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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루니악의 사령관, 그론킨은 정확히 이틀하고 반나절 후에 군터를 호출했다. 그 며칠 사이에 그론킨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은 더 짙어져 있었다. 반백이었던 머리도 더 희어진 것 같았다.
“사실이더군. 오테론 첨탑의 깃발이 꺾인 것을 확인했다.”
모든 제국 도시와 성,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제국과 황제를 상징하는 깃발이 달려있어야 한다. 그 깃발이 꺾였다는 것은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뜻.
“며칠 전에도 대충 듣기는 했지만,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말이네.”
초원의 군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는 뜻이다. 정찰대가 오테론을 염탐하고 돌아왔다고는 해도, 멀리서 깃발이 멀쩡히 달려 있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돌아온 것이 전부일 테니, 그와 멜루니악은 현재 맞닥뜨린 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제가 아는 것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론킨은 여러 가지를 물었다. 전체적인 적군의 구성부터 야습에 실패했을 때의 전투 양상, 그리고 무엇보다 괴인에 대한 것을 많이 물었다. 군터가 그런 것처럼, 그 역시 그 괴인들에 대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특이하군. 짐승처럼 변하는 술법이라. 강체술(强體術)의 일종인가?”
강체술은 말 그대로 신체를 강화하는 술수다. 신체의 변이를 일으키는 술법이라고 하면 분류상 강체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놈들이 여럿이라고 했지. 정확히 확인한 수는?”
“서른 이상입니다.”
이 숫자는 살아남은 병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한 것이었다. 본 것만 서른 이상이니 실제로는 더 있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그 더 있는 수가 어느 정도냐는 것.
“심상치 않군.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마도 같은 술법인 것 같은데, 최소 수십이나 되는 놈들이 똑같은 술법을 쓴다는 것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론킨이 문득 가만히 서 있는 군터를 보고 실수했다는 듯 혀를 찼다.
“이런. 미안하군. 생각이 많다 보니까 말일세. 이제 머물고 있는 곳에서 나와 도시를 돌아다녀도 좋네. 조만간 말레이드에서 군대가 당도할 거네. 그때 다시 부르지.”
“말레이드에서 지원군이 오는 겁니까?”
“오테론이 함락당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말레이드에 전령을 보냈네. 만일 적이 이곳으로 말머리를 돌린다면 우리는 버틸 수 없어.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말레이드군 뿐이지.”
말레이드에는 중앙군 8천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예 중의 정예라 불리는 중앙군이다. 군터도 그 위용을 일전에 베브로스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 바 있었다. 말레이드를 비울 수는 없으니 전군이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말레이드군이 움직인다면 목 바로 앞에 칼날이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이 상황에 조금은 숨통이 트일 터였다.
“어쨌든 말레이드에는 그 아란딜 페레모어 장군이 계시니까 말이지. 현 상황이 암담하기는 하지만, 그분께서 움직인다면 무언가 돌파구가 생길 게야.”
아란딜 페레모어.
바크렌에 사는 백성들 중에, 특히 군에 몸을 담은 이들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바크렌의 북부를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사내. 황제로부터 직접 다섯 번째 위계(位階)를 하사 받은 그는 제국 전역에서 그 지위를 인정받는 흑포(黑袍) 장군이었다. 그 위치는 타고난 혈통이 좋다고 해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출중한 실력을 지니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합당한 공을 세워야만 이를 수 있는 자리였다. 그의 무명(武名)은 제국의 명사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 높았고, 바크렌 내에서도 그는 독보적이고 차별화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군인이면서도 바크렌 군부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는 그였지만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성주와 총독, 그리고 그 리에론 가문조차도 아란딜 페레모어를 대할 때는 깍듯이 예의를 차린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실제로 그럴 만도 한 것이, 바크렌 군부에는 위계를 받은 장군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리에론 가문의 가주이자 바크렌 군부의 수장인 윌리스 리에론조차도 무위장(無位將)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때문에 항간에는 아란딜 페레모어가 마음만 먹는다면 바크렌 군부를 집어삼킬 수도 있을 것이란 말도 돌았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가 조용히 말레이드에 은거하다시피 하지 않고 살마드에서 활발히 활동했다면 지금처럼 리에론 가문이 군부를 장악하다시피 하는 모양새는 나오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아란딜 페레모어라.’
말레이드에 은거하다시피한 조용한 실력자. 얼굴도 본 적 없지만 그 이름은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물론 그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과연 이 난국에 그 실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효할까.
하지만 기대는 되었다. 어쨌거나 그는 황제로부터 인정 받은 장군이었으니까 말이다.
*
외출이 허가되자마자 군터는 살라스를 시켜 은신처에 남겨둔 부상자 및 부하들을 데려오게 했다. 도시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약간 잡음이 일었지만 사정을 이야기하니 곧 허락이 떨어졌다. 군터를 비롯한 반수 정도의 인원이 도시에서 머무른다는 점이 고려된 듯했다.
“우리를 믿지 못하는군요. 빌어먹을. 우리가 왜 이 꼴이 되었는데.”
멜루니악에 남은 인원들 사이에서 불만의 소리가 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을 오테론을 우해, 제국을 위해 했다. 그 결과로 동료들을 잃었고,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그런데 이런 반 첩자 대접을 받고 있으니 가분이 상할 밖에.
군터는 부하들을 달래지 않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그도 이런 푸대접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유야 어쨌거나 패잔병 신세이니 무슨 전쟁영웅 대접 같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포로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처음 도시에 당도했을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오테론의 함락 정보가 사실로 드러난 지금까지 이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겁쟁이 같은 인간. 의심만 더럽게 많군.’
부하들을 보면 상관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지금도 숙소 주변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은연중에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말이 좋아 보호지, 이건 누가 봐도 감시다. 그론킨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거겠지.
‘오갈 데 없는 떠돌이 신세로군.’
오테론은 함락 당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막시밀리언은 살았을까? 그가 몸을 피했다면 그를 찾으면 된다. 하지만 만약, 그가 목숨을 잃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막시밀리언 천인대가 사라져도 군터의 지위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백인대장이고, 천인대가 없어졌다면 공석이 있는 다른 천인대로 전출될 것이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막시밀리언은 군터에게 있어 단순한 상관이 아니었다. 사적으로도 섬기기로 한 주종의 관계였다.
‘막시밀리언님을 믿는 수밖에.’
막시밀리언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순진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군터가 아는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찾아내는 사내였다. 그라면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막시밀리언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정리하고 나니 이번에는 더 큰 격정이 치밀었다.
‘벨리사…….’
어쩌면 막시밀리언이 몸을 피하며 벨리사도 챙겨주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할렌이 기지를 발휘했을 수도 있다.
그런 온갖 긍정적인 생각들을 거듭해도 걱정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머리를 감싸쥐고 끙끙대던 군터는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창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수련장으로 쓰기 위해 정리해놓은 마당에서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거친 움직임에 세찬 바람이 동조했다. 골짜기에 광풍이 몰아치듯, 요란한 파공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숙소 바깥을 지키던 병사 몇이 소리를 들었는지 슬그머니 안쪽을 살폈다. 그랬다가 눈으로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창을 움직이는 군터를 보고 감탄하여 입을 벌렸다.
탐탁찮은 구경꾼들이 몰려들거나 말거나, 군터는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스스로도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할 정도로 강해진 그의 몸이 조금씩 삐걱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피로와 고통이 점점 커질수록 머리를 채운 온갖 것들이 조금씩 줄어갔다.
쿵!
크게 내딛은 발이 땅을 찍자 큰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듯 육중한 굉음이 일었다. 힘껏 내뻗은 창극이 날카롭게 허공을 베어 갈랐다. 거친 풍압이 먼 거리에 서 있는 나무를 때렸다. 길게 뻗은 가지에서 나뭇잎 몇 개가 떨어져 내렸다.
“헉…헉…….”
기진맥진한 군터는 창을 지팡이처럼 짚고 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 나았다고 생각한 복부의 상처도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좋았다. 가려운 곳을 힘껏 긁었을 때처럼 머릿속의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노곤함만이 남자 마음이 편해졌다.
‘벨리사도…막시밀리언님도 분명 모두 살아있다. 찾으면 된다. 그러면 돼.’
비틀대며 몸을 돌렸다. 멀찍이 서 있던 구경꾼들은 사나운 눈길이 향하자마자 부리나케 몸을 피했다. 저런 주제에 대체 누굴 감시한다는 것인지.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다 나왔다.
*
그로부터 며칠 후. 은신처의 병사들을 데리러 갔던 살라스가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데리러 갔던 병사들은 물론 데리고 왔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네 사람을 더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네 사람 중에는, 군터가 꿈에서도 그렸던 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벨리사!”
군터는 꾀죄죄한 몰골의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볼록한 배가 부딪치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진 벨리사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팔에 힘껏 힘을 주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