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주 -->
끊임없이 가라앉아갔다. 아래로 떨어지는 듯 섬뜩한 느낌에 연신 발버둥 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떨어지고 가라앉는 추락 끝에, 그는 두려움 속에 홀로 남았음을 자각했다.
아름다운 여인. 한껏 풀어진 것 같은 사내. 그리고 장난기 많아 보이는 다른 사내. 또 다른 무수한 이들.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가 그들을 바라볼 때, 그들도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달랐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들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이 사라지고, 그들이 하나둘씩 흐릿해지며 사라져갈 때에야 그는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
목청껏 외쳤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자욱한 빗소리와 요동치는 천둥소리 뿐. 나머지 소리들은 모두 묻혀버린 양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오오오오오!]
시끄러운 비와 천둥소리마저 집어삼키는 굉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어둠에 균열이 가고, 어둠보다도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그것은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모든 것이 균열의 틈바구니로 흘러들어갔다. 그 흘러들어가는 것들 속에는 조금 전 그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모든 이들이 있었다.
“……………!”
절박하게 외쳤다. 역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또 한 번 떨어져 내렸다.
*
“크흑!”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목을 간질이던 액체가 기침을 타고 튀어나갔다. 힘겹게 눈을 뜬 그는 걱정스레 자신을 내려 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대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살…라스.”
군터는 살짝 뿌연 시야에 비친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렵사리 말을 내니 살라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접니다. 살라스입니다.”
“프…레…드릭…….”
답은 필요 없었다. 프레드릭을 말하자마자 굳어버린 살라스의 표정이 바로 답이었으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속에서 들끓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한 군터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살라스는 여전히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대장님. 깨어나셨군요.”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그라메인님과 볼리드님 모두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
자신이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이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동안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당했다는 뜻과 같다.
“…몇 명이나 죽었지.”
“반…이상입니다.”
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고, 이상이라는 말이 이어졌을 때는 탄식 같은 신음을 토했다. 속이 다시 끓는 느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의 살과 뼈를 죄다 뜯어내 그 안을 식히고 싶을 정도였다.
“송구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 다 내 잘못이다.”
야습을 시도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리 처참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끈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라메인 백인대와 볼리드 백인대의 생존자들이 복귀했습니다. 그들 역시 우리 못지않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짐작했던 대로, 그라메인과 볼리드는 당했다는 뜻이다.
“대장님께서 저희를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니 얼른 일어나라는 말로 들렸다. 목소리가 젖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몸은 둘째 치고, 그를 살리고 죽어간 프레드릭과 일어나면 보이지 않을 숱한 부하들이 떠올라 눈을 뜨기조차 힘겨웠다. 자책감, 죄책감이 뒤섞여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살라스.”
“예.”
“총인원과…부상병은 얼마나 되지?”
“도합 백 서른 둘. 부상자는 대다수입니다. 그 중 거동이 힘든 정도의 중상자가 삼분지 일 정도입니다.”
통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막심한 피해였다. 군터는 차마 그 중 군터 기병대원들의 수는 얼마나 되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는 목구멍에 차오른 피를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얼마나…지…났지?”
“하루 하고 반나절입니다.”
그 정도면 일단은 안전하다고 봐야 했다. 추격을 하려면 진즉에 했을 테고, 갈 길이 바쁜 군대가 고작 백 명 남짓한 패잔병을 잡겠다고 시일을 지체할 리도 없을 테니.
일단 추격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오테론에 생각이 미쳤다.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오테론이 초원의 군대를 막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공성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군대라지만, 수만 기병이 작은 도시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괴인이 있다면…….
‘벨리사.’
이기적이게도, 오테론을 생각하며 떠올린 것은 아내였다. 그녀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오테론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누운 자리에서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할렌. 부탁한다.’
과할 정도로 씩씩한 할렌을 떠올리며 기원했다. 부디, 모두 무사하기를.
*
누워있기만 해서 몰랐지만, 실상 그의 몸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살라스가 괜히 항시 옆에 붙어 이런저런 말을 붙인 것이 아니었다. 처음 말 위에 쓰러져 있던 군터의 몸 상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군터는 두 번째로 의식을 되찾고 이틀이 지나고서야 간신히 거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을 때, 부하들은 거의 눈이 튀어나오려 했다. 그를 다시 눕히려는 부하들을 신경질적으로 물리친 군터는 그제야 현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심각하군.’
그야말로 ‘패잔병’ 하면 떠오르는 모습의 전형이었다. 피 냄새를 물씬 풍기는 부상자들이 동굴 여기저기에 누워 있었고, 멀쩡한 병사들은 물주머니를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살라스는 분명 ‘거동이 힘들 정도’의 부상자가 삼분지 일이라 했는데, 그 중상자들 중에 ‘거동이 불가능한’ 이들이 반은 넘어 보였다.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대장님. 조금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억지로 몸을 움직이시면 상처가 덧날 수도…….”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움직일만하니 움직이는 것이다.”
그가 입은 부상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괴인에게 뜯긴 가슴팍이 아니라, 화살에 꿰뚫린 복부였다. 지금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장기들이 뒤틀리는 느낌이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은 했다.
“의술을 아는 자가 있나?”
“어깨너머로 배웠다는 이들이 세 명 있었습니다.”
두 명은 볼리드 백인대 소속이었고 한 명은 그라메인 백인대 소속이라 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열 명은 더 죽어나갔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식량 문제는?”
“이튿날까지는 휴대하고 있던 군량으로 해결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밖으로 인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휴대한 군량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이제부터는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만…언제까지 여기서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만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믿을 만한 병사들로 사냥조를 꾸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라.”
“옛.”
살라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어제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군터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참담한 패전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황. 거기에 지휘관까지 잃은 두 백인대가 있다. 머리를 잃고 상처투성이가 된 몸뚱이만 따로 노는 와중에, 누구도 그 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다. 그나마 살라스가 나서서 뭐라도 해보려 했겠지만 십인장에 불과한 그의 말을 다른 이들이, 그것도 다른 부대의 병사들이 들을 리 만무하다. 더군다나 같은 십인장들은 나이도 어린 살라스가 나서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을 터.
하지만 이제 그가 일어났으니 상황이 달라졌다. 부대는 다르더라도 어쨌거나 그는 백인장이었고, 이 엉망진창인 군사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인사였다.
군터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엉망인 몸으로도 마냥 누워있을 수 없는 이유 역시 바로 이 때문이었다. 머리 쓰는 것에는 소질이 없지만, 이런 부류의 생리에는 익숙했다.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패잔병들. 그 중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탈영병이 수십씩 생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를 방지하려면 중심이 우뚝 서야 하고, 그 중심이 될 수 있는 이는 그밖에 없었다.
‘우선은 병사들을 단단히 단속해야 한다. 그 다음엔…….’
다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병사들을 단속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찌 해야 하는가?
오테론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근의 다른 도시로? 그도 아니면 살마드로 가야 할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캄캄한 밤에 홀로 길을 나서는 느낌이다. 발밑에 어떤 가시가 있는지, 큼직한 돌부리가 있는지도 모른 체, 식은땀을 흘리며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것 같은.
‘아니. 아니지. 나약한 생각은 집어치워야 한다.’
프레드릭을 떠올렸다. 자신을 구하러 사지로 달려들어 오고,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말 아래로 몸을 던졌던 부하를.
‘네 희생을 값어치 없게 하지 않겠다.’
속을 뒤집어놓는 자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방법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뿐이다. 아직 살아있는 부하들을 어떻게든 건사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복수하겠다. 천 명의 피로 너희의 넋을 달래주마.’
프레드릭과 이 자리에 없는 부하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린 군터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근처 병사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실책을 알아챈 군터가 마음을 다잡았다.
‘살라스의 말처럼…먼저 몸부터 추슬러야겠군.’
일단은 지휘관이 생긴 것만으로도 혼란이 진정된 모양새지만, 이것이 언제까지 갈지 몰랐다. 지금도 바삐 움직이고 있는 저 병사들 중에는 당장 자기 혼자라도 도망치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그런 녀석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지휘관이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군터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힘을 보이는 것이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면 대가 약한 놈들은 불만이 있어도 참고 따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그것이 힘들었다.
‘그래도…생각보다는 상태가 좋다.’
배를 뚫고 나왔던 화살은 무슨 이런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굵었다. 게다가 괴인의 발톱에 긁힌 상처도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심하다 싶을 중상을 두 개나 입고도 몸은 그럭저럭 움직이고 있었다. 부하들이 기겁을 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불과 이틀 만에 몸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부상이 아니었으니까.
‘전보다도 더 좋아진 것 같군.’
신물은 신체능력을 전반적으로 상승시켰다. 거기에는 상처회복능력도 포함 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 보름은 앓아누워야 하는 부상도 그는 사흘 정도면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괴이하다 싶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런 수준마저도 뛰어넘은 듯했다.
‘나쁜 일은 아니지.’
나쁘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다. 온전히 부상에서 털고 일어나는 날부터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몸이 호전되기를 바랐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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