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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3화 (83/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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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얼마동안이나 제대로 씻지 못했는지 몰골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군터의 눈에 비친 벨리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군터는 벨리사가 답답해 꼼지락 거릴 때까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를 풀어주었을 때는 이미 그녀가 흘렸던 눈물이 죄다 말라버린 뒤였다.

“어떻게 된 거지?”

“모두 다 할렌 덕분이에요.”

벨리사는 오테론을 탈출할 때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설명했다. 갑작스레 울리기 시작한 종. 급박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도시에서의 탈출을 권한 할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군터는 도중에 할렌에게 다가갔다.

할렌의 몰골은 벨리사 이상으로 꾀죄죄했다. 얼굴에는 기억에 없는 자잘한 상처들 서너 개가 있었고, 옷차림도 여기저기 찢기고 베인 흔적이 있었다. 그런 외관만 보아도 할렌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맙다.”

“…아닙니다.”

어렵사리 낸 목소리에 물기가 흥건했다. 군터는 그를 힘껏 안아주었다. 어느새 커버린 할렌의 머리는 이제 군터의 턱 아래까지 닿았다. 처음 만났던 때의 꼬마가 이렇게 커서 이제는 어디서도 한 명의 사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이제 너는 노예가 아니다. 네 어미 역시.”

군터가 할렌을 놓아주며 말했다. 놀랐는지 할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또한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한 가지를 말해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들어주겠다.”

“…….”

피로에 젖어 있던 할렌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곧 굵은 눈물이 맺혔다. 군터를 비롯해 누구도 그를 사내답지 못하다 놀리지 않았다. 그들은 온전히 할렌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노예에게 있어 면천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머리로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군터 기병대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할렌이 수 년 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말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지 상관없으니까. 지금은 일단 쉬어라. 많이 피로해 보이는구나.”

“…예.”

군터는 마찬가지로 심히 피로해 보이는 벨리사를 숙소로 들였다. 그리고 살라스에게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멜루니악 시내에서 만났습니다. 할렌이 먼저 저희를 알아보고 따라왔습니다. 듣자하니 하루 전에 도착했다더군요.”

처음에는 상거지 꼴을 하고 있어서 동냥을 하러 온 거지인 줄 알았단다. 목소리도 가뭄에 시달린 농지마냥 잔뜩 마르고 갈라져 있어서 못 알아봤다고.

“그랬군.”

그나마 그를 만나러 오기 전에 정돈하고 온 모양새가 저 정도라고 하니, 처음 짐작한 것보다도 훨씬 더 고생을 한 모양이다.

“할렌에게 정말 큰 빚을 졌군. 내가 가진 것이 없어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종이 주인을 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면천만 해도 후한 보상이니, 크게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지가 않아.”

벨리사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녀를 구해준 것은 어떤 면에서는 목숨 빚보다도 더 크게 닿는 부분이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해도 그에 대한 고마움은 전혀 줄지 않았다.

*

다음날.

전날 하루 종일 잠을 잤던 벨리사는 침대에서 군터의 팔을 베고 누워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할렌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더니 동문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너무 다급해보여서 이유를 물을 겨를도 없었어요. 무작정 따라나섰죠.”

그 당시 오테론의 급박한 사정이 훤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때면 군대는 아직 오테론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을 텐데 습격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때쯤이면 초원의 군대는 요새에도 닿기 전이었다. 그런데 오테론이 습격을 받았다?

벨리사 일행은 오테론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숨어 있다가 도시의 깃발이 꺾인 것을 확인하고 도망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습격’으로 오테론이 함락 당했다는 소리다. 그가 보았던 수만의 군세가 아니라, 그 전에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적들에 의해서.

‘설마 그 200여 기인가?’

처음 요새의 방어선에서 날아들었던 소식. 200여 기의 약탈자들이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보고.

만약 그들이 오테론을 쳤다면 시기에 대한 문제는 그럭저럭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고작 이백 남짓한 적에게 도시가 함락을 당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짐승의 울음소리라…….’

짐작이 갔다. 예의 그 괴인일 것이다. 만약 오테론을 습격한 적이 정예라면, 그러니까 ‘괴인 부대’라면…그렇다면 오테론의 함락 가능성이 높아진다.

벨리사는 멀리서 들려온 그 울음소리를 접한 순간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고 했다. 이제껏 그가 상대한 괴인들에게 그런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단순히 무서워 몸이 굳는 게 아니라, 소리를 듣자마자 몸이 돌처럼 굳었다고 했다. 그녀가 후에 듣기로는 할렌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도시를 공격한 괴인들은(추측이기는 하지만) 이제껏 그가 상대한 괴인들보다 더 강한 이들일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생각한 것과 같다면…가능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살살 긁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죠…….”

그 뒤로도 이야기는 쭉 이어졌다. 가진 식량을 다 먹어 버려서 할렌이 사냥해온 짐승들을 구워먹었던 이야기, 구릉 한복판에서 맞닥뜨린 노예사냥꾼들과 할렌이 혈투를 벌인 이야기, 등등 온갖 긴장감 넘치고 위험천만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군터는 처음 들은 오테론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영영 당신을 못 만날 줄 알았어요.”

벨리사가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군터는 그녀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머리카락을 쓸며 다른 한 손으로 벨리사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향기로운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

군터는 벨리사와 해후를 나누는 한편, 따로 할렌을 불러 오테론에서의 일을 자세히 물었다. 당시 오테론의 상황과, 막시밀리언의 행방에 대한 것이 주였다.

“막시밀리언님은 뵈지 못했습니다. 다만 천인대 소속의 병사들이 남쪽으로 대거 이동하는 것은 보았습니다.”

“남쪽? 그런데 너는 왜 동쪽으로 움직였지?”

“병력이 움직이는 쪽은 어떻게든 휩쓸릴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져도 휩쓸릴 것이고, 퇴각을 하는 거라면 추격대가 붙을 위험이 있을 테니까요.”

“호오.”

보통은 병력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안전할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할렌은 그러지 않았다. 말은 생각했다고 하지만, 군터는 할렌을 잘 알았다. 아마도 머리로 생각한 게 아닐 것이다. 단지 직감에 따랐을 뿐이겠지. 병사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순간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동문으로 탈출구를 잡은 할렌의 판단은 옳았다.

“그 뒤로 달리 소식을 들은 것은 없느냐?”

“예. 실은 오테론을 떠난 뒤에 처음 도착한 도시가 이곳입니다. 소식을 들을 겨를도 없었지요.”

“그런가…….”

결국 막시밀리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거다. 다만 그의 병사들이 전투가 벌어지는 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하니, 그가 무언가 수를 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넌 자유다. 앞으로는 어찌할 셈이냐?”

할렌의 손목에 몇 년간 채워져 있던 쇠고리는 이제 없었다. 그는 온전히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의 어미 유리아도 마찬가지. 이제 그를 묶어두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주인님을…….”

“난 이제 네 주인이 아니다.”

“군터…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난 지금 허울만 좋은 떠돌이에 불과하다. 날 따르면 고생하게 될 거다.”

“괜찮습니다. 따르게 해주십시오.”

고개 숙이며 비치는 눈빛이 강렬했다. 굳게 결심한 얼굴이다. 군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렌의 충성심은 이미 보증된 데다, 일신의 실력도 빼어났다. 그런 할렌이 스스로 따르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다. 이제부터 넌 십인장이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내어줄 병사도 없다만.”

군터가 자조하며 말했다. 볼리드 백인대와 그라메인 백인대의 병사들이 합류한다면 어찌 될지 모르지만, 현재까지 군터 백인대는 정원 미달이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도 모르는 껍데기만 남은 부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할렌은 십인장이라는 것이 마냥 좋은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만 깜빡거리다가 감격한 얼굴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그날. 군터는 휘하의 병사들을 모두 모아 조촐하게나마 새로운 십인장을 환영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할렌은 병사들이 권하는 술을 연거푸 마시다가 가장 먼저 뻗어버리고 말았다.

“믿기지 않는군요. 그 꼬맹이 할렌이 십인장이라니.”

“어허! 할렌이라니? 이제는 할렌님이라고 불러야지.”

오랫동안 노예였고, 아랫사람으로 봐 왔으니 반감이 생길 법도 한데도 병사들은 할렌의 고속 승진에 대해 조금도 군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군터가 벨리사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벨리사를 구하고 지켜낸 공로가 얼마나 큰지도 잘 알았다.

공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안타깝게도 주인공이 가장 먼저 뻗어버렸군. 애송이 십인장의 무운을 빌며 한 잔 하도록 하지.”

군터가 먼저 잔을 높이 들었다. 병사들도 껄껄 웃으며 따랐다.

한 잔이 비워지고, 군터는 또 한 번 잔을 들었다.

“이 잔은 먼저 간 놈들을 보내는 송별주다. 괴로운 감정은 이 한 잔으로 모두 털어낸다.”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전사의 죽음을 떠올리며 슬퍼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 용맹만 가슴에 새겨라. 전사에 대한 애도는 그걸로 충분하다.”

말을 마친 군터는 한 잔 가득 찬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자그마한 파도에 숱한 얼굴들이 쓸려 내려갔다. 그들의 얼굴, 이름 하나하나가 가슴 깊숙이 자리 잡았다. 다시 끄집어내는 일은 드물겠지만, 그럼에도 결코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용맹했던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는 그걸로 충분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불금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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