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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루니악은 오테론보다도 작은 소도시였다. 인구가 정확히 얼마라고 들은 바는 없었지만, 간신히 도시의 규모를 유지할 만큼 작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테론과 말레이드의 중간 지점 즈음에 위치한 멜루니악은 두 도시를 잇는 거점 도시이자 유사시를 대비해 두 도시를 받치는 역할을 했다. 만약 오테론이 단번에 뚫리지 않고 포위를 당한 상태에서 위기를 맞았다면 1차적으로 멜루니악에서 원군이 급파되었을 것이다. 그로도 부족했다면 살마드나 말레이드에서 2차 원군이 왔을 것이고.
“정말 멜루니악은 무사할까요.”
“우리가 보았던 대군은 분명 살마드로 향했을 겁니다. 만약 멜루니악이 공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또 다른 군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는…답이 없습니다.”
바크렌의 전체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이는 아마 성주나 군부의 최고위 간부들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군에 몸을 담은 세월이 있고, 그 세월 동안 들은 바가 있는 이들은 대략 4만. 최대로 잡아도 5만 정도로 추정했다. 반 수 정도의 병력은 갈색 초원의 접경지대에 배치가 되어 있고, 남은 반은 살마드에 일부. 그리고 남부 도시들에 조금씩 분산 배치가 되어 있었는데, 실상 남쪽에 배치된 병력은 머릿수 채우기 용이라고 봐야 했다. 즉, 실제로 전투력을 낼 수 있는 병력은 초원에 배치된 반. 더 쳐줘도 살마드에 있는 병력까지란 거다.
“적들은 속전속결 밖에 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의 전력이 강력하다고 해도 초원의 군대는 태생적으로 장기전에 약한 데다, 설혹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해도 시일을 끌면 외부에서 원군이 당도할 터. 길게 끌면 이길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 싸움을 길게 가져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그것은 바크렌의 소식이 전해질 경우 다른 주(州)들에서 몰려올 원군의 존재였다.
제국은 거대하다. 거대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하다. 그리고 그 크기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언제든지 황제가 명만 내리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 순식간에 결집한다. 바크렌은 제국의 37개 주 중 하나일 뿐이다. 갈색 초원이 아무리 넓다 해도 제국의 눈으로 보면 작고 귀찮은 땅에 불과하다.
“어차피 이건 놈들이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늦든 빠르든 우리는 승리할 겁니다.”
살라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십인장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기서 군터는 괴리감을 느꼈다.
‘어차피 질 싸움이라.’
확실히 초원의 군대를 제국 전체와 놓고 보면 꼬마가 거인에게, 그것도 맨손으로 덤비는 꼴이었다. 꼬마의 주먹은 거인의 허리에도 닿지 못한다. 당연히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적들도 바보는 아닐 텐데, 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거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과연 살라스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바로 그 부분을 지적했다.
“하지만 적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무언가 품고 있는 수가 있을 겁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그것까지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야겠지요.”
거기서는 군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멜루니악에 소식을 전하는 것. 자잘해 보이지만, 백 명이 조금 넘는 패잔병들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
*
5명이 더 죽었다. 오늘내일하던 이들 중 절반 정도가 결국 버티지 못한 것이다.
“부상병들은 어찌 해야 할지…….”
“별 수 없다. 이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직도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중상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군터처럼 초인적인 회복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을 데리고 움직인다는 것은 무리였다.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지는 않아도, 같은 피를 뒤집어 쓴 형제다. 믿어라.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 기다리고 있어라.”
“너무 늦지만 말아주십시오.”
군터는 움직이기 힘든 부상자들과 그들을 보살펴 줄 일부를 남겼다. 남기는 이들은 모두 군터 기병대 소속의 병사들이었다. 그가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이고, 부하들 역시 그를 대장으로서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며칠 간 머물던 은신처를 떠났다.
70이 조금 안 되는 수의 기마. 그 선두에서 군터는 이번 전투에서 주인을 잃은 말에 올라 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길잡이로 쓸 만한 병사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오테론에서 복무하면서 멜루니악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어젯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옷 조각 위에 그럴싸한 지도 하나를 그려냈다. 바로 지금 군터가 들고 있는 지도였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늦어도 이틀이면 되겠군.”
물론 지도가 정확하다는 가정 하에.
“괜찮으시겠습니까?”
살라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것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그럼에도 처음 화살 너덧 개를 뭉쳐 놓은 것 같은 꼬챙이 같은 화살에 복부가 뚫려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했던 것이다.
“발목 잡을 일은 없을 거다. 자, 가자!”
그로부터 꼬박 이틀 동안 그들은 거의 쉬지 않고 달렸다. 말이 쉴 때 쪽잠을 잤고, 말의 기운이 돌아오면 다시 달렸다. 덕분에 이틀 후 그들은 가만히만 있어도 입에서 단내가 나는 놀라운 현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그마한 도시를 다 죽어가는 몰골로 맞이했다.
“정지! 소속을 밝혀라!”
“오테론 막시밀리언 천인대 소속 백인장 군터다! 급보가 있으니 속히 사령관을 만나게 해주시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부대 깃발도 잃어버린 터라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무장으로 밖에 신원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성벽 위에서 외치던 군인은 군터 일행의 몰골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가 잠시 기다리라 한 뒤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옆에는 그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 갑옷을 입은 중년의 군인이 함께였다.
“사령관을 뵙고 싶다고? 무슨 일인가!”
“초원의 군대가 남하했소! 오테론은 함락되었을 것이고 살마드마저 위태롭소이다!”
“뭐라……?”
“사령관을 뵙게 해주시오! 우리가 의심스럽다면 나와 내 부하 둘만이라도 들어가 뵙겠소!”
“으음! 좋다! 모두 말에서 내리고 둘만 성문 앞으로 오라!”
군터와 살라스는 말에서 내려 굳게 닫혀 있는 성문 앞으로 갔다. 성문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성문이 작게 열렸다. 군터가 성큼성큼 성문을 지나자 백 명이 훌쩍 넘어 보이는 병사들이 무장한 채 맞이했다. 그 가운데에는 조금 전 성벽 위에서 대화를 주고받았던 화려한 갑옷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군터가 보인 휘장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오.”
병사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특별히 적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무장을 해제하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달랑 둘 밖에 되지 않으니 경계심도 갖지 않는 듯했다.
‘좋지 않군.’
군터는 내심 혀를 찼다. 자신감을 보이려면 아까 성벽 위에서 보여야 했다. 그때는 잔뜩 경계하더니 이제 와 마음을 놓는다는 것은 그저 겁 많고 안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과연 전장에 나가 초원의 군대를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
‘평화가 길었던 게지.’
그러고 보면 현재의 바크렌 군은 제대로 된 전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실전 경험이 있다고 해봐야 약탈자나 도적들을 상대로 한 싱거운 토벌 경험일 뿐이고, 그마저도 못 겪은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바크렌의 군대가 5만이라고 해도 상당수가 애송이, 즉 약졸이라는 뜻이다. 긴 평화가 낳은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안에 사령관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군터가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병사 둘이 막아섰다. 군터의 눈이 그들을 내려 보자 가로막은 병사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무장은 풀고 들어가야 하오.”
“…….”
군터가 들고 있던 창검을 내밀었다. 머뭇대던 병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받아들더니 곧장 소스라치게 놀라며 창검을 떨어뜨렸다.
“이 무슨 추태냐!”
“나무랄 것 없소. 내 창은 조잡하지만 법구 비슷한 것이라, 주인이 아닌 자가 손을 대면 심술을 부리거든.”
“법구……?”
지휘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고작해야 백인장 정도일 텐데, 어디서 법구를 보았겠는가.
“그대로 두시오. 손을 대지만 않으면 해를 입을 일은 없으니.”
군터가 팔을 벌리고 섰다. 몸수색을 하라는 의미다. 그러자 앞을 막아섰던 병사 두 명이 머뭇거리며 다가와 조심스레 몸을 더듬었다. 당연히 걸릴 것은 없었으므로, 몸수색은 금방 끝났다.
“좋소. 들어가시오.”
지휘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군터는 즉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그리 크지 않았다. 벽에는 무구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중앙 끝에는 큼지막한 책상 하나가 있었다. 반백의 머리칼을 한 사내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양옆으로는 호위로 보이는 병사들이 중무장을 한 채 늘어서 있었다.
“사령관을 뵙습니다.”
“그래. 오테론에서 왔다고? 어찌 된 일인가?”
군터는 그간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요새로부터 전령이 왔던 일. 그로 인해 기병대가 출병한 일. 이백의 기병 대신 3만 여의 대군과 맞닥뜨린 일 등, 발을 묶을 생각으로 야습을 시도했다가 처참히 실패했던 일까지.
“…3만? 3만이라고?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최소로 잡아 3만입니다. 제 말에 제 목을 걸겠습니다.”
“으음!”
이야기 도중에 벌떡 일어났던 사령관이 주저앉듯 비틀거리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허면, 오테론은 이미 함락 당했다고 봐야겠군.”
“아마도…그럴 것입니다.”
멜루니악의 사령관은 군터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벌어질 일들을 이미 짐작한 듯싶었다. 그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일단, 귀관의 노고를 치하하겠다. 다만, 무턱대고 귀관의 말을 믿을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었다. 일단 어떻게 이 자리까지 들어오기는 했지만, 당장 군터의 신원조차 완벽하게 확인 된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도시 내에 머물 곳을 마련해주지. 확인이 끝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니 며칠 동안은 그곳에 머물고 있게.”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 이만 물러가게.”
군터는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고 돌아섰다.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본 사령관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내려앉아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