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효하는 맹수 -->
“할렌. 벨리사를 부탁하마.”
“예.”
군터는 떠나기 전 할렌에게 벨리사를 부탁했다. 할렌은 명을 받으면서도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호전적인 할렌은 그를 따라 종군하고 싶어 했다. 평시였다면 군터도 할렌을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벨리사는 거동도 조심해야 했다. 여자 노예 둘이 있지만 그 둘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난 네게 내 가장 소중한 것을 맡겼다. 그만큼 너를 믿기 때문이다.”
어깨를 짚으며 믿음을 이야기하니 할렌의 눈이 빛났다. 아쉬운 기색은 깔끔하게 사라지고 굳은 사명감이 들어섰다.
“맡겨 주십시오.”
“그래. 부탁한다.”
군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모커스에 올랐다. 묵직한 몸을 태우자 모커스가 작게 투레질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구나.”
군마로서 이미 황혼에 접어든 모커스였다. 아직까지 달릴 수 있는 것이 대견할 정도.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언제 힘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번 임무를 마치고 나면 이제 편히 쉬게 해주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한 번 더 달려야겠다.”
헝클어진 갈기를 쓸어주었다. 모커스가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군터는 모커스를 천천히 몰며 집결 장소로 향했다.
집결 장소에는 이미 몇몇 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라메인도 그 중 하나였다.
“이렇게 일찍 다시 함께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그라메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 임무에는 그라메인 직속 기병대와 그라니스의 기병 백인대 하나, 그리고 군터 기병대. 총 300기의 기병이 동원 되었다.
“사령관께서는 염탐에 가능성을 두셨지.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야. 염탐을 위한 병력으로 이백은 너무 많지 않나?”
염탐의 기본은 은밀함이다. 그런 면에서 이백은 너무 많다. 그 정도 수가 몰려다니면 눈에 띄지 않기가 더 힘드니까 말이다.
“방어선을 돌파한 뒤 흩어졌겠지요.”
“흐음.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뭔가 껄끄럽단 말이야.”
약탈자라는 말을 종종 입에 담기는 하지만, 실상 초원에서 약탈자들이 오테론의 깊숙한 곳까지 내려온 적은 드물었다. 다만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그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에 항시 경각심을 가지고 민감하게 대할 뿐.
“프리아헨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일단은 그래야 하지 않겠나.”
프리아헨은 이번에 약탈자들이 지나친 요새의 이름이었다. 그라메인은 우선 요새를 기점으로 하여 근방을 샅샅이 수색할 계획이라 했다. 군터가 듣기에도 타당한 계획이었다.
“자! 다 모인 것 같으니 그럼 슬슬 출발할까.”
훈풍이 불어와 기수가 든 그라메인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라메인이 투구를 쓰려다 말고 하늘을 올려보며 헛웃음 지었다.
“허참! 영 적응이 안 되는 날씨란 말이야.”
내리쬐는 해가 따스함을 넘어 덥게 느껴졌다. 적어도 군터는 그랬다. 그는 남들보다 추위를 덜 타는 대신, 더위는 더 심하게 탔다. 그는 그 사실을 태어나서 오늘 처음 확인했다. 갑옷 안에 받쳐 입었던 모피들도 모두 벗어 말 안장에 따로 묶어 두었다. 그는 지금 갑옷 안에 얇은 옷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라메인의 말마따나, 영 적응이 안 되는 날씨였다.
*
“영 적응이 안 되는 날씨군.”
따스한 햇살. 가느다란 털로 간질거리는 것 같은 바람. 온기가 피어오르는 대지.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족장. 지금쯤이면 성에서 병력을 내보냈을 겁니다.”
사내는 넘실거리며 흐르는 구름의 물결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평야를 눈에 담았다.
“그렇겠지. 신경 쓸 것 없다.”
성에서 병력이 얼마나 빠져나오든, 얼마가 들어가든, 그런 것들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서두른다. 혹 놈들이 낌새를 채고 물건을 빼돌려버리면 헛고생만 한 셈이 되니.”
“예.”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이들도 하나둘씩 일어섰다.
“얼마나 걸리지?”
“이틀이면 됩니다.”
“하루에 끊는다.”
“하지만 말들이…….”
“말은 그곳에도 많을 것 아닌가.”
사내는 다소 굳은 얼굴인 부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손으로 툭툭 쳤다.
“초원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 영원히 초원에서만 박혀 있게 된다. 제국이 왜 강한 줄 아나?”
“모르겠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죄다 이용해서야. 놈들은 실용적이지. 그러지 못했던 놈들은 모두 죽고 망해서 제국의 땅에 묻혔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고루한 사고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놈들에 맞설 수 없다. 알겠나?”
“…예.”
“좋아.”
사내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의 몸이 날갯짓하는 새처럼 가볍게 떠올라 말 위에 안착했다. 방금 전 부하의 볼을 두드리던 손이 이번엔 말의 목 언저리를 쓸었다.
“쉽게 말에 타는 것처럼 내릴 때도 쉽게 내릴 수 있어야지. 그러지 못한다면 그건 반쪽짜리가 아닌가.”
사내는 콧김을 뿜어대는 말을 앞으로 몰아가며 다시 한 번 위로 고개를 꺾었다. 드문드문 구름이 흐르는 하늘이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사내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눈에 담은 채 홀린 듯 중얼거렸다.
“이 하늘. 이 땅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
그라메인이 이끄는 기병대는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동했다. 그렇게 길을 재촉한 결과 그들은 이틀이 되지 않아 프리아헨에 닿을 수 있었다.
“그라메인님. 면목이 없습니다.”
요새 주둔군을 이끄는 백인대장들이 그라메인을 맞았다. 모두 죄인 같은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됐네. 이백이나 되는 기마가 뚫고자 한다면 초소가 문제겠는가. 그나마 요새를 사수한 것만 해도 충분히 할 몫을 한 셈일세.”
그들은 그라메인의 위로에도 표정을 피지 않았다.
“요새를 사수한 것이 아닙니다. 놈들이 지나쳐 갔을 따름이지요. 초소에서 올라온 봉화를 보고 임전태세를 굳혔을 때 놈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습니다. 부랴부랴 전령을 급파하긴 했지만, 저희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게 잘한 일이라는 거야. 어설프게 초소의 병사들을 구원하겠답시고 요새 밖으로 나갔으면 모두 각개 격파를 당했을 걸세.”
풀 죽은 그들을 적당히 달랜 그라메인은 인근의 지형을 표시한 지도를 펼치고 회의를 시작했다.
“우리의 최우선 임무는 어디까지나 수색이다. 따라서 군을 스물 단위로 쪼개어 운용하려 하네.”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군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메인이 지도를 짚어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넉 달 간 고립되었었다는 것은 놈들도 알고 있을 터. 시답잖게 화전민이나 사냥꾼 마을을 털겠다고 넘어온 건 아닐 것이야. 그렇다고 고작 이백 남짓으로 오테론성을 지나 남하 하려는 생각도 아닐 테니, 놈들이 숨어들 수 있을 만한 곳 위주로 수색을 시작하세. 각 백인대별로 구역을 할당하고, 보고는 이틀 간격을 유지하도록 하지.”
“옛!”
*
두두두!
수백 개의 말발굽이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사내는 선두에서 양팔을 늘어뜨린 채 환히 웃었다.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곳. 하지만 그의 눈에는 높고 넓은 성벽이 훤히 들어왔다.
“저곳인가!”
그는 아주 오랜만에 진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을 뭐라 특정하여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즐거움에 가까웠다.
“대족장! 말들이 한계입니다! 이래서는 성벽 아래에 닿자마자 쓰러져버릴지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부하의 우려를 일축한 사내는 거품을 물기 시작한 말 위에서 느긋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댕-! 댕-!
“오오. 정말로 종을 치는군. 어지간한 뿔 나팔보다 더 크게 울리는 듯해.”
오테론의 성벽이 큼직하게 보일 즈음, 오테론에서도 그들의 접근을 알아챘다. 종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고, 활짝 열려있던 성문이 닫혔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한 병사들이 성벽위로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계속 달린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말들이 하나둘씩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발사 준비!”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활을 들었다. 화살이 시위에 걸리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사내는 씩 웃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고생 많았다.”
그는 거친 소리를 내기 시작한 말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훌쩍 몸을 띄워 안장을 밟고 앉았다.
“발사!”
슈슈슝!
족히 수백 발이 넘는 화살이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사내가 뛰어올랐다. 그를 태우고 있던 말이 무릎이 꺾여 앞으로 나뒹굴었다. 울부짖는 말 위로 수십 발의 화살이 틀어 박혔다.
쿵!
말을 밟고 뛰어오른 사내는 수직으로 쏘아올린 화살처럼 높게 떠오르더니 성벽 위로 뚝 떨어져 내렸다.
“뭐, 뭐야!”
그가 떨어진 자리 바로 앞에 있던 병사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가 한 발자국을 뒤로 물러난 순간, 몇 줄기 검은 선이 그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푸확!목 위의 얼굴이 몇 갈래로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그는 피 묻은 손톱을 입에 가져가 핥았다.
[으음.]
앞으로 숙였던 몸이 곧게 펴졌다. 자줏빛 눈에서 같은 색의 흐릿한 연기가 흘렀다. 그는 한참 낮은 곳에 있는 병사들을 쓸어보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그 사이 그 어떤 용기 있는 병사도 그에게 덤비지 못했고, 심지어 움직이는 이조차 없었다.
오오오오오!
여기저기서 흉포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의 검은 입가가 비틀렸다.
“끄아아악!”
살육의 소리는 금세 성벽 위를 뒤덮었다.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검은 괴인, 혹은 짐승들은 그들의 저항을 가뿐히 짓밟았다. 창칼보다 날카로운 발톱은 갑옷이든 살점이든 모두 가뿐히 찢어발겼다. 가볍게 휘두르는 팔에 사람의 몸은 박살이 나 나뒹굴었고, 바로 앞에서 쏜 화살은 그들의 가죽을 뚫지 못했다.
“대족장.”
샛노란 안광을 토하는 괴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계속 높다란 첨탑을 주시했다.
[찾아라.]
“예.”
고개를 조아린 괴인이 즉각 자리를 떴다. 쉬지 않고 들려오는 비명이 점점 더 멀어졌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