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1화 (71/1,064)

<-- 쿠엘단의 법보 -->

군터는 오테론에 돌아오고 사흘 동안 바깥출입을 대부분 삼간 채 거의 칩거생활을 했다. 함께 임무를 떠났던 부하들도 벨리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대장님 귀찮게 하지 않기’에 돌입했다. 덕분에 군터는 이따금씩, 윗사람들의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이 있을 때만 잠깐씩 나갈 뿐,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머물며 벨리사와 함께 보냈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할 테니까.”

군터는 벨리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심지어 그녀를 위해 솜씨 괜찮다는 요리사까지(물론 여자다) 고용했다. 그는 아내를 침대에 유폐시키다시피 했는데, 너무 과하다는 벨리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아내의 말 중 유일하게 듣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 몸조심을 해야 한다더군.”

“유리아는 안 그랬다는데요.”

“유리아는 당신과 달라.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지도 않았고, 찬바람을 쐬지도 않았어. 유리아는 초원의 여자야.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한 당신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거야.”

물론 딱히 깊게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둘러댄 말이었는데 벨리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은근히 발그레해져서는 몇 번 입만 우물거렸다.

“아이고. 대장님. 그렇게 좋으십니까? 얼굴이 아주 활짝 피셨습니다 그려.”

칩거 이틀 째 되던 날에는 프레드릭과 몇 부하들이 집에 들렀다. 각기 손에 조그마한 짐들을 들고 있었는데, 모두 산모에 좋다는 것들이었다.

“조금씩 각출해서 사왔습니다. 많이 드시고 몸 챙기셔서 건강한 아기씨 낳으시라고요.”

“그래. 고맙다.”

식사라도 하고 가라 했지만 부하들은 폐 끼치기 싫다며 선물만 전달하고 재빨리 물러갔다. 몇 명만 온 것도 너무 많이 와 부산스럽게 굴기 싫어서라 했다.

‘평소에는 경박한 놈들이…….’

사실 그러고 보면 그의 부하들 중에는 살라스를 제외하면 그보다 나이가 적은 이가 드물었다. 군터도 이제는 2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지만 그의 부하들은 30대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려 깊음도 연륜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정말…아이 덕분에 어미가 호강하네요.”

벨리사가 수북이 쌓인 선물들을 보며 말했다. 군터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군. 이 녀석이 세상에 나오면 대접 좀 해줘야겠어.”

“당연히 그래야죠. 여자 아이면 공주처럼, 남자 아이면 왕자처럼 키울 거에요.”

제법 당차게 말하는 벨리사. 그에 군터가 피식 웃었다.

“왕자나 공주처럼이 어떤 건데?”

벨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귀하게 키운다는 거죠.”

“그래. 그렇게 키우자. 우리의 공주님으로, 왕자님으로.”

군터가 벨리사의 탐스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슬쩍 뒤로 몸을 빼려 하자 슬며시 등뒤로 손을 받쳐 막았다.

“무리하지 마. 가만히 있어.”

“…너무 하는 일 없이 노는 것 같잖아요.”

“공주님, 왕자님으로 키우고 싶다면서? 그러려면 당신도 왕비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하게는 되어야지 않겠어?”

“무슨…….”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벨리사가 앙증맞은 주먹으로 군터의 가슴을 두들겼다. 물론 아프기는커녕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지금은 무료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아이를 가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몇 번 봤으니까.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한나절 내내 말을 타던 여자도 아이를 가지고 나면 점점 말을 타기가 힘들게 되지. 특히 배가 나오기 시작할 즈음엔 오래 걷는 것도 힘들어 해. 튼튼한 초원의 여인도 그럴진대, 당신은 오죽할까.”

“나도 튼튼해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구요.”

그러면서 그녀는 가느다란 자신의 팔뚝을 톡톡 쳐 보였다. 대체 뭘 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술이 들어간 사내들이 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그녀가 퍽 귀엽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당신, 분발해야겠군. 잔뜩 쌓였어.”

산모를 위한 선물은 부하들에게서만 오지 않았다. 막시밀리언도 진즉부터 꾸준히 선물을 보내고 있었고, 이번에 새로이 친분을 쌓은 그라메인도 두둑이 보약 같은 것들을 보냈다. 그 외에 군터와 그럭저럭 알고 지내는 이들이 한 가지씩은 선물을 보내니, 벨리사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 이것들을 다 먹어치울 수 있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많이 쌓였다.

“당신도 좀 도와야죠. 나만 돼지로 만들 셈이에요?”

“당연하지. 몰랐나?”

“뭐라고요?”

“당신의 몸을 봐.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가늘잖아.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몸이 더 튼튼해져야 해.”

“살이 찐다고 튼튼해지나요?”

“글쎄. 꼭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당신한테는 살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군. 포동포동하게 좀 찌라고.”

“이러다 돼지처럼 되면 싫어할 거잖아요.”

“그럴 일 없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마음껏 편하게, 게으르게 지내라고.”

“게으르게 지내라는 건 또 뭐에요?”

군터는 대답 대신 픽 웃었다. 그리고 쌓여있는 선물 더미를 눈짓으로 가리키고는 방을 나섰다.

* * *

“준비는 다 됐소?”

“예. 사령관께서 미리 준비를 해놓으신 덕입니다.”

무알 카빌라이드와 페트리온이 의식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카락시아를 언급하셨다고 했을 때는 그저 어느 정도 이쪽 방면에 식견이 있으신 줄은 알았습니다만, 이리도 상세히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 선친께서 술사이셨소. 비록 나는 재능이 부족하여 선친의 뒤를 따르지는 못했지만, 물려받은 서적도 제법 있고 어렸을 적에는 직접 배우기도 했었지. 기본적인 의식에 관한 것쯤은 어느 정도 꿰고 있다오.”

“그렇군요. 덕분에 오늘 아침에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언제든 명하시면 의식은 시작될 겁니다.”

“길게 끌 필요 없겠지. 오늘 밤이 마침 만월이니 바로 시작하는 것으로 합시다.”

“예.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페트리온이 제법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무알 카빌라이드는 지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 쉬었다.

‘이제는 이 긴 골칫거리도 해결이 되겠지.’

느닷없이 쏟아지기 시작한 폭설. 그 후로 무려 4개월 간 그는 하루도 편히 잠들 날이 없었다.

군정일치인 오테론에서 사령관이라는 것은 군대만 다스리고 끝나는 자리가 아니었다. 도시에 머무르는 시민들을 비롯해 도시의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도시가 고립되기 시작한 넉 달 전부터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 괄괄한 투스바이언조차 행동거지를 조심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고된,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손꼽힐 만큼 피 말리는 넉 달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원신이시여. 부디 이 척박한 곳의 종들을 굽어 살피소서.’

근래에 부쩍 신을 찾는 횟수가 늘어났다. 어쩌면 어느새 무성해진 흰 머리만큼 유약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외로운 도시의 노장은 쓰게 웃으며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뒤덮인 눈으로 본래의 색 대신 흰색을 입은 성벽들과 건물들이 보였다. 간간이 추위를 견디며 움직이는 시민들도 자그맣게 보였다.

이 모든 광경이 익숙했다. 지금껏 그는 그의 인생을 이곳에 녹여왔다. 인생의 절반, 그 이상을 이 도시에 쏟아 부었다. 그에게 오테론은 고향 이상의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검을 쥔 것이 언제였던가.’

무명으로 크게 이름을 날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때는 솜씨 좋다는 소리를 몇 번 정도 듣기도 했었다. 그가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한 실력보다는 제법 고명한 술사였던 부친의 후광 덕이었지만, 그는 자리에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스스로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최선을 다했노라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살아온, 버텨온 수십 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힘에 부쳤다. 더 이상은 자리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노쇠해지는 것은 육신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

남은 생은 보다 따스한 곳에서 보다 편히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 * *

중앙에 마련된 높은 단을 중심으로 백인장 이상의 장교들이 도열하고, 십인장 이하의 장병들이 각자 흩어져 경계를 섰다.

단 위에는 사령관 무알 카빌라이드를 비롯해 천인장들이 섰고, 술사들이 각 방위에서 의식을 준비했다.

둥!

술사 중 한 명의 신호에 따라 고수가 커다란 북을 두드렸다.

“qetroibuwebtuiq…….”

첫 번째 북이 울리자 술사들이 일제히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같은 크기의 돌을 앞에 두고 꿇어 앉아 있었는데, 그 돌들은 모두 중앙의 제단 위에 놓인 궤를 향해 있었다.

군터는 도열한 백인장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술사들이 앞에 둔 돌을 보고 있었다.

성인 허리 높이의 큼지막한 돌에는 기묘한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군터는 그 문양들이 낯이 익었다.

‘바칼의 문양.’

그것은 일전에 사교도 마을에서 봤던 것과 같았다. 마을 중앙에 있던 제단. 그 제단의 벽면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문양이었다.

‘법보에 바칼의 혼이 담겨 있다고 했지. 그와 연관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떠올리고도 제법 타당한 추측이란 생각이 들었다. 의식이 정확히 어떤 원리와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바칼의 힘을 이용하는 형식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둥!

또 다시 북이 울렸다. 벌써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였다. 술사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차 격렬해졌다. 동시에 그들의 앞에 놓인 돌들에서 은은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돌에 새겨진 문양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둥!

열한 번째 북이 울렸다. 빛은 이제 눈부실 정도로 강렬히 피어올랐다. 그 빛이 너무나 강하여 눈을 뜨고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술사들은 절을 하듯 몸을 숙였고, 무알 카빌라이드를 비롯한 장졸들은 눈을 감거나 몸을 돌렸다.

둥!

열두 번째.

“werbwerubi!”

술사들의 것으로 추측되는, 비명과 같은 목소리. 그리고 들린 한 줄기 굉음.

쾅!

빛이 하늘 높이 뻗어나갔다. 빛이 어둠 가득한 하늘에 닿자 자욱하던 구름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밤하늘임에도 해가 뜬 낮처럼 환해졌다. 그 순간 추위는 사라졌고, 낯선 온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모두가 이 신비로운 이적 앞에 무릎을 꿇었다.

* * *

“아!”

오테론에서 멀리 떨어진 곳. 높이 뜬 둥그런 달만이 어둠을 비추는 곳에서 한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저 멀리, 느닷없이 솟아오른 빛의 기둥이 하늘을 꿰뚫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전율했고, 탄식했다. 그 탄식은 오랜 기다림의 끝을 의미했으며,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기쁨을 내포했다.

그는 즉시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려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높이였으나 그는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바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땅을 박차는 그는 질주하는 말보다도 빨랐다. 바람을 파헤치며 내달린 그는 커다란 움막들이 즐비한 곳에서 걸음을 늦췄다.

“대족장!”

모닥불의 불빛이 사내를 밝혔다.

사내의 눈은 고양이의 그것처럼 세로로 빛났다. 검은 갑각이 온 몸을 뒤덮었으며, 갑각의 사이사이로 은은한 빛을 내는 불그스름한 선이 지났다.

“놈들이 카락시아를 가져왔습니다! 오테론에서 솟은 빛의 기둥을 이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커다란 모닥불 주변으로는 수많은 이들이 흩어져 자유로이 있었다.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그들은 사내의 외침이 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 속에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흘렀다.

“…드디어.”

푹신한 가죽이 깔린 커다란 의자.

그곳에 반쯤 누워있다시피 하던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무릎 꿇은 사내와 같은 세로의 눈. 하지만 노란 색이 아니었다. 진한 자줏빛으로 빛나는 눈이 무릎 꿇은 사내를 떠나 먼 곳을 응시했다. 제국이, 오테론이 있는 방향이었다.

“모두들! 오랫동안 지루했을 것이다!”

모든 시선이 사내에게 향했다.

“참으로 오래도 참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시간을 죽이는 것도 이제 끝이다!”

사내가 들고 있던 잔을 모닥불에 던졌다. 독한 술을 머금은 불이 크게 치솟았다.

“초원의 아들들이여! 지금부터는 축제다! 사냥을 시작하자!”

오오오오오-!

거친 바람이 몰아쳤다. 동시에 숨죽이고 있던 무수한 이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받는 것은 처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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