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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7화 (77/1,064)

<-- 포효하는 맹수 -->

“qwrbooiqwe(애석하군).”

“쿨럭! 크흐으…….”

투스바이언은 부러진 철추를 지팡이처럼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갑옷은 갈라지고 뜯겨져 앙상했고, 몸을 지탱하는 팔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힘없이 떨렸다.

“qrobubvwqy…qubwrobqoiwenior(간만에 보는 흔치 않은 전사…좀 더 제대로 붙었다면 좋았을 것을).”

“뭐라고…씨부리는 거냐. 이…지저분한 괴물 새끼가!”

투스바이언이 입 안 가득 머금은 피를 거칠게 내뱉으며 부러진 철추를 휘둘렀다. 괴인은 선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두터운 주먹을 휘둘러 철추를 쳐냈다. 묵직한 굉음을 내며 철추가 투스바이언의 손을 떠났다. 그의 몸도 힘없이 튕겨져 바닥을 굴렀다.

“커헉!”

금이 잔뜩 가 있던 갑옷이 바닥에 부딪치며 완전히 박살이 났다. 부서진 갑옷조각들이 살을 파고들었다. 투스바이언은 전신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끝까지 몸을 일으키려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한계를 지난 그의 몸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quirenewqio(콰이렌이다).”

전사장(戰士長) 콰이렌이 투스바이언에게 다가갔다. 투스바이언은 흐릿하지만, 여전히 사나운 눈을 하고 있었다.

“qbrwoi iuew qewinev(마지막 가기 전에 이름 정도는 알려주지 용맹한 전사).”

슬쩍 들은 발이 투스바이언의 머리를 찍었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묽은 핏물이 번졌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잠시 떨리는 듯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짓누른 발을 뗀 콰이렌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머리 없는 시신은 잔혹했고 안쓰러웠다. 저런 너덜너덜한 고깃덩어리를 보고 누가 용맹한 전사를 떠올릴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다. 전사의 최후란 대개 비참하기 마련이니 생전의 명예가 후대까지 전해지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콰이렌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아무리 찬란하게 불태울지라도 결국 끝에 남는 것은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가 버리고 마는 재 한줌이 전부이기에.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이름 모를 적이여. 내가 자네를 기억하지.’

명예로운 전사는 마땅히 기억되어야 한다. 콰이렌은 그것이 승자의, 계속 살아가는 자의 의무라 여겼다. 이름을 듣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긴 하나, 어차피 전사의 명예는 이름이 아니라 투쟁에 있는 것.

오오오오오-!

짤막한 상념에 잠겨 있던 그를 부하들의 요란한 함성 소리가 깨웠다. 콰이렌은 몸 가득이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그의 푸른 안광이 더욱 짙어졌다. 의식하지도 않은 손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잘게 꿈틀거렸다. 억눌렸던 힘이 되살아나면서 느껴지는 감각은 심대한 쾌락이었다.

‘끝났군.’

초원을 나오면서부터 몸과 영혼을 옥죄던 저주가 사라졌다. 이것은 대족장이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는 뜻이고, 이 도시에 온 목적이 달성되었음을 의미했다.

*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신중하게 움직였다. 물론 기회를 틈탄다는 점만 같을 뿐, 그들은 맹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오히려 전력만 놓고 본다면 맹수가 아니라 사냥감만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의하고 또 주의했다. 맹수는 한 번 사냥을 실패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만, 그들은 한 번 실패하면 파멸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밤이다.”

그렇게 신중히 고르고 고른 시기. 대낮의 햇살을 피해 음지에서 억지로 휴식을 취하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결행의 시기를 정한 후에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각자 무기를 손질하거나, 말을 돌보거나, 그도 아니면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

군터는 모커스를 돌보고 있었다. 모커스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니 큼직하고 순진무구한 눈망울이 기분 좋게 끔뻑거렸다.

“어쩌면 너와 나 둘 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

심각한 말을 하는 것치고 목소리는 잔잔했다. 하지만 비장한 분위기는 숨길 수 없었는지, 풀어져 있던 모커스의 고개가 빳빳이 섰다. 노련한 군마가 깊은 눈으로 군터를 바라봤다.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더는 험한 일을 시키지 않으려 했다.”

집의 마구간에는 모커스를 위해 들여놓은 암말이 있다. 이따금씩 밤에 요란한 소리가 들린 적이 있었는데, 아직 소식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 일을 마치고 나면 힘 좀 써보라고 좋은 것들도 사다 먹여줄 생각을 했었다.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마라. 난 배가 부른 아내와 아직 얼굴도 못 본 자식을 두고 왔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왜 이런 말을 사람도 아닌 말에게 하고 있는 것인지는 군터 본인도 알지 못했다.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전에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또한 두려워하고 있었다. 강대한 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싸워 돌아갈 수 없을 것을 두려워했다. 배부른 아내, 얼굴도 모르는 자식을 보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

지금 이렇게 모커스를 앞에 두고 주절주절 떠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계속 쌓이는 감정을 토하긴 해야겠는데, 부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너나 나나 할 일이 많다. 그러니 이번 일만 마치고 나면 바로 돌아가자. 집으로.”

강한 인간은 많다. 하지만 강하기만 한 인간은 없다. 군터는 오늘 밤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이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망을 위해 목숨 하나 정도 거리낌 없이 땔감으로 던져 넣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가족이 생긴 후, 그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는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리며 생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창검을 쥐는 손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힘이 들어가는 이유였다.

“돌아가는 거다. 우리 둘 다.”

모커스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크게 콧김을 뿜더니 군터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

구름이 달과 별들을 가린 야심한 밤.

군터는 길게 자란 갈대숲에 몸을 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는 그라메인과 볼리드. 그리고 수백의 병사들이 마찬가지로 숨을 죽인 채 뒤따랐다.

“이쯤에서 흩어지는 것이 좋겠군요.”

갈대숲이 끝나는 지점 즈음에서 군터가 그라메인과 볼리드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들은 군터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습이라고는 해도 경계병들이 많으니 빠르게 대응할 걸세. 아마도 즉각 추격대가 따라붙겠지. 최대한 마지막까지 은밀히 접근하여 한 번에 치고 나와야 하네. 피해를 입히는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소란을 일으키는 데 집중하세.”

“옛.”

“원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원신께서 굽어 살피시기를.”

축언을 주고받은 그들은 곧 세 갈래로 흩어졌다.

군터 기병대는 모두 말에서 내린 채로 이동했다. 초원의 군대는 사방이 탁 트인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 풀이 길게 자란 곳으로 움직이며 몸을 숨겼다.

“여기가 한계입니다.”프레드릭이 말했다.

그의 말처럼 더 이상은 엄폐할만한 곳이 없었다. 이 이상 접근하려다가는 적의 눈에 띄고 말 것이다. 야심한 밤이라고는 해도 초원인들의 눈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들짐승과 접근하는 적 정도는 쉬이 분간할 수 있으니까.

“다른 것은 다 잊어라. 내 뒤만 보고 따라오면 된다. 우리는 적들과 싸우지 않는다. 놀래켜주기만 하고 바로 도망쳐 나올 것이다.”

이번 야습의 목적은 적을 지치게 하는 데 있었다. 사람이든 말이든 한 번 피로가 누적되면 움직이기가 힘들어진다. 특히나 말은 워낙에 겁이 많은 짐승이라, 잘 훈련된 군마라 할지라도 큰 소란이 일게 되면 진정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번 야습이 성공한다면 다음을 노릴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초원의 군대는 모두 기병이고, 기병은 말이 움직이지 않으면 멈춰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내 뒤만 쫓아라. 그러면 된다.”

부하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모두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또한 보였다.

“가자.”

모두가 말에 올랐다. 그리고 수만의 적이 진을 친 곳으로 질주해갔다.

*

두두두두!

“qurbua(적이다)!”

제대로 근접하기도 전에 경계병에게 발각 당했다. 물론 이는 예상했던 바라, 군터는 미리 들고 있던 활로 시끄럽게 소리쳐대는 적병을 쏘아 맞췄다. 어둠 속에 숨어 날아간 화살은 단번에 적병의 머리를 꿰뚫었다.

“고삐를 느슨히 쥐지 마라!”

뒤따르는 부하들에게 일갈하며, 군터는 활을 안장에 걸고 창을 들었다. 어느새 적진의 코앞까지 다다른 상황이었다. 경계병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잠에 빠져 있던 적들도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바로 그때 또 다른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라메인과 볼리드의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기세를 높이며 돌격해 들어갔다. 그로 인해 군터 기병대에게만 쏠리던 적의 집중이 한순간에 분산됐다.

“좋아! 한 번의 충돌 이후 곧장 선회한다!”

군터는 성공적인 야습을 확신하며 소리를 높였다.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오오오오오!

적진 한 가운데서 웅장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뿔 나팔 수백 개가 동시에 울리는 것 같은 크기였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귀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 그 울림은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초목을 뒤흔들었다. 기세 좋게 질주하던 말들은 다리가 굳기라도 한 것처럼 급격하게 달리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기회만 엿보던 매가 드디어 내려왔구나! 바르바피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장의 혼란을 가볍게 짓뭉개는 일갈.

그 일갈에 호응이라도 하듯, 혼란스럽던 군중에서 끔찍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족히 수천은 됨직한 거대한 형체들이 일제히 진 밖으로 뛰쳐나왔다. 체구 좋은 군마에 올라탄 채 샛노란 안광을 토하는 기병들이.

“diheuveradan(목을 내놔라)!”

그들은 짐승이 풀숲에서 뛰쳐나오듯 진영을 박차고 나왔다. 족히 수백은 될 법한 기병들이 군터 기병대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그 중에서도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이는 더욱 속도를 높여 군터에게 따라붙었다.

‘그때 그놈과 같다! 아니, 다른가?’

표범의 그것처럼 노란 눈을 본 순간, 군터는 수 년 전 사투를 벌였던 괴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의 그 괴인이 완전한 괴물 같았다면 지금 덤벼드는 자들은 눈이 노랗다는 것과 지나치게 흉포한 기세를 흘리고 있다는 것 외에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웃기는군.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군터의 입매가 비틀렸다. 지근거리까지 따라붙은 적을 보며 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선회하라!”

챙!

창과 칼이 닿으며 불똥이 튀었다. 살기어린 검고 노란 눈이 서로를 노려보며 부딪쳤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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