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70화 (70/1,064)

<-- 쿠엘단의 법보 -->

힘겨운 여정 끝에 일행은 오테론에 도착했다.

“씨발. 어떻게든 살아서 왔구나.”

발에 동상을 입은 병사들 중 일부가 발가락을 잘라내는 일이 있었다. 그래도 목숨을 잃은 이들은 없었으니 다행이라 봐야 했다. 다만 군터는 술사들이 조금만 도와주었더라면 그 사소한 사고마저 없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태연하게 오테론의 흰색 성벽을 바라보는 술사들이 다소 고깝게 느껴졌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쇼. 나중에 뒤탈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구요. 게다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하잖습니까.”

프레드릭이 말했다.

“흠.”

병사들이 추위로 고통 받을 때 그라메인이 나서서 술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도움 요청을 능력 밖이라며 거절했다. 그들은 모두 법술사이고, 추위를 덜어주는 술법 같은 것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부족한 점을 스스로 까발리면서까지 그리 말하는데, 그만하면 사실 아니겠습니까.”

주술사들에 비해 법술사들은 능력의 폭이 좁다고 했다. 프레드릭의 말처럼 그들에게 추위를 덜어줄 능력 같은 것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들에게 능력은 없어도, 도구는 있었다.

‘그 법보를 잠깐이라도 빌려줬더라면…….’

물론 그들에게 그렇게 해줘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나무처럼 굳어버린 다리를 부여잡고 울부짖던 부하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태연하게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수다나 떨던 그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 붙들고 따져 봐야 의미 없겠지.’

프레드릭의 조언을 따라 분기를 꾹 눌렀다. 어차피 다시 볼 일 없는 사이다. 저들을 노려보며 이빨이나 갈아대느니 몸이 상한 부하들을 위로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젠장. 드디어 끝났군. 성에 들어가면 뜨신 물에 몸이 녹을 때까지 들어가 있을 것이야. 군터 자네는 뭐부터 할 텐가?”

“대장님부터 뵈어야겠지요.”

“에잉? 어차피 사령관께 보고드릴 때 같이 들을 것 아닌가?”

“그래도 따로 찾아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충심이 지극하구만. 막시밀리언 대장이 자네를 유독 아낀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럴 만도 했구만. 이런 부하라면 아끼지 않을 도리가 없겠어. 그래. 알겠네. 그럼 나중에 한 잔 하세나.”

“예. 언제든지 편하실 때 불러주십시오.”

“하하! 그래그래. 이야! 오테론아! 잘 있었느냐! 그라메인이 돌아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오테론의 성벽을 향해 그라메인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

군터는 그라메인과 함께 사령관에게 보고를 마친 후, 따로 막시밀리언과 그의 자택으로 가 자리를 가졌다.

“고생이 많았다. 성 안에 박혀 있는 나조차 바깥출입을 꺼리게 되는 판인데, 네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보지 않아도 훤하구나.”

평소였다면 겸양의 말을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입을 다문 채 말을 아끼고 다른 화제로 돌렸다.

“이곳 상황은 어떻습니까?”

“사령관은 이야기하길 꺼렸지만, 사실 별로 좋지 않다. 성문은 모두 닫힌 지 오래고, 비축해두었던 물자도 평시의 삼분지 일 수준까지 떨어졌다. 특히 장작을 비롯한 땔감이 문제다. 길어봐야 한 달이 한계야.”

“심각하군요.”

“맞다. 그 안에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만큼 날이 풀리지 않는다면…정말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 법보라는 것이 기대만큼 효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지.”

막시밀리언은 상당히 피로해 보였다. 눈 밑에는 그늘이 졌고 안색은 초췌했다. 그것은 오테론의 좋지 않은 사정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지만, 또 온전히 그 때문은 아닌 듯했다.

‘이상하군.’

무슨 일이냐 묻지는 않았다. 부하가 상관의 속마음까지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터는 곧 막시밀리안의 자택을 나와 벨리사가 기다리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여보!”

벨리사가 대문 앞에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상당히 달랐다. 조금 몸에 살이 붙은 것 같았는데, 특히 아랫배가 살짝 볼록해 보였다.

“당신…조금 살이 붙었군.”

진한 입맞춤을 나누고 슬그머니 아랫배를 보며 말하니 벨리사가 대번에 샐쭉해졌다.

“정말 눈치 없네요. 이게 그냥 살찐 걸로 보여요?”

“음?”

군터는 무슨 소린가 싶어 바보처럼 눈만 끔뻑였다. 그러자 잔뜩 삐친 벨리사 대신 유리아가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 아이를 가지셨습니다. 이제 4개월 하고도 보름이 조금 넘으셨습니다.”

“아, 아이라고?”

군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벨리사와 유리아, 그리고 벨리사의 볼록 나온 아랫배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벨리사의 안색이 더 좋지 않게 변했다. 그녀는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혹시…기쁘지 않으신가요……?”

“기쁘지 않냐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두 여인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목소리를 낸 군터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벨리사의 아랫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

눈을 감고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벨리사의 심장이 뛰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보다 더 작았다. 군터는 귀를 대고 있는 살가죽 너머에 아주 작은,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

그것은 황홀한 경이였다. 오직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자그마한 소리로만 존재를 알리는 미숙한 생명은 그에게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충격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여보. 그만 해요. 부끄러워요.”

“응? 뭐라고 했어?”

벨리사는 살짝 젖어 있는 군터의 눈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이제껏 군터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그런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한 군터는 항상 강하고, 그러면서도 자상한 남편이었다.

“…기뻐요? 아이가 생겨서?”

군터는 다시 그녀의 배에 귀를 댄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함에 젖었던 벨리사의 마음이 뙤약볕에 드러난 눈송이처럼 부드럽게 녹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군터의 머리를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라일라!”

별채에 들어선 막시밀리언이 대뜸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그마한 불빛 하나도 없이 어둠에 잠긴 실내는 한 걸음 앞조차 내다보기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막시밀리언은 미리 준비해 둔 등에 불을 붙였다.

‘지독하군.’

실내에는 빛뿐 아니라 온기도 없었다. 바람 없이 머무는 찬 공기는 건물 바깥과 별 다르지 않았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는 묘한 음습함마저 감돌았다.

“끝까지 박혀 있을 참인가?”

막시밀리언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있을 곳은 뻔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고, 한 달 전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라일라!”

그녀는 두터운 담요를 뒤집어 쓴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막시밀리언이 왔음에도 눈길도 주지 않고, 덜덜 떨며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아니, 지금 당장…….”

“젠장! 이제 그런 헛소리는 지긋지긋하다!”

“헛소리가 아닙니다. 정말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의 모든 이들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겁니다. 이 추위는 신의 저주입니다. 누구도 악의를 품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장 이곳을 떠나야…….”

“살마드로 갔던 병력이 돌아왔다. 술사들과 법보도 함께. 이제 이 지긋지긋한…저주든 뭐든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내 할 수 있는 최대한 자네를 비웃어주겠네.”

“…….”

막시밀리언은 입을 닫은 라일라의 턱을 붙들었다. 그리고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무력하게 벌린 입에 혀를 밀어 넣고, 이불 속에 묻힌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헐렁한 옷가지는 손 한 번 넣고 떨치니 모두 벗겨졌다.

“아직도 걱정이 되나?”

“…신의 저주입니다. 누구도 신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재밌군. 이번에 가져온 법보는 카락시아라 불리지. 무슨 뜻인지 아나?”

“위대한 승리.”

“맞아. 제국의 군주가 신에게서 거둔 위대한 승리지. 듣기로 그는 쓰러뜨린 신의 일부를 비밀스런 두루마리에 봉인했다더군.”

막시밀리언이 라일라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도착한 법보, 카락시아다. 말하자면, 거기에도 신이 깃들어있다는 것이지.”

“…….”

“자네의 말처럼 이 추위가 저주라 해도 상관없어. 자네의 생각보다 제국은 위대하거든. 신이건 뭐건, 그 무엇도 제국을 위협할 수 없지.”

그가 거칠게 라일라의 다리를 벌렸다. 라일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다만 전처럼 떨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막시밀리언은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의 말이 그녀의 두려움을 걷어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일부터 의식이 시작될 거다. 물론 준비하는 데 며칠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이 추위도 곧 물러날 것이야. 그리 되면 자네는 지금까지의 추태를 부끄러워하게 되겠지. 그 얼굴이 기대가 되는군.”

라일라는 이 기묘한 추위가 처음 들이닥쳤을 때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안색이 좋지 않아 몸 상태가 좋지 않은가 했지만, 점점 더 그런 기색이 심해지기에 물었더니 악몽을 꿨다 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점점 더 심한 반응을 보였다. 급기야는 유일한 취미였던 향 피우기마저 그만두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떨었다. 그녀는 추위가 아니라 두려움에 떨었다. 이따금씩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댔으며, 언젠가 부터는 당장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며 그에게 하소연을 했다. 하루하루 그녀가 피폐해져가는 만큼 막시밀리언의 심사도 좋지 않게 흘러갔고, 도저히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라일라 덕분에 그 역시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야.’

얼마 남지 않았다. 막시밀리언은 추위가 가신 후 다시 본래 모습으로 들어온 그녀를 어찌 골려줄까 궁리했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녀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것을 생각하니 이미 힘이 잔뜩 들어간 아랫도리가 더욱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