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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76화 (76/1,064)

<-- 포효하는 맹수 -->

“대전사시여! 명령을!”

대전사 포라칸은 부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3만 5천의 군대가 멈춰 서서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르바피 500기를 빼내라.”

“예?”

“요새에서 기병이 빠져나왔다.”

요새 뒤편의 언덕 위에 머물던 기병대가 모습을 감췄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진용을 끝까지 살폈다.”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그럴 이유가 없다. 그 수가 족히 수백이었으니 탐마로도 볼 수 없다.

“대전사시여. 부르셨습니까.”

“후방으로가 방비를 단단히 하라.”

“옛!”

반문은 없었다. 움직이는 모든 전사들에게는 절대적인 존경과 복종만이 있었다. 그들은 즉각 후방으로 이동했다.

“공격 개시. 작은 돌 하나도 남기지 마라.”

우오오오오오-!

포라칸의 명령이 떨어졌다. 선두열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뒤편에 늘어선 나머지 병사들도 잇따라 합세했다.

뿌우우-!

뿔 나팔이 울렸다. 기수들이 깃발을 휘둘렀다. 멈춰 섰던 군대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최선두에는 포라칸이 있었다.

“대궁(大弓)을.”

“옛!”

종자처럼 뒤에 따라붙던 전사가 큼지막한 활을 그에게 건넸다. 상아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짙은 회색 궁신(弓身)에 시위는 아이의 새끼손가락만큼이나 굵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낄 법한 거대한 활을 그는 한 손으로 가벼이 쥐었다.

“첫발은 하다못해 살마드의 성주라는 자에게 선물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지.”

활만큼이나 큼지막한 화살이 시위에 걸렸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활이 한껏 휘었다.

투웅!

둔탁한 소리가 났다. 시위에 걸려 있던 화살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멀리 요새의 성벽 위. 깃발 옆에 서 있던 지휘관이 가슴 한복판에 화살이 박혀 날아갔다. 그의 몸뚱이는 화살과 함께 뒤편 성벽에 틀어박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벽 중간에 박힌 지휘관을 구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하지만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틀어박힌 탓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도로 활을 받은 전사가 감탄했다. 어지간한 이들은 시위를 당기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활이다. 그런 무지막지한 것을 이렇게 잘 다룰 수 있는 이는 초원에 오직 그 한 사람뿐이다. 그렇기에 그가 전사 중의 전사라는 대전사의 자리에 있을 수 있음이리라.

포라칸이 창을 치켜들었다.

“남쪽 도시에 대족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서둘러라!”

웅혼한 외침이 초원을 뒤흔들었다. 수만의 병사들이 내는 소리를 모두 압도한 목소리는 3만 5천 전사들의 전의를 하늘 끝까지 이끌었다.

“대족장이 기다리고 계신다!”

“오오오오!”

칼 같이 일정하던 대열이 무너졌다. 저마다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기 위해 전력으로 말을 몰았다. 3만 5천 기병이 거센 파도가 되어 요새를 덮쳤다.

*

“저, 저런!”

저항이라 할 것도 없이,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지는 요새. 그라메인과 백인장 볼리드는 본인들이 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비참한 얼굴을 했다.

“유격전을 말하지 않았나!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가서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뒤를 친다 해도 바로 따라잡힐 겁니다. 이쪽은 기병이지만, 저 쪽도 기병이지요. 숙련도에서도 떨어지니, 지금 뒤를 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아니라도 어차피 유격전은 불가한 게 아닌가?”

군터는 일찌감치 프레드릭과 살라스를 포함한 부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전술방향에 대해 의논한 뒤였다. 그랬기에 대답은 막힘없이 나왔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지요.”

“보급대를 치자는 건가?”

볼리드가 그럴듯한 의견을 냈다. 하지만 오답이었다.

“초원의 군대는 보급부대 같은 것은 운용하지 않소.”

초원의 군대는 모두 기병. 기병의 생명은 신속한 기동이다. 그런데 그런 군대에서 보급부대를 쓴다면 기병으로서의 장점을 다 깎아먹는 셈이니, 초원의 군대는 아예 보급부대를 없애는 대신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전투식량을 최대한으로 했다. 무장을 간소화 하며 식량을 챙기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정식으로 보급부대를 운용하는 것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약탈로 보급을 대신하지. 마을, 성, 도시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는 식량을 취하는 거요. 저들 역시 마찬가지지. 그렇기 때문에라도 저들은 하루라도 빨리 오테론으로 가려 할 터.”

식사도 말 위에서 하는 이들이 초원의 전사들이다. 그들의 휴식은 말과 함께 한다. 말이 지치면 쉬고, 말이 더 움직일 수 있다면 계속 움직인다. 그들의 기동력은 제국이 상상하는 이상이었다. 저들은 군대이지만, 기동력에 있어서는 표홀하게 움직이는 소수의 약탈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뭔가? 우리는 고작 삼백이고, 무엇하나 저들에 비해 나은 점이 없는데 어찌 저들의 발을 늦출 수 있겠는가.”

“야습입니다.”

“야습이라……”

답답해하던 그라메인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복, 기습, 야습. 이런 것들은 성공하기만 한다면 적은 수로도 많은 수의 적을 당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이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가능하겠는가?”

“어렵겠지만…어떻게든 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터는 손짓으로 프레드릭과 살라스를 불렀다. 그들이 다가오자 그라메인이 마땅찮은 얼굴로 물었다.

“누군가? 일개 십인장이 나설 자리가 아니거늘.”

“제가 많이 의지하는 부하들입니다. 머리가 쓸 만하니 한 번 들어보시지요.”

군터가 그리 말하니 그라메인도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듯 태도를 굽혔다. 깍듯이 군례를 취한 프레드릭과 살라스가 미리 생각해둔 전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동력에 있어 저들과 차이는 없습니다. 저들은 쉬지 않고 이동할 것이고, 우리가 최대로 움직인다 해도 그들을 앞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는 저들이 지칠 때 우리도 지치고, 우리가 회복하면 저들도 회복한다는 뜻이지요. 즉, 야습은 불가하다는 뜻입니다.”

“뭐라?! 그렇다면 지금껏 의논한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말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던지 그라메인이 언성을 높였다. 그가 제대로 열을 내기 전에 살라스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동일한 조건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저들은 지금 전투를 치렀지요. 비록 낙승(이 대목에서 그라메인과 볼리드의 얼굴이 굳어졌다)을 거뒀다한들 일단 전투를 치렀으니 무리하게 이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지요.”

“단 한 번의 기회라…….”

“요새에 남아 싸운 이들이 벌어준 시간입니다. 어차피 저들은 최단경로를 통해 오테론으로 향할 테니, 우리는 그들보다 앞서서 쉬지 않고 달려야 합니다. 그들의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하고, 그들이 쉴 때 들이치는 겁니다. 일단 한 번만 성공을 한다면 차후의 기회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라메인은 프레드릭과 살라스의 설명을 들은 후에 즉답하지 못하고 말을 아꼈다. 그는 이 방법이 최선인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짧은 고민 끝에, 딱히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것 외에 다른 수는 없는 것 같군. 저들이 이대로 곧장 오테론으로 향하게 되면 파멸이다. 우리 모두가 죽어 저들의 발걸음을 반나절만 늦출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 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그라메인의 모습에, 군터는 내심 감탄했다. 고된 임무를 함께 하면서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이런 기개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리 말해줄 줄 알았네.”

그라메인이 무거운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을 띠며 군터의 어깨를 짚었다.

*

“너무 싱겁군요. 제국이라고 하여 얼마나 대단할지 내심 기대했었는데 말입니다.”

“방심한 전사는 들개에게도 물려 죽을 수 있다.”

“으음. 송구합니다.”

젊은 전사가 즉각 고개 숙였다. 포라칸은 돌아보지 않은 채 느긋이 말을 몰았다.

군대의 진군은 모두 그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가 빠르게 가면 빠르게, 늦게 가면 늦게 움직였다. 모든 병력이 그의 호흡을 쫓았다.

“우리는 기습을 했다. 적들의 의표를 찔렀지. 대족장께서 직접 미끼가 되어 적을 안심시킨 거다. 우리는 그 덕을 보고 있을 뿐이다. 싱겁다는 말을 입에 담기는 부끄럽지.”

“…송구합니다.”

한 번에 대군이 요새의 방어선을 넘었다면 적은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백이라는 숫자는 그들의 방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설마하니 그 정도 병력으로 도시를 직접 들이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터.

‘대족장만이 가능한 일이지.’

타르가이 베르겐.

젊지만 그 누구보다 강하다. 그 누구보다 현명하다. 일찍이 초원의 긴 역사 속에서도 그 어린 나이에 그 만한 위업을 이룬 이는 없었다. 그의 아래 초원은 하나가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 강대한 힘으로 대적에 맞서 번영하기를 꿈꾸고 있다.

‘내 생에 있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다.’

위대한 여정은 노랫말로 남아 역사에 흐르게 될 것이다. 그 장엄한 이야기 속에 이름이라도 짤막하게 올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예는 없다.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 하나가 아깝겠는가.

위대한 여정의 한 가운데에 있음을 자각하자 또 다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고삐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들끓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포라칸은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탐마로부터 보고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말씀하셨던 기병들은 어디로 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도시로 퇴각한 것이 아닐지…….”

“흠.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만.”

언덕 위에 올라 있던 일단의 기마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각. 그것은 흡사, 하늘 위에서 맴도는 매를 봤을 때와 비슷했다. 손닿을 수 없는 멀리서 지켜보지만, 그 매서움은 눈앞에 머무는 창칼보다도 더 예리했다. 그런데 그런 기세를 품은 자들이, 상황이 좋지 않다지만 그리 깔끔히 물러난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전사이며, 동시에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냥꾼인 포라칸은 그를 부정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우리는 지금 적진의 한복판에 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도록.”

“옛!”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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