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효하는 맹수 -->
기적.
그것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궤의 뚜껑을 날려버리며 치솟은 빛의 기둥은 하늘을 꿰뚫었고, 밤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그 순간, 몸을 굳게 하던 추위가 움찔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매섭기만 하던 삭풍이 온화함을 머금었고, 입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던 입김이 종적을 감췄다.
“아아!”
병사들의 통제 때문에 일정 거리 밖에서 의식을 구경하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를 경배의 물결이 모든 이들을 물들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술사들이 멀찍이 날아가 버렸던 궤의 뚜껑을 다시 덮고 있었다. 군터는 우두커니 서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과 직접 마주하고, 심지어 그 신에게 창을 내지르기까지 했던 주제에 이런 기적(기적을 ‘이런’ 정도로 말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한 번 보고 벌렁거린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교도의 마을에서 맞닥뜨렸던 바칼이 그저 두렵기만 했다면, 이 기적은 한없이 따스했다. 어렸을 적 느꼈던 어미의 품보다도 더 자애로웠다. ‘신’이라는 것에 어느 쪽이 더 어울리느냐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후자였다.
눈물을 보이는 이들도 다수였다. 말단 병졸부터 십인장, 심지어 백인장들 중에서도 눈이 그렁그렁한 이들이 있었다.
“됐어. 이제 됐어. 오테론은 구원받은 거야…….”
누군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비웃지 않았다.
*
얼마간 솟아올랐던 빛의 기둥이 사라진 이후, 오테론에 내려앉은 추위가 빠르게 가시기 시작했다. 불과 반나절도 안 되어 평소의 날씨를 회복했고, 또 반나절이 지났을 때는 오테론의 토박이들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훈풍을 경험했다.
“그럼 이제 다 해결된 것입니까? 법보도 살마드로 돌아가는 것인지…….”
“아니. 일단은 한 보름 정도 두고 본다고 하더군.”
법보도 다시 봉인을 했다. 보름이 지났을 때도 지금과 같다면 모두가 행복하겠지만, 만약 다시금 추위가 몰려온다면 그때는 팔라미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일이 심각해지는 셈이다.
“잘 되겠죠. 신을 가둔 법보 아닙니까.”이제 법보 카락시아에 대한 정보에 대해 알 사람은 다 알았다. 어차피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인지라 딱히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기에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퍼져나갔다.
신을 가둔, 혹은 신이 잠든 법보라는 이명. 더군다나 직접 법보의 힘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제 더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더 이상 추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혹시 마님께 무슨 일이라도…….”
“아니. 괜찮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걱정은 없다. 다만.
‘이상하군.’
군터는 앉은 자리 옆에 세워둔 창에 눈길을 주었다. 부하들은 들리지 않는 듯하지만, 그는 들렸다.
창이 울고 있었다. 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들렸다. 잘게 흔들리는 떨림이 느껴졌다. 심지어 아주 약간, 감정까지도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가만히 마음을 기울이고 있으면 창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에 젖어 절로 기분이 음울해졌다.
‘희한하군.’
오랫동안 쓰인 병기에 귀기가 쓰이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특히 사람을 많이 벤 무기일수록 사념(死念)이 들러붙기 마련이라 점점 귀기가 강해진다. 흔하게 널린 괴담에서 등장하는 마검(魔劍)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같은 부류였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창검 역시 꽤나 많은 생명을 앗았으므로 귀기가 어느 정도 씌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기운을 머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감정까지 풀어낼 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묻어난 사념과 스스로 품은 념(念)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혼(魂). 술사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정령과도 같은 것.
“…….”
군터는 손을 뻗어 창대를 쥐었다. 그러자 은은하게 울음을 흘리던 창이 조용해졌다. 마치 어미의 품을 찾은 어린아이마냥.
‘전날의 그 일 때문인가?’
피먹이 천에 념을 부여하는 효능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사교도 마을에서 맞닥뜨렸던 바칼. 그 후에 창에 깃든 진한 원념.
그것이 그때 마주쳤던 바칼의 사념이고, 그것이 어제 해방 되었던 카락시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다는 것. 그 외에는 달리 이 기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창을 쥐고 있으니 창이 느끼는 감정이 보다 진하게 전해져왔다.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을 감싼 안도감.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안도하는지는 몰라도, 그러한 감정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희한한 것은, 창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음에도 전혀 혼란스럽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마치 그것이 본래 그의 감정인양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창을 쥐고 있는 것도, 놓고 있는 것도 전혀 껄끄럽지 않았다. 이 역시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이었다.
‘술사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까.’
그들에게 묻는다면 아마 괜찮은 조언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서 묻기는 다소 꺼림칙스러웠다.
살마드에서 오테론으로 향하는 두 달 여의 시간 동안 술사라는 이들을 지켜본 바, 그들은 지극히 오만하고 이기적이었다. 게다가 지적 호기심에 대해서는 무섭도록 파고드는 면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쩌면 그들의 그런 지적 호기심을 끌지도 모르는 것을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군터는 그들로부터 달갑지 않은 관심을 받게 되는 일은 되도록 사양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현상이 그다지 부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물론 현재까지만 놓고 본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긴 해도 말이다.
‘그래. 술사에게 묻더라도 나중에 하는 게 낫겠어.’
지금 법보 수행의 임무를 맡고 있는 술사들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들에게 물었다가는 바칼에 관한 것이 틀림없이 거론될 것이고, 아마 추궁 비슷한 것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 되면 조금 골치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술사에게 조언을 구하더라도 추궁을 당할 염려가 없는 이에게 구하는 편이 낫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더라도.
‘특별히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지만.’
이 기현상이 시작된 것은 어제 있었던 의식 직후였다. 그 자리에는 술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창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그게 아니면 정신이 없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군터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그 무녀 계집도 있었군.’
일전에 막시밀리언에게 바쳤던 계집.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무녀 계집은 한 눈에 그의 창에 붙은 원념을 꿰뚫어 보았다. 그 계집이라면, 지금의 현상도 알아볼지 모른다.
‘살아있기는 한지 모르겠군.’
막시밀리언에게 바친 이후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이야기를 들은 것도 없었다. 예쁘고 묘한 색기까지 있는 계집이었지만 과연 지금까지 숨이 붙어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무녀는 사내에게 미움을 받기 쉽다. 신과 통하는 무녀는 이따금씩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보이고, 이런 행동들은 사내로 하여금 꺼리는 마음을 들게 한다. 몇 번 육욕을 풀기 위해 안기는 쉬워도 오랫동안 끼고 살기에는 껄끄러운 감이 있는 것이 바로 무녀였다. 물론 막시밀리언은 선물 받은 다음날 그 계집을 두고 ‘좋은 선물’이라 표현했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갔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참! 그거 들으셨습니까? 오늘부터 요새로 보급대가 출발한답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간 추위로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으니까.”
에둘러서 원활하지 않다지, 실은 거의 꽉 막힌 수준이었다. 요새에 비축된 군량을 최대한 아껴 먹어야 했고, 한파를 헤치고 교대를 하러가며 최대한 짊어지고 가야했다. 4개월 간 초소 경계는 포기했었고, 그나마 요새에 병력을 주둔시킨 것도 반쯤 억지 수준으로 해낸 것이었다.
“아이고. 그래도 우리는 휴식이니까 말입니다. 당분간은 원 없이 회포나 풀랍니다. 요번에 상단들이 들어오면 들어온 계집들 전부 다 한 번씩 맛볼 생각입니다.”
“마음대로. 하지만 멍청하게 매병이라도 걸리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라.”
“아이고! 거참! 매병이라뇨! 말이 씨가 됩니다!”
언제나 그랬듯, 프레드릭은 이번에도 좋은 놀림거리였다. 군터가 운을 띄우자 다른 부하 십인장들도 한 마디씩 거들며 프레드릭을 골렸다. 그의 빈약한 아랫도리와 관련된 것이 주였다.
“상단들은 언제쯤 도착할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마다 앞 다투어 달려올 테니까요.”
“엉?”
“오테론은 넉 달 동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도시 내의 물자가 상당히 고갈된 상태인데, 당연히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요. 먼저 오는 자가 더 많이 팔 수 있을 테니 당연히 잠을 줄여가면서라도 달려오지 않겠습니까?”
“오오! 그렇구만! 역시 막내야.”
살라스의 말마따나 상단들은 경주라도 하듯이 달려올 것이다. 그들이 성문을 넘는 순간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오테론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또한 보름 정도겠군.’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출발한 상단이 오테론에 닿기까지 빠르면 보름. 술사들이 지켜보고자 하는 시간 또한 보름이다.
앞으로의 보름이 오테론의 향방을 판가름할 것이다.
*
보름을 내다본 예상은 불과 닷새만에 깨졌다.
“군터님! 속히 사령부로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군터는 벨리사를 안심시킨 후 경무장만 한 채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모커스를 몰고 사령부로 향했다. 최대한 서두르라는 병사의 말에 따라 거침없이 말을 달렸다.
“무슨 일입니까?”
막시밀리언을 비롯한 세 명의 천인장은 이미 자리에 모여 있었다. 군터는 평소 알고 지내던 백인장의 옆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백인장 역시 들은 것이 없는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사령관 무알 카빌라이드가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굳어진 그의 안색이 상황의 중요성을 알리는 듯했다.
“약탈자들이 넘어왔다. 제2 요새의 네 개 초소가 뚫렸다. 그 수는 대략 이백 정도로 추정된다.”
“날이 풀리자마자 들이닥쳤군요.”
그라니스가 중얼거렸다. 동시에 일찌감치 얼굴이 일그러져있던 투스바이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이백이든 삼백이든, 놈들의 수급을 모조리 베어 오겠습니다!”
“아아, 진정하게. 근 4개월 간 두 요새를 비롯해 초원 쪽의 방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당장 넘어온 야만인 놈들의 위치 파악이 되지 않고 있어. 그러니 일단은 기병대가 움직인다. 그라메인.”
투스바이언의 바로 옆자리에 있던 그라메인이 벌떡 일어섰다.
“예!”
“고된 임무를 마친지 이제 막 사흘이지만, 자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네.”
“문제없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약탈자라고는 하지만 놈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개인적으로는 탐색일 거라 생각한다만.”
초원에서도 오테론을 뒤덮은 아찔한 한기는 알 수 있었을 터. 때문에 추위가 걷힌 오테론을 염탐하고자 하는 움직임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한들 일단 놈들이 아국의 땅을 밟은 이상 방심할 수는 없다. 거기에 가뜩이나 어수선한 상황이니, 모두 언제든 출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놓지 말도록.”
“옛!”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