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효하는 맹수 -->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었다. 그의 울음소리가 바람을 일으켰고, 섬뜩하리만치 사나운 포효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흘렀다. 모든 풀들이 시들어 누웠고, 모든 생명이 피를 흘리며 도망쳤다.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그녀는 달아나는 모든 생명들을 보고 있었다. 많은 것들이 그녀를 지나쳐갔다. 그녀 역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아 도망을 칠 수도, 등을 돌릴 수도 없이 계속 서 있었다.
끔찍한 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서서히 먹구름이 몰려왔다. 곧 비가 내리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시커먼 빗물에 흠뻑 젖은 그녀는 추위와 두려움에 떨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아 더 끔찍한 공포였다.
[오오오오오!]
바람을 타고 온 소리는 몸을 통째로 후려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울먹였다. 쉼 없이 흐르는 눈물이 빗물에 섞여 내려갔다.
[오오오오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그녀의 몸도 풍랑을 만난 돛단배마냥 위태로이 흔들렸다. 그녀는 뿌옇게 안개 낀 눈으로 검은 비의 저편을 보았다. 눈물과 빗물로 가린 시야에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오오오오오!]
아니, 그것은 산이 아니었다. 산처럼 거대하지만 네 발로 움직였으며, 짐승처럼 꼬리가 달려 있었다. 거대한 꼬리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태풍이 일어 초목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꺄아아아아악!”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는 두려움보다 저 끔찍한 것을 보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보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듣지 않았다. 연신 비명을 지르며 두려움에서 도망치려 발버둥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너무도 소리를 질러 목에서 소리 대신 피가 나오게 되었을 때. 그녀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보였다.
바로 앞에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거대한 자주색의 눈동자. 빛을 잃어버린, 시체의 그것 같은 서늘한 눈동자가.
*
“허억!”
막시밀리언은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네발짐승처럼 달아났다. 라일라가 침착한 목소리로 “진정하세요.” 하고 말하지 않았다면 어딘가에 부딪치기 전까지 계속 꼴사나운 모습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꾸, 꿈인가?”
주저앉아 묻는 그의 얼굴은 피가 안 통하는 사람처럼 창백했다. 온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바닥을 짚은 손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꿈입니다. 제가 받은 계시죠.”
“계시? 계시라고? 그…그건 뭐였지? 그 거대한…….”
“신입니다. 죽은 신이죠. 아주 오래 전에 존재했던.”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막시밀리언은 그런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나 격앙되어 있었다.
“신이라고? 대체 그런 것이 왜…….”
“모릅니다. 그것이 오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왜 오는지, 언제 오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과 비슷하죠. 하지만 확실한 건, 그것이 오고 있다는 겁니다.”
“으…으음…….”
막시밀리언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가락으로 바닥을 툭툭 치고, 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은 생각에 빠졌다기보다는 겁에 질려 도망칠 구석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군.”
라일라가 연신 움직이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누구도 그가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늦든 빠르든, 그는 이곳에 옵니다.”
“그래서…어쩌라는 것이냐.”
“도망쳐야 합니다. 남쪽으로, 되도록 멀리.”
“도망?”
막시밀리언이 싱거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 떨리던 눈은 어느새 그럭저럭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그럴 수는 없다. 나보고 탈영을 하라는 말이냐? 그럴 수는 없지.”“방금 전에 보신 것을 믿지 않으십니까?”
“…네 말이 다 맞다 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때를 놓치면 모든 걸 잃게 되실 겁니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하지만 늦지 않는다면, 적어도 몇 개는 지키실 수 있겠지요. 제가 보여드린 것은 결코 허상이 아닙니다.”
“…….”
막시밀리언은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은 감지 않았다. 아니, 감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조금 전에 보았던 그 끔찍한 공포가 다시 살아날 것만 같았다.
*
“대장님! 봉화가!”
“보고 있다.”
수색작업에 한창이던 군터와 부하들이 말을 멈춰 세웠다. 그들은 뒤편에서 피어오른 봉화를 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모든 초소에서 봉화가 올라왔습니다. 이게 대체.”
모든 연기의 색은 같았다. 붉은색. 1만 이상의 적을 의미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봉화 연기다.
“효시를 쏴라. 즉각 요새로 이동한다!”
“옛!”
그들이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요새에 도착했을 때, 요새는 혼란 그 자체였다. 백인장들은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쳐가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급히 귀환한 기병대들은 그들끼리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그라메인과 다른 백인장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뭣들 하는 거요?”
“군터 백인장. 응전 태세를 갖추고 있…….”
“응전이라고? 미쳤소?”
“뭐요?”
백인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군터는 그가 모욕 받았다 느끼는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 생각 없는 작자의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픈 마음이었다.
“일만이오. 최하 일만이지. 그 수가 뭉쳐서 움직이고 있다면 당연히 전과 같은 피난민들은 아니겠지.”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우리의 임무는 이 요새의 사수. 당연히 응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수하는 것과 개죽음 당하는 것은 다르지. 기껏해야 2, 300명으로 어찌 1만을 막을 셈이오?”
“도망치자는 얘기를 하는 건가?”
“철수라는 말도 있지.”
“이제 보니 그대는 불명예스러운 자였군.”
그는 완강해 보였다. 더 말한다면 칼이라도 뽑을 기세라 군터는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굳이 힘들여 설득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다만 그를 따라 이곳에 남게 될 부하 병사들이 불쌍할 뿐.
‘물러나야 할 때를 모르는 것을 명예라 여기는 얼간이.’
싸워야 할 때는 싸운다. 하지만 싸워야 할 때가 아니라면, 특히나 물러나야 할 때라면 주저 없이 물러난다. 군터는 그것을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라 생각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가!”
몸을 돌려 나오려던 찰나. 그라메인이 막 도착한 듯 헐레벌떡 뛰어왔다.
“적입니다. 수는 최소 1만. 지금도 시시각각 접근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만? 만 명이라고! 설마 이전의 이백은 정찰대였던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혼란스러워 하던 그라메인이 고개를 들었다. 군터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흔들림 없이 굳센 시선에 그라메인도 조금 진정했는지 어서 말해보라는 듯 표정을 굳혔다.
“이곳에 있으면 개죽음입니다.”
“물러나자는 말인가?”
“애초에 저희는 기병.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령을 보내 오테론에 이 사실을 알리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으음! 하지만…….”
그라메인은 혹한 얼굴이었지만 곧장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요새에 남게 될 병사들을 생각하는 것일 터.
“지금도 적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결단을 내리시지요.”
군터가 재촉하자 그라메인은 입술을 씹으며 갈등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쉬지 말고 말을 달려라! 오테론에 전해라! 반드시!”
“옛!”
전령이 급히 출발했다. 그라메인은 모든 병력이 귀환한 것을 확인하고 북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느긋하군. 감출 생각이 없다는 건가.”
길게 늘어진 군대는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기세 좋게 뿔 나팔까지 불어대며, 깃발을 흔들면서 말이다.
“좋지 않군요.”
“무슨 말인가?”
그라메인이 군터를 보며 물었다. 군터는 대답 대신 좌에서 우로 적의 군대를 훑었다. 질끈 다문 입에서 침음이 흘렀다. 속이 탄 그라메인이 재차 물으려는 찰나.
“깃발이 모두 같습니다.”
“음?”
“족히 만 오천, 어쩌면 이만 이상일지도 모르는 대병력. 결코 한 두 부족으로는 나올 수 없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깃발이 하나라는 것은…….”
“대부족이라는 뜻인가?”
군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도 엄청난 대부족입니다. 어느 부족의 깃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뿌우우우우-!
뿔 나팔이 울렸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밀려오는 군의 규모만큼이나 위압적이었다.
“피해야 하지 않겠나?”
그라메인이 불안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조금 전까지 물러나길 주저했던 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완전히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지요.”
군터는 조금 더 앞으로 말을 몰고 나갔다.
“…….”
방금 전에 최소 만 오천이라고 했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대열을 보고 있자니 그것이 굉장히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소 이만 이상. 어쩌면 그보다도 더…….’
그들은 지금 고지에 올라와 있었다. 그럼에도 길게 늘어진 군대의 끝을 좀처럼 확인할 수 없었다. 수만의 병력이 밀려오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저 군대가 오테론으로 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과연 오테론이 버틸 수 있을까?’
두려우면서도 속이 답답했다. 군터는 조금 전 전령으로 보낸 그의 부하를 떠올렸다. 군터는 그를 보내기 전에 따로 귀띔을 했었다. 벨리사에게 속히 몸을 피하라 전하라고.
‘일단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살마드에 소식이 닿고 원군이 도착하려면 시일이 걸린다. 지금 오테론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병력보다도 시간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끌려면 어찌해야 하겠느냐.”
“유격전뿐입니다.”
뒤편에 다가온 살라스가 답했다.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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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시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