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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0화 (80/1,064)

<-- 패주 -->

“놀랍군요.”

핏기가 아직 남은, 선명한 흉터자국을 보며 병사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어깨너머로 의술을 배운 적이 있다는 병사 중 한 명이었다. 닷새 전에 군터의 배에서 화살을 뽑아낸 것도 그였다.

그렇기에 더욱 놀라웠다. 그 상처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중하고, 아는 사람이 보면 더 중한 상처였다. 그런데 고작 닷새 만에 새 살이 차올랐다. 물론 아직 완쾌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거동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나은 것만 해도 도저히 믿기 힘든 수준이었다.

“혹, 보신의 효과가 있는 법구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군터는 쓴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보신을 해주는 법구라니. 일개 백인장이 그런 귀물을 어찌 가지고 있겠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병사도 워낙 믿기 힘들어 던진 말일뿐,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문제는 없는 건가.”

“예. 물론 아직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겉으로는 거의 다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 파고든 상처는 어떨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알겠네.”

그다지 듣고 싶은 조언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의 진료 역시 살라스를 비롯한 부하들이 워낙 극성이라 어쩔 수 없이 받는 것일 뿐, 군터는 이 야매 의사가 뭐라고 지껄이건 그다지 관심 없었다.

‘이 정도면 다 나은 셈이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복부가 결리긴 하지만 이 정도는 처음 누워서 옴짝달싹 못할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당장이라도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라스.”

“예.”“십인장들을 불러 모아라. 전부.”

“옛.”

잠시 후. 군터의 부름으로 십인장들이 모두 모였다. 살라스까지 포함해 총 11명. 본래 30명이었던 인원이 11명으로 줄어든 것이다.

“말은 편히 하겠다.”

그라메인 백인대의 십인장들은 낯이 익은 이들이 제법 있었다. 반면 볼리드 백인대의 십인장들은 이번 임무에서 처음 얼굴을 익힌 이들이었다.

그들은 대뜸 하대하는 군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백인장이라는 지위도 지위거니와, 그가 풍기는 위압감이 묘하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모두를 부른 까닭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함이다.”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었고, 무거운 얼굴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군터는 그의 바로 옆에 앉은 살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테론은 늦은 것 같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살라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는 무거운 얼굴을 한 쪽에 속했다.

“저…늦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해 하던 이들 중 하나가 나서서 물었다.

“오테론은 이미 함락 당했을 거라는 뜻이다.”

“아니 그게 무슨!”

“아닐 것 같나? 난 오테론의 낮은 성벽이 수만 기마에 버텨낼 수 있을 거라 보지 않는다.”

물론 초원의 군대는 공성전 능력이 취약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기에 성벽 같은 것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공성 기술이 발달할 수가 없었다. 제국은 그것을 알았기에 오테론이라는 도시를 세우기는 했지만, 성벽을 쌓을 때는 그리 높지 않게 쌓았다. 크게 성벽을 높이지 않더라도 야만인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강 헤아려 본 바, 최소 3만이다. 오테론에 남아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2천은 되나?”

“놈들은 공성전이란 것을 모르는 야만인들입니다. 아무리 말이 수만 마리라도 성벽을 넘을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수만 마리 말이 성문에 머리를 박으면 성문은 깨진다. 아니지, 수만 까지도 필요 없군. 수백 마리로도 충분하겠어.”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는 몇몇 십인장들이 보였다. 군터는 여기저기 찢겨진 상의를 벗어던졌다.

가슴팍을 가로지른 커다란 발톱자국 몇 개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로는 화살이 뚫고 간 상흔이 있었다.

“보이나? 아마 너희도 봤을 거다.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괴물 같은 녀석들을.”

짐작했던 대로, 모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개중에는 두려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도 몇 있었다.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놈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강할지도 모른다. 아니, 강할 거다. 아직도 오테론이 무사할 거라고 믿는 녀석이 있나? 그렇다면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다.”

이번에는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이상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위압적인 어투에 눌린 탓도 있었다.

‘뭔가…달라지셨군.’

다른 동료들은 눈치 채지 못한 듯싶었지만, 살라스는 느낄 수 있었다. 군터가 변했다는 것을.

이전의 군터는 다소 조용한 편이었다. 대장으로서 먼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경우는 필요할 때를 빼면 드물었고, 그마저도 그가 직접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프레드릭을 비롯한 부하들에게 언질을 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부대 내에서 나름 머리를 쓸 줄 안다고 평가 받는 프레드릭과 그는 군터의 내심을 짐작하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직접 앞으로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무력을 바탕으로 부대를 이끈 것은 같았지만, 예전의 그가 점잖게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듯했다면 지금은 일어서서 눈을 부릅뜬 채 무기를 쥐고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다. 기질 자체가 바뀌었다고 할까?

‘역시…충격이 크셨던 건가.’

패전이나 본인이 입은 큰 부상보다도, 프레드릭을 비롯한 부하들을 잃은 데 대한 충격이 그를 바꿔놓은 듯했다. 이 변화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어려운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여겨졌다.

“오테론으로 돌아가는 건 자살 행위다. 어렵게 건사한 목숨을 허망하게 날리고 싶은 녀석은 없으리라 믿는다.”

“…….”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군터에게서 사나운 기세가 넘실거렸다. 분명 그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는 모두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대적을 만난 것 같은 긴장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제는 입을 여는 이도 없었다. 모두가 군터의 표정과 몸짓, 말 한 마디에 집중했다.

“살라스. 설명은 네게 맡기겠다.”

“예.”

거기까지 한 군터는 살라스에게 몫을 넘겼다. 이는 그가 자신의 투박한 말솜씨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살라스에게 설명을 하게 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측근이며 이 패잔병 무리의 2인자임을 다른 십인장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살라스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살라스에게는 권위가 생길 것이고, 그럼으로써 다른 십인장들도 살라스를 존중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두 가지 경우냐고 묻고 싶은 인내심 약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입 떼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사나운 기세를 풍기고 있는 군터 때문에 의문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살라스는 이어지는 말로 다 설명을 해주었다.

“최소 3만의 군대입니다. 그 정도의 군대가 단순히 오테론을 점령하겠다고 움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의 목표는 최소로 잡아도 바크렌입니다. 그 정도가 되지 않으면 3만 이상이라는 대병력이 움직인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최소로 잡아 3만. 더군다나 그 안에는 그들이 상대한 바 있는 괴인들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을지 몰랐다.

“초원에서부터, 그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요새의 탐망에 포착됐었던 200여 기병은 오테론의 판단을 흐리기 위한 미끼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시일에 오테론을 점령할 것이고, 그 다음 행동을 이어가겠지요. 여기서 두 가지 경우가 나뉩니다.”

살라스가 군터와 눈을 마주쳤다. 군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다른 십인장들을 하나씩 보았다. 그에 이제부터가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십인장들이 진지하게 살라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먼저, 그들은 곧바로 살마드로 향할 수 있습니다. 오테론에서 살마드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지만, 전원이 기마인 그들의 기동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살마드가 방비를 하기 전에 들이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습의 묘를 이어가는 것이지요.”

거기서 처음으로 물음이 나왔다. 군터가 풍기는 기세는 여전히 사나웠지만, 조금 전과 달리 그들을 압박하고 있지는 않았다. 입을 뗄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살마드는 오테론과는 다르네. 우선 상주병력부터 차이가 나고, 무엇보다도 살마드의 성벽은 한때 왕국의 수도로 쓰이던 도시의 것인 만큼 오테론의 성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고 튼튼하지. 수만의 말이든, 괴력의 괴인이든 살마드의 성벽은 절대 넘지 못할 게야.”

“맞네. 야만인 놈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붓더라도 틀림없이 장기전이 될 텐데, 그러면 각지에서 지원군이 모여들겠지. 심지어 놈들은 후방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분명히 앞뒤 사방에서 협공을 받게 될 거네.”

얼굴에서부터 관록이 묻어나는 두 십인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살라스는 거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두 분의 말이 맞지요. 저는 그 괴인들처럼, 그들에게 다른 숨겨둔 수가 있을 경우를 가정하고 말씀드린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곧장 살마드로 향하는 경우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이 후방의 도시들을 점령하며 전선을 구축하는 경우입니다.”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군터가 입을 떼었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군을 수만씩이나 한데 뭉쳐 움직일 필요가 없지 않나.”

오테론을 점령하는 데는 넉넉잡아 1만이면 족하다. 사실 그 괴인들을 생각하면, 만약 괴인의 수가 수백 정도만 되어도 오천이면 오테론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병력들을 다른 도시들로 돌리면 보다 짧은 시간에 도시 몇 개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 물론 피해는 조금 커질 수 있겠지만, 그 정도는 본격적으로 바크렌 군이 운집하기 전에 기습의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 비하면 감수할 만한 피해였다.

“그렇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지요. 하지만 적이 살마드로 향하지 않는다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뿐입니다.”

말인즉슨, 따라서 적들은 살마드로 향할 거라는 뜻이다. 살라스는 여전히 살마드 급습 설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십인장들에게 돌려서 반박한 것이다.

그 뜻을 짐작했는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십인장들은 혼란스러운 기색을 비췄다.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하면 그들을 완전히 이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군터는 그들을 위해 친절한 선생도, 청중도 되어줄 생각이 없었다. 생각 정리는 각자가, 각자의 개인 시간에 하면 된다.

“답이 나왔군. 적은 살마드로 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움직여야 하겠는가.”

“아직 상황을 모르고 있을 다른 도시들에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빨리 움직일수록 살마드로 향할 원군도 더 빨리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멜루니악입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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