿠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초원어로 바위라는 뜻이었다. 몸이 크고 튼튼해 뵈는 흑마가 커다란 바위 같은 느낌을 주어 그리 이름 지었다

“오랫동안 함께 달릴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군터는 그의 손으로 직접 숨을 끊었던 모커스가 떠올라 기분이 울적해졌다. 덩치만큼이나 기가 세 보이는 쿠센은 그가 콧잔등을 쓰다듬는 동안 큼지막한 눈을 끔뻑거리며 순한 양처럼 가만히 있었다.

*

부대의 인원이 백 명을 훌쩍 넘기면서, 군터는 부대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본래 백인대는 대장 밑에 부대장을 두기도 하고, 두지 않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백인장의 재량이었다. 다만 부대장을 두지 않는다 해도 그런 역할을 하는 이는 언제나 있었다. 소위 십인장 중에 선임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데, 기존의 군터 백인대에서는 프레드릭이 그런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 프레드릭은 없고, 본래 다른 부대였던 병사들이 대거 합류해 부대원의 수가 더욱 늘어났으니 군터를 도와, 혹은 그를 대신해 부대를 통솔할 사람이 필요해졌다.

“살라스를 부대장으로 임명하겠다.”

군터는 새로이 볼리드 백인대에서 합류한 나이 많은 십인장과 살라스를 두고 고민했다. 살라스는 십인장으로서도 어린 축에 드는데(사실 할렌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젊었다) 부대장을 시키기에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이 순으로 자리에 앉아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장인 그부터 나이가 어리다보니 부대장은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쪽으로 두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었다.

하지만 결국 고심 끝에 선택한 쪽은 살라스였다. 나이 운운하기 전에, 살라스는 실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부하였다. 물론 어리다는 점 때문에 처음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나, 군터는 살라스가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믿음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살라스는 드물게 상기된 얼굴로 군례를 취했다.

반대하거나, 다른 소리를 내는 이들은 없었다. 속으로야 어떨지 몰라도 군터가 있는 앞에서 겉으로는 모두 수긍했다.

군터는 부대를 정비하는 한편, 벨리사에게도 신경을 쏟았다. 그녀는 이제 완연히 배가 나왔다. 몸이 무거워져 움직이는 데도 조심스러워졌다. 유리아와 루시가 그녀의 옆에서 수발을 들었지만 군터는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별 일이 없으면 항시 그녀의 곁에 붙어있었다.

“집 밖에 나가고 싶어요.”

“바깥에? 누워 있는 편이…….”

“어제도 종일 가만히 있었는데요?”“알았어. 준비하지. 조금만 기다려.”

군터는 곧 외출 준비를 하고 벨리사와 함께 집(숙소)을 나섰다. 유리아와 루시가 그림자처럼 벨리사에게 붙은 것은 당연했다.

“몇 명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됐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이냐.”

살라스가 병사 몇을 데리고 갈 것을 권했으나 군터는 거부했다. 벨리사는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여러 사람이 수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예전 노예였던 시절의 삶이 그녀의 일부로 남아 있었기에 그녀는 대접 받는 것을 어려워했다. 유리아와 루시도 익숙해지기 전에는 얼마나 부담스러워 했던가.

“예전 생각나네요.”

이곳저곳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들이 들어올 때마다 불안해하던 시민들은 아란딜 페레모어가 도시에 당도하고서부터 안정을 찾았다. 덕분에 지금 시가지는 제법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예전?”

“살마드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요. 당신이 제게 야시장 구경을 시켜줬었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때 그녀는 이름을 알려주는 대가로 야시장을 구경시켜 달라 했었다. 만약 이름 따위 안 듣고 말겠다며 그 부탁을 거절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당신, 그때부터 나한테 반했었죠?”

“응?”

“그렇잖아요. 이름 같은 걸 들어서 뭐하겠다고 시간과 돈을 들이겠어요?”

“…….”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는 그녀는 어서 답하라는 듯 그를 올려 보았다. 난처해진 군터가 슬쩍 시선을 피했지만 그녀는 얼른 답하라며 재촉했다. 여기서 계속 입을 닫고 있다가는 토라질 것 같았기에, 군터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뗐다.

“…그랬지.”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자그마한 목소리. 벨리사가 예의 그 장난스런 미소를 더 짙게 그렸다.

“응? 뭐라고요?”

그녀는 그의 말을 들었음에 분명했다. 그런데도 더 크게 말해달라는 듯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군터는 그녀의 짓궂음에 순간 심술이 나, 손을 뒤로 가져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꺅! 뭐에요?!”

“당신이 짓궂은 장난을 치니까. 나도 한 번 해준 것뿐이야.”

“정말…한 번 더 말해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아이가 당신을 지켜준 거야.”

“에?”

“아이만 아니었어도 훨씬 더 부끄럽게 만들어줬을 테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소를 터뜨린 그들은 다시 서로의 손을 꼭 붙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살마드의 야시장에 가보고 싶어요.”

“왜 안 되겠어? 가면 되지. 그때는 아이까지 셋이겠군.”

“그렇겠네요. 셋이겠네. 후후.”

벨리사의 눈빛이 슬쩍 흐려졌다. 수 년 전, 화려하고 시끄러웠던 살마드의 밤거리를 떠올리는 듯했다. 군터는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으려, 바람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뒤로 넘겨주었다.

*

“백방으로 알아봤네만 막시밀리언 천인장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네.”

“그렇습니까.”

정말 백방으로 찾아봤을까? 찾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다행이다. 군터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그론킨에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 자체를 안 했기 때문이다.

“더 알아보려 해도,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은 도처에서 일어나는 변란 때문에 사람을 쓰기가 어려운 상황일세. 당분간은 멜루니악에 머무는 것이 어떤가. 내 밑에서 싸우는 동안 자네가 세우는 공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챙겨주겠네.”

“마음 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럼 한동안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신세라니. 이름난 오테론의 기병대가 힘을 보태준다니 참 든든하구만.”

빚쟁이에게 묶인 채무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장 멜루니악에, 그론킨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공적을 확실히 챙겨주기를 바랄 밖에.

“당장 임무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네. 하지만…음. 그러고 보니 자네는 아직 작전에 대해 모르겠군.”

“작전이라면?”

“위굴에서 반란군이 봉기한 일은 알고 있을 테지?”

“예.”

“그들은 점차 몸집을 불리며 북상하고 있다네. 정확히는 북동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야.”

그론킨이 보고 있는 지도 쪽으로 눈이 갔다. 위굴에서 북동쪽이라면…….

“말레이드를 노리는 것입니까?”

“글쎄. 일단은 아닐 거라고 보고 있네. 아무튼, 우리는 놈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미리 전선을 형성할 걸세. 이곳 멜루니악과 돔피레라부터 시작하여 말레이드까지 이어지는 전선이지.”

남서쪽에서부터 북동쪽으로 사선을 그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그 사선의 북쪽으로 해당되지 않는 도시와 성들이 여럿 있었다.

“시민들의 소개 작업이 이루어질 거네.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의 이름으로 명이 갔으니 며칠 후부터 시작 되겠지. 그를 위해 반군의 시선을 끌 필요가 있어. 아마 조만간에 이곳에서 병력이 출발할 게야.”

“그렇다면 저희는 그때 움직이게 되겠군요.”

“교전은 필요 없네. 단지 놈들의 시선을 붙들고만 있으면 돼. 놈들의 진군 속도도 늦추면서 시민들이 피할 시간도 벌게 되니 일거양득이지.”

“저희 단독으로 움직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적어도 오백에서 천 정도는 움직이리라 보고 있네.”

“알겠습니다. 그리 알고 있지요.”

즉각 움직이지는 않지만, 대기 명령이 내린 셈이다. 전장에 나간다는 생각에 들뜨면서도 한편으로는 벨리사를 또 어찌 달래야 하나 싶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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