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엘단의 법보 -->
“힘든 임무를 함께하게 됐군. 잘 부탁하네.”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닷새째에 눈이 그치자 기마대는 즉각 오테론을 나섰다. 도시를 나서자마자 칼날 같은 바람과 뼈마저 뒤흔드는 무지막지한 한기가 일행을 위협했다.
“젠장! 몇 겹씩 싸매도 아무 소용 없구만!”
그들은 의식적으로 떠들었다. 어떻게든 움직이면서 체온을 내지 않으면 그대로 말 위에서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단순히 공기를 쐬는 것만으로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추위였다.
“얼마나 남았어?”
“반 정도.”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면 미리 준비해 온 독한 술을 한 모금씩 머금었다. 술이 속을 덥히면 그제야 이 숨 막히는 추위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었다.
“그라메인님. 이쯤에서 쉴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더 이상은…나도 힘들군.”
살짝 드러난 몸의 털이란 털에는 얼음이 붙어 있었다. 평소보다 몸이 1.5배는 커진 그라메인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서 입술만 덜덜 떨고 있었다.
일행의 휴식처 겸 피난처는 운 좋게 발견한(사실은 한참동안 찾아 헤매어 간신히 찾은) 동굴이었다. 혹여 곰 같은 짐승이 있지는 않나 싶어 동굴 전체를 탐색했지만 특별히 동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일행은 즉각 모닥불을 피웠다. 불이 피어오르고 동굴 안을 덥히니 그제야 다 죽어가던 이들이 생기를 찾았다.
“정말이지 지독한 추위군. 내 반평생을 오테론에서 보냈지만 이런 날씨는 듣도 보도 못했네.”
그라메인이 모닥불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넌덜머리를 냈다. 군터 역시 동감이었다. 초원에서 태어난 그조차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살이 에이는 추위였다. 솔직히 오테론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걱정이 없었는데, 벨리사가 호들갑을 떨며 준비한 모피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그나저나…이번에 저희가 가져와야 할 법보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음?”
“법보라는 것이 신이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압니다만, 일개 물건이 이런 날씨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 나도 그렇다네.”
그라메인이 모닥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령관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그대로 따르는 것일 뿐. 솔직히 나도 아는 것은 별로 없다네. 내가 아는 건 단 한 가지뿐이야.”
“어떤……?”
“그 법보라는 것이, 쿠엘단님께서 남기신 물건이라는 거. 그 하나만 알고 있네.”
“쿠엘단…님이라면.”
그라메인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신기한 것을 본다는 듯이.
“뭐야? 모르나? 위대하신 여섯 군주의 이름을.”
“아……!”
그제야 군터는 쿠엘단이라는 귀에 익은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군주 쿠엘단.
군대를 이끌고 바크렌을 정복한 제국의 군주. ‘위대한 지혜’ 쿠엘단. 군터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바칼을 물리쳤다는 군주가 누구인가 싶어 살라스에게 물어 알아낸 이름이었다.
“우리가 가져와야 할 그 법보가, 쿠엘단님의 물건입니까?”
“그래. 그분께서 망국의 왕조를 몰아내고 바크렌에 황제폐하의 깃발을 꽂은 후,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며 한 가지 물건을 놓고 가셨다고 하더군. 살마드에 있는 원신의 성전에 말이야.”
사실 지금까지는 임무라지만 명령을 받고 따른 것일 뿐, 별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져와야 할 법보라는 것이 군주 쿠엘단의 물건이라니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군주 쿠엘단이라.’
흥미가 동했다. 다른 제국인들은 군주에 대해 막연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군터는 그들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감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군주 쿠엘단이 쓰러뜨렸다는 흉신, 바칼의 잔재와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군주의 위업이라는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가 남겼다는 물건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명색이 법보라 불릴 정도라면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을 터. 그것을 본다는 것은 군주 쿠엘단의 편린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보통 전령이 오테론에서 살마드로 급파될 경우, 빠르면 스무날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전령이 아닌 다수의 병력이 움직인다면 거기에 열흘 남짓이 더해진다.
그런데 군터 일행이 살마드에 도착한 것은 거의 두 달이 가까워져서였다. 오테론을 벗어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모한 탓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간신히 오테론을 벗어났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하루도 차이가 나지 않는 거리인데, 이렇게까지 날이 다를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오테론이 겨울이라면 오테론 밖은 한여름이었다. 더위를 참지 못하고 온 몸에 걸친 모피며 두꺼운 옷가지들을 벗어던질 정도였다.
“미치겠군. 이래서야 살마드에 도착한들 미친 놈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겠어.”
그라메인의 걱정은 타당했지만, 정작 살마드에서 우려한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테론의 기현상은 이미 살마드에도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군터는 그라메인과 함께 곧장 살마드 내성으로 들어갔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성주님을 뵙게 될 거네. 행동거지를 각별히 주의하게.”
그라메인은 전에 없이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 그들은 바크렌의 최고 권력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성주님께서 들라 하십니다.”
시종장이라는 자는 성주의 앞에서 갖춰야 할 예절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그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지만 입장하기 전이 되어 기억나는 것은 일단 들어가면 한쪽 무릎을 꿇으라는 것과 고개를 들라 하기 전까지는 바닥만 보고 있으라는 것. 두 가지 뿐이었다.
“살마드의 주인을 뵙습니다.”
“살마드의 주인을 뵙습니다.”
바크렌은 제국의 속주(屬州)로서, 주도인 살마드의 성주가 사실상 전권을 가지고 주를 통치했다. 물론 황도에서 파견된 총독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임무는 통치가 아닌 감시였으므로 실질적인 공식적인 바크렌의 권력자는 눈앞에 있을 성주인 셈이다.
“고개를 들라.”
“옛!”
고개를 들었으나 성주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얇지만 짙은 가림막 같은 것이 성주가 앉아 있을 의자 앞에 통째로 쳐져 있었던 것이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성주의 의자로 이어질 것 같은 계단 끄트머리뿐이었다.
“오테론의 괴사에 대해서는 이미 전해들은 바가 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예. 그것이…….”
그라메인은 천천히, 실수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뚝뚝 묻어나는 진중한 말투로 오테론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폭설과 살인적인 추위, 그리고 그로 인해 고립된 오테론의 사정까지 모두 설명했다.
“사령관 무알 카빌라이드님께서 성주님께 올리라 한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서신이라.”
성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옆에 시립해 있던 시종 중 하나가 다가와 서신을 받아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허리를 낮추고 가림막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성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히…일리 있는 의견이군. 좋다. 법보의 반출을 허락하겠다. 의식을 위한 술사들도 내어주마.”
“감사합…….”
“그건 아니 될 일입니다.”
그라메인이 화색을 띠고 답하려던 순간. 낯선 목소리가 끊고 들어왔다. 한 사내가 알현실의 옆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곳이 성주의 알현실인데도 그러했다.
“…총독. 여긴 어인 일이오?”
성주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총독이라 불린 사내는 그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가림막 너머 성주가 있는 쪽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간과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급히 달려오는 길입니다.”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
“성주께서도 짓궂으시군요. 조금 전까지 오가던 이야기 말입니다. 쿠엘단님의 법보를 반출한다니, 그건 아니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느닷없는 폭설과 한파로 오테론이 고립되어 있소. 성전에 있는 법보라면 그 일을 능히 해결할 수 있지 않겠소?”
“자연현상에 의한 고립은 시일이 지나면 자연스레 풀릴 일인데, 그것에 왜 법보까지 사용해야 합니까?”
“사안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오. 오테론의 사령관 무알 카빌라이드가 보내온 서신이 있으니 총독도 한 번 보시겠소?”
“우는 소리를 설득력 있게 써놓았겠지요.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허나 오테론의 상황이 다소 좋지 않다한들 법보를 반출하는 것은 절대 아니 됩니다.”
총독이라는 자의 말을 듣고 있던 군터는 서서히 배알이 꼴려갔다. 자기가 직접 보지도, 겪지도 않은 일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멋대로 주절대는 꼴이 영 아니꼬웠다. 그것은 그라메인도 마찬가지였는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은 많아 보였지만 함부로 입을 뗄 수 없어 입술만 씹고 있었다.
“다른 도시였다면 나도 그리 생각했겠지. 하지만 오테론은 군사도시오. 다른 도시와 같이 볼 수는 없소. 당장 갈색초원의 야만인들을 어디서 막고 있다 생각하시오?”
“야만인들을 막는 것은 작은 일입니다. 하지만 법보의 반출은 진정 큰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설령 그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 해도 감수할 수 없는 심대한 위험입니다.”
“오테론 역시 바크렌의 도시. 바크렌을 통치하는 것은 내 일이오.”
“하지만 법보는 바크렌의 것이 아니지요. 쿠엘단님의 것이며, 또한 위대하신 황제폐하의 것입니다. 총독인 제게는 그것을 안전히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끄응!”
성주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짜증이 가림막 넘어서까지 생생히 전해졌다.
“그대들은 일단 물러가 있으라. 내일까지 답을 주도록 하겠다. 총독께서는 나와 이야기 좀 하십시다.”
성주의 명령에 군터와 그라메인은 예를 표한 후 그대로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성을 완전히 나설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성주와 총독의 알력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들은 것보다도 더하군.”
성에서 멀찍이 나와서야 그라메인이 툴툴댔다.
그가 말한 알력이라는 것은 군터도 익히 들은 바 있는 것이었다.
바크렌을 다스리는 성주와 그런 성주를 감시하며 견제하는 총독. 그들의 알력은 제국의 속주에서는 왕왕벌어지는 일이며, 또 마땅히 벌어져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일에까지 기 싸움을 할 필요가 있느냐 말이야.”
“어찌 생각하십니까. 법보는…….”
만약 총독의 뜻대로 법보의 반출이 불가해진다면 임무 실패일 뿐 아니라, 힘들게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어지는 셈이다.
“글쎄. 나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 자부하지만, 그래도 저런 높으신 분들의 의중은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워서 말이야. 내일이 되면 알게 되겠지.”
“…….”
허탈함과 짜증이 일었다. 군터는 부하들을 쉬게 하고 그라메인의 한 잔 하자는 권유에 응했다. 그간 별로 편한 사이는 아니었던 둘이지만 이번 임무에서 험한 여정을 함께한 때문인지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주 안주는 오늘 만난 ‘마음에 안 드는 높으신 분’이었다.
========== 작품 후기 ==========
염려 감사합니다.
만성질환인지라 종종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만, 글은 쓸 수 있는 상황에서는 꾸준히 쓰겠습니다.
6월이 가고 7월이 시작됐네요. 본격적인 여름인데 모두들 건강히 여름 맞이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