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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5화 (85/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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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는 그론킨의 호출을 받았다.

왜 부르는 것인지는 짐작이 갔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휘하 병력과 함께 도시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이 부름은 필시 그의 앞에서 이제껏 서너 번은 반복했던 이야기를 또 시키기 위함일 터.

하지만 귀찮지는 않았다. 소문으로 귀가 따갑게 들었던 그 흑포 장군을 대면할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과연 그가 어떤 자일지, 소문만큼 대단한 자일지 기대가 되었다.

“왔군. 인사 올리게.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이시네.”

“장군을 뵙습니다.”

그론킨은 평소 앉아 있던 상석이 아니라 그 오른쪽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석에는 아란딜 페레모어로 보이는 사내가 자리했고, 그 앞으로는 그론킨과 다섯 사내가 주르륵 위치해 있었다. 하나 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 뿐이었는데, 말레이드의 천인장들로 보였다.

“사령관이 대충 이야기는 해주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싶어서 말이네.”

예상했던 바라, 군터는 첫날 그론킨에게 보고했던 그대로 진술했다. 중간 중간에 물음이 있으면 그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상세히 답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무거운 공기였다. 말레이드의 천인장들이 던지는 시선은 하나하나가 칼날 같이 날카로웠다. 정작 아란딜 페레모어는 간간이 눈을 감기도 하는 둥, 이따금씩 질문을 할 때를 제외하면 있는 듯 없는 듯 했다.

“…그렇군.”

군터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도 아란딜 페레모어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이상입니다” 라는 말이 떨어지고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군터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군터가 처음 집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 표정 변화 하나 없었고, 눈빛은 지극히 무미건조해 마치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휘하 천인장들처럼 날카롭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신경이 쓰였다.

기를 죽이려는 듯이 쳐다보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당당히 고개를 세우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데 아란딜 페레모어는 달랐다. 마치 벌거벗겨진 느낌이었다. 그의 건조한 눈빛이,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아는 자의 여유처럼 보였다. 군터는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아주 묘하고,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훌륭하군.”

“…예?”

느닷없는 한 마디에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실책을 깨닫고 입술을 씹었지만 아란딜 페레모어는 개의치 않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부하라는 놈들이 하나 같이 심술이 많아. 어지간한 사내였다면 간담이 쪼그라들 법도 한데, 자네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군. 외관도 그렇지만, 안에 자리한 기개도 범상치 않은가 보군.”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들렸다.

“기개만큼의 실력도 있는지 궁금하군. 곧 확인할 날이 있겠는가?”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부정은 안 하는군.”

피식 웃은 그가 물러가라 손짓했다. 수고했다는 말은 덤이었다. 군터는 깍듯이 군례를 취하고 숨 막혔던 집무실을 나섰다.

*

“재미있는 친구군.”

“기도(氣度)를 보면 무명(無名)이라는 것이 의아할 정도입니다.”

군터가 떠나고 이어진 대화에 그론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감탄한 것 같은 천인장들의 얼굴도, 그에 동조하듯 피식 웃는 아란딜 페레모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녀석이 그리 대단해 보였던가?’

물론 범상치 않다는 것은 그도 알아보았다. 남다른 체구도 체구거니와, 은연중에 풍기는 위협적인 기세는 한참 윗사람인 그조차 말을 조심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봐야 필부(匹夫) 아닌가. 그는 제국의 장군이 수하들과 일개 백인장을 논하는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하시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그렇습니다. 고작 백인장 아닙니까.”

“군인이 아니라, 무인(武人)끼리만 통하는 것이 있소. 지위나 신분의 고하, 성품, 모든 것을 다 떠나 이끌리는 바가 있지.”

여기까지 말했음에도 그론킨이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그가 무인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아란딜 페레모어는 순진한 군인에게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도 끼어들 수 있는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초원의 대군이 살마드로 향하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군.”

그가 운을 떼니 휘하 천인장들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살마드의 성벽이 굳건하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 장담은 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듣자하니 정체 모를 술법의 힘까지 지녔다 하는데, 또 숨겨놓은 수가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그 중에 공성전에서 힘을 발휘할 만한 무언가라도 있다면…….”

“하지만 즉각 구원을 가기에는 도처에 산재한 문제가 크지 않은가. 특히 반군의 기세가 매서워. 벌써 그 수가 수천을 헤아린다고 하네.”

“어차피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 아니겠나. 그 정도는 각 도시와 성에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이야.”

“아니, 아니. 확언할 수는 없지. 그러다가 몇 도시가 넘어가기라도 하면 반군은 더욱 기세를 타고 몸집을 불릴 게야. 벽지의 백성들은 아직 망국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네. 반군이 기세를 탄 채 선동한다면 휩쓸릴 가능성이 높아.”“허면 살마드를 놔둔 채 반군부터 소탕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살마드가 함락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바크렌 전체가 흔들리게 될 걸세!”

토의는 삽시간에 논쟁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점잖은 이도 있었고, 괄괄한 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군인이면서 무인이었다. 어느 정도의 호전성은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이들이 중대한 사안을 두고 입 싸움을 벌이니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란딜 페레모어는 그런 그들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다가, 문득 홀로 논쟁에 끼지 않은 채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로탄. 자네는 아무 말도 않는군.”

“저희끼리 암만 입 아프게 떠들어봐야 모두 헛일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장군께서 가장 옳은 방도를 정하실 것이고, 저희는 거기에 따를 테니까 말입니다.”

“호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년에 거친 경험의 산물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좋지 않아. 나 역시 일개 인간일 뿐이라, 놓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거든. 자네들이 하는 천 마디 말 중 구백구십구가 쓸모없어도, 한 가지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깨닫게 해줄 수도 있네.”

“송구합니다.”

“자네가 머리 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아. 하지만 쓰지 않는 것과 쓸 줄 모르는 것은 다르다네.”

그는 강맹하기만 한 부하를 가벼이 나무랐다. 하지만 이미 논쟁의 열기는 식은 후였다. 부하들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었고, 그들이 구하지 못한 답을 요구했다. 조금 더 여러 소리들을 듣고 싶었던 그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이미 식어버린 불을 다시 지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느긋하게 그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3만 이상의 기병은 우리가 상대하기 힘든 대적이다. 지금 그들을 쫓아 살마드로 향한다고 해도 끝내 이겨내기는 힘들겠지.”

“병력을 모아 간다면…….”

“그랬다가는 반군에게 말레이드를 제외한 살마드 이북이 고스란히 넘어갈 걸세.”

빼낼 수 있는 것은 지금 그가 이끌고 있는 오천 병력이 전부다. 멜루니악만 해도 당장 도처에서 반군과 사교의 무리들이 득시글거리기에 따로 병력을 내기는 힘들었다. 지금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그론킨의 얼굴이 그를 증명한다.

“내 생각에, 반군의 무리는 초원의 야만인들과 선이 닿아 있네.”

“예?”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야만인들이 곧장 살마드로 진격한 무모함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뒤에서 반군이 시끄럽게 굴어주면 부담이 적어지니까, 온전히 살마드 공략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망국의 ‘유일한 직계 혈족’이 깃발을 들어 올렸다고 하나, 그 방계 왕족이 정말 왕족인지도 불분명했다. 바크렌에 제국의 깃발이 들어선 지가 벌써 백 년이 다 되어가는 판국에 그런 것을 어찌 분간하겠는가. 방법도 없고, 또 의미도 없다. 단지 그런 명분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중요할 뿐.

한 나라의 기득권이라고 하는 이들이 얼마나 뿌리가 깊겠는가. 색출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다 캐내지 못한 잡초 같은 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터. 그들을 뭉치게 할 구심이 생긴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만약 다른 때에 지금처럼 일어섰다면 즉각 말발굽에 밟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지금은 너무도 시기가 절묘했다. 당장 살마드로 3만이 넘는 대군이 들이치고 있는 상황에, 그들에게만 전념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양동이라면 양동이지. 우연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계획적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들은 서로에게 동조하여 움직일 테니까.”

살마드로 지원을 가면 반군이 활개 칠 것이다.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움직이면 살마드가 위험하다.

이는 굉장히 어려운 싸움이다.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기에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군은 위굴에서부터 북동으로 움직이고 있다. 초원을 등지는 움직임은 살마드와 거리를 벌리려는 수작이다.”

이는 일견 스스로 미끼가 되려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반대로 안전을 도모하는 방도이기도 했다. 만일에 그들이 반군을 토벌하러 움직일 경우 살마드와의 거리가 더 벌어지게 되므로, 한 번 움직이는데 큰 부담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결코 살마드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움직임은 안전의 도모를 위한 방편이 된다.

“어차피 살마드를 구원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 반군을 놔둘 수도 없지. 따라서 우리는 당장의 반군 진압은 포기하되, 견제를 하도록 한다.”

“견제라시면?”

아란딜 페레모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칼집 끝으로 탁자 위에 있는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천인장들의 얼굴은 굳어갔고, 그론킨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다 마침내 그의 말이 끝났을 때, 그론킨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살마드 이북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장군!”

그론킨이 대놓고 반박하자 천인장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하지만 정작 그의 일갈을 들은 당사자인 아란딜 페레모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칼집을 다시 허리춤에 가져갔다.

“늦었소. 사령관.”

“…예?”

“바크렌 북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전란의 한복판까지 들어왔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받아들이느냐, 지금 결단을 내리느냐 정도요.”

그의 말은 더 이상의 이견을 허락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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