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주 -->
군터와 병사들이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 멜루니악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령들이 드나들었다. 각지에서 경쟁하듯 연달아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조리 비관적인 것투성이였다.
“위굴이 반군들에게 점령당했다는 보고입니다!”
“보고! 2천에 달하는 사교도 무리가 주칸솔에서 발호했다 합니다!”
“제카오리에서…….”
그론킨은 기어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희고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오늘을 포함해, 요 며칠이 그에게는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엉망이군. 엉망이야.”
오테론의 함락을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처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망국의 재건을 외치는 반군들에, 사신(邪神)을 섬기는 사교도(邪敎徒)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외에도 별 잡스런 도적들이 이곳저곳에서 사고를 치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일어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찌 대응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그런 보고들을 접하고 있노라면 그저 흰머리와 주름, 한숨만 늘어났다.
“보고!”
또 한 명의, 먼 길을 급히 달려온 티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전령이 들이닥치자 그론킨은 아예 눈을 질끈 감고 긴 탄식을 흘렸다.
*
군터는 벨리사와 함께 사용하는 별채에서 휘하 십인장들과 만나고 있었다.
“심상치가 않습니다. 오늘도 세 군데에서 전령이 왔다더군요.”
평소 붙임성이 좋은 부하 한 명이 처음 운을 뗐다. 그는 벌써 멜루니악의 병사들과 어느 정도 안면을 튼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이리저리 주워듣는 말들이 많았다.
“반란군에다 사교도, 온갖 잡스런 도적놈들까지 들고 일어서니 살마드 이북 지역은 난리도 아니라고 합니다.”
“허, 참. 반란군이라니. 몇 십 년 전의 망령이 이제야 들고 일어선단 말인가? 어이가 없군.”
군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반란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반란군인가 싶었는데, 망국의 재건을 외치고 있다는 소리에 사태의 심각성보다도 우습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사실 그는 거의 100년 전에 멸망해버린 그 나라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그런 나라를 다시 세우겠답시고 들고 일어났다? 코웃음만 나올 밖에.
“미친놈들이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 어디 숨어 살던 망국의 귀족이나, 먼 방계의 왕족 쯤 되겠지요. 찍소리도 못하고 숨어 살다가 이번에 북부가 좀 시끄러우니 이때다 싶어 발호한 게 아니겠습니까.”
한 번 모든 걸 가졌던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나라가 망하면서 한 순간에 추레한 도망자가 되어버렸으니 그 한이 얼마나 사무쳤을까. 이미 그 당시 패망을 겪은 세대는 땅에 묻혔겠지만, 후대가 유지를 이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잠잠했던 것이 더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일 것이다.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살라스가 입을 열었다.
“음?”
“우리야 비웃고 있지만, 그들로서는 목숨을 걸고 깃발을 올린 것입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승산을 보았기에 감행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보들이라는 거 아닌가. 수십 년 동안 잠자코 있었으면서 이렇게 그르쳤으니까 말이야.”
“글쎄요. 수십 년을 암약하면서 때를 기다린 이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가벼이 볼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생각이 깊은 것이 아닌가? 고작해야 관의 눈을 피해 숨어살던 놈들인데, 수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그렇다면 좋겠지만…….”
살라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다지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군터는 살라스가 너무 생각이 깊다는 말에 동의했다. 수십 년, 거의 100년 전에 망해서 달아난 놈들이 저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그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마지막 욕심을 끝내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소식은?”
“다른 이야기는 특별히 들은 바가 없습니다.”
막시밀리언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나 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론킨에게도 이미 부탁을 해놨지만 그의 태도로 보아 적극적으로 알아봐 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최대한 이곳저곳에 귀를 열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들려온 소식은 전무했다.
“부상자들은?”
“심각한 녀석들은 없습니다. 이제는 모두 어느 정도는 거동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유일하게 다행스러운 소식이다.
“멀쩡한 놈들은 몸이 굳지 않도록 훈련을 쉬지 않도록.”
“예. 저…그렇지만 대장님. 저희가 투입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모르지.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지면 손 하나가 아쉬울 테니, 가능성은 있지 않겠나. 왜? 다시 전장에 나가기가 두려운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싹 굳은 부하를 지그시 쳐다본 군터는 다른 부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부하들 중에 겁쟁이가 없음을 알고 있다. 매일 무기에 기름칠을 해두고, 말들을 잘 돌봐라. 알겠느냐?”
“옛!”
군터의 나직한 호령으로 회의가 끝났다. 십인장들은 별채를 나오며 조금 전 군터의 말에 대해 뜨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상처가 쑤시는군.”
“목이 졸리는 느낌이야.”
언제든지 전장에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군터의 말은 그들에게 심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두려워서라기보다는(물론 그런 이유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지친 탓이 컸다. 그들은 몸에 남은 부상도 부상이지만, 심적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 피로는 며칠 쉬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냥 말씀드릴 것을 그랬나…….”
“아서게나. 그랬으면 괜히 꾸중만 들었을 것이야.”
“당장 내일이라도 출전 명령이 떨어질 것 같아 두렵군.”
“멜루니악의 사령관이 요청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나. 지금 우리가 이리 편히 지내는 것도 다 그의 배려니까.”
“흥! 쓰기 위해서 대우해주는 게지.”
“그러니까 말이네. 받은 게 있으니 거절할 수는 없지. 다만 대장님께서 요청도 없는데 자청해서 나서겠다고 하실까 그게 두렵군.”
“에잉? 설마 그러시려고?”
“모르는 일이야. 요즘 대장님이 어떠신지 잘 알지 않나. 난 대장님 앞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버린다네.”
이전에는 군터의 말에 이따금씩 반론 같은 것이 나오곤 했었다. 주로 프레드릭의 몫이었지만, 다른 십인장들도 이따금씩은 군터와 다른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것을 꿈도 꿀 수 없었다. 군터의 앞에 있으면 몸이 굳었고,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혀마저 굳는 느낌이었다. 그의 말에 토를 단다는 것은 어지간한 마음으로는 감히 시도도 할 수 없었다.
군터가 특별히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고, 부하들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그가 한 마디를 하면 누구도 거기에 거스르거나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살라스. 자네는 어떤가?”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제게 의견을 물으실 때만 답해드릴 뿐, 그 외에는 저도 입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달갑지 않은 역할이 돌아올 것 같자 살라스는 냉큼 선수를 쳤다. 그러자 다른 십인장들이 잔뜩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들은 살라스를 통해 휴식을 이야기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마님께 말씀드려보는 것은 어떤가? 마님의 말이라면 대장님께서도 껌뻑 죽지 않으시는가?”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그랬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그때는 단순히 꾸중을 듣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네.”
“들키지 않게 하면 되지. 이보게, 할렌. 자네 모친이 마님을 모시고 있지 않나?”
“예? 예. 그렇습니다.”
신참답게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할렌은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자네 모친을 통해 이야기를 좀 흘려줄 수 없겠나? 대장님께서 온통 전장에 나갈 생각뿐이시라고 말이야.”
“어…그게…….”
할렌은 난처해했다. 하기 싫다는 티가 표정에서부터 묻어났다. 하지만 같은 직급이라 해도, 신참으로서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선배가 한 명도 아니고, 거의 모두라면 더더욱.
“예. 한 번 어머니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결국 할렌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할렌의 부탁을 받은 유리아는 넌지시 벨리사에게 이야기를 흘렸다. 그러자 벨리사는 바로 군터의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보였다. 또 다시 날 두고 떠날 생각이냐며 엉엉 울어대는 벨리사 덕분에 군터는 진땀을 흘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절대 떠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 그녀를 달랬다.
“…약속하는 거죠?”
“약속할게.”
눈물범벅이 되어 묻는 그녀에게 군터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사단이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얕은 잔꾀로 인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아내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아이에게 너무 무심했던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벨리사를 달랜 다음날.
멜루니악 전체가 들썩였다. 북문을 통해 도시에 들어온 수천의 군대 때문이었다.
“저길 봐! 저 분이 바로…….”
“이제 살았어! 야만인 놈들이건 뭐건, 아무 문제없다고!”
요 사이, 알게 모르게 멜루니악의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었다. 아무리 무지렁이 백성들이라지만 그들 역시 눈치라는 게 있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오가는 전령들을 보며 느끼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 병사들을 통해 흐르는 소문들까지 접하니 그들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멜루니악에 들어온 군대와, 그 군대의 가장 앞에서 말을 모는 사내를 보자마자 그런 근심은 씻은 듯 사라졌다.
“와아아아아!”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깃발에 새겨진 문장은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검은 망토가 바람에 펄럭였다. 그가 말을 멈춰 세우자 뒤따라 온 군대도 멈춰 섰다. 그의 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예를 표하고 있는 사령관 그론킨과 그 수하들이 있었다.
“원행에 감사드립니다. 장군.”
“너무 거창한 환대로군.”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땅에 장군의 위명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사령관은 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더 이상 부끄러워지기는 원치 않으니 들어가 이야기합시다. 서신은 받았지만, 직접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소.”
“예.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아란딜 페레모어는 그론킨을 따라 천천히 말을 몰았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그는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 보았다. 짙은 먹구름이 잔뜩 깔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요란한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