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66화 (66/1,064)

<-- 성숙. 유명세. -->

“어처구니가 없군. 날 놀리는 건가?”

황당할 만도 하다. 한 달 전에 서로 죽일 기세로 치고받았던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그 한 달 사이 하옥되어 있었던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사죄한답시고 무릎을 꿇으면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군터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저질러버린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투스바이언에게 용서를 받아야 했다.

“집어치워라.”

“황당하실 줄 압니다.”

“알면서 이러나?”

“용서받을 수 없다 해도 저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왜? 네 상관이 시켜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닙니다.”

잠시 군터의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투스바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말은 믿겠다. 그래서 대체 뭘 어쩌자는 거지? 내 용서 같은 건 뭐에 쓰려고? 내가 여기서 용서한다고 하면 뭐가 되기라도 하나? 응?”

“아군끼리 날을 세우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군이라?”

투스바이언의 입매가 비틀렸다. 비아냥거리는 말투다. 군터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같은 오테론 군이 아닙니까.”

“웃기는 소리! 너희 같은 놈들과 같은 취급하지 마라! 나와 내 병사들은 명예로운 제국군이다!”

투스바이언이 발끈하며 외쳤다. 그러자 군터가 표정 변화 없이 곧장 반문했다.

“그럼 저희는 뭡니까?”

“야만인이지. 고향에서도 쫓겨난 머저리들이고.”

“그리 생각 하신다면 왜 당장 죽이지 않습니까?”

“뭐?”

“정말 우리를, 저를 저 초원에서 말 달리는 야만인과 같이 생각하신다면, 이번에 하신 것처럼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아버리면 될 일 아닙니까. 어째서 그리 하시지 않느냐 묻는 겁니다.”

“하라면 못할 것 같으냐?”

“할 수 있다면 당장 하시죠. 저항하지 않고 깔끔하게 목을 내어드릴 테니.”

군터는 무릎 꿇은 그대로 목 언저리의 옷을 풀어 헤쳤다. 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힘껏 칼 한 번 휘두르면 깔끔하게 잘려나가리라.

“별 같잖은 배짱을 부리는구나.”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대로 제 목을 치시면 될 일입니다.”

두 손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아예 눈도 감았다. 온 몸이 묶인 채 참수형을 기다리는 죄수보다도 더 평온한 얼굴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투스바이언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치라면 못 칠 줄 아느냐?”

점점 다가오는 그의 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멎고서도 군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쉬익!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동시에 목을 두드리는 세찬 바람.

고통은 없었다. 단지 시린 예기만이 따끔하게 목을 간질일 뿐이었다.

“…담력 하나만은 인정해주마. 하긴, 겁도 없이 내게 맞설 때부터 어지간히 정신 나간 놈이라는 건 짐작했다만.”

군터는 눈을 떴다.

투스바이언의 칼날은 목의 바로 옆에 멈춰 있었다. 내려 보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이제 적의를 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형형히 빛나는 것은 여전했다.

“내가 널 용서한다한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상관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진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함이었습니다.”

“독방에서 한 달이 그리 컸느냐?”

“생각 말고는 할 게 없더군요.”

“그래? 나중에 마음이 싱숭생숭 하면 나도 한 번 들어 가봐야겠군.”

피식 웃은 투스바이언이 목옆에 멈춰두었던 칼마저 치웠다. 그는 그대로 칼을 땅에 박았다.

“난 내 가족과 무수한 부하들을 네 동족에게 잃었다. 머리로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가슴은 그걸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통제도 못하는 증오가 별로 옳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걸 어찌해 볼 생각은 없어. 왜인 줄 아나?”

“왜입니까.”

“이 증오라는 놈은 야만인 놈들을 쳐 죽일 때,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거든. 싸우고 싸워서 진이 쪽 빠져있을 때도 이 증오라는 놈만 있으면 팔팔하게 더 싸워나갈 수 있어. 그런데 이런 좋은 놈을 왜 버리겠나?”

군터는 이제 이 투스바이언이라는 자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는 막시밀리언이 말한 것처럼 마냥 멍청한 자가 아니었다. 정치나 처세 같은 것에 있어서는 모자란 면이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싸움에 있어서는 상당한 머리를 지닌 자였다. 자신의 감정마저도 무기로 쓸 줄 아는 자는 결코 흔치 않다.

“더군다나 난 네놈 상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놈은 장사치야.”

그의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난 전장에서 적을 만나면 어떻게든 빨리 때려죽일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놈은 저 적을 어떻게 다뤄야 땡전 한 푼이라도 더 떨어질까 대가리를 굴리는 놈이야. 난 그런 놈을 제국군으로 인정할 수가 없어. 그런 건 전장이 아니라 시장 한복판에서나 할 짓거리야. 넌 어떻게 생각하나?”

“…….”

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투스바이언의 말은 군터가 일찍부터 꺼림직스럽게 여기던 부분을 정확하게 찔렀다. 군터는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투스바이언의 말에 심정적으로는 동의했다. 전투를 두고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막시밀리언의 방식은, 솔직하게 그와는 별로 맞지 않았다.

하지만 군터는 막시밀리언에게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막시밀리언을 비판하는 말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군터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입을 꾹 다무는 것뿐이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투스바이언이 네 속을 내가 다 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모를 리가 없지. 그 자리(백인대장)에 오를 때까지 막시밀리언 녀석과 함께 했으면서 모른다면 그건 놈과 동류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넌 그놈과 동류가 아니야.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넌 막시밀리언보다는 오히려 내 쪽에 더 가깝다.”

“…….”

“한 가지 알려줄까? 내 휘하에도 너 같은 아쿼러즈가 있다. 다섯 놈이지. 백인장 한 놈에 십인장 넷이야. 원래는 더 있었는데 모두 전투 중에 죽었다.”

제법 놀라운 이야기였다. 군터는 이제껏 투스바이언이 약간 순혈주의자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쿼러즈를 그토록 싫어하던 그의 휘하에 아쿼러즈가 있다니.

“나는 물론이고, 내 휘하의 그 어떤 놈도 그 녀석들더러 야만인이라 하거나 아쿼러즈라고 멸시하지 않는다. 왜? 그놈들은 이미 숱한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전우이기 때문이야. 전장에서 피로 맺은 연 역시 태어나면서 지니는 혈연 못지않게 끈끈한 것이니까.”

그의 말은 가슴에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군터는 그것이 저 투박한 말솜씨 속에 숨은 투스바이언의 진심이라 생각했다.

“난 막시밀리언과 그 밑의 놈들을 전우라 생각하지 않아. 막시밀리언 놈은 말했듯이 장사치야. 그렇다면 그 밑에 있는 놈들은 뭐겠나? 내 눈에 너희들이 어찌 보이는지 알려줄까? 내 눈엔 너희가 장사치에게 고용된 용병으로 보인다. 돈만 주면 언제든 칼을 거꾸로 돌려 잡을 수 있는 버러지들로 보여. 그게 내가 너희를 좋게 볼 수 없는 이유고, 특히 너 같은 아쿼러즈들을 못마땅해 하는 이유다.”

투스바이언은 군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진 것을 확인하고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물론 억울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그게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봤자 넌 막시밀리언 놈이 명령하면 들을 것 아니냐? 이번의 노예사냥처럼 말이야. 내 말이 틀린가?”

“…….”

“부인하지 못하는군. 그래. 그러니까 내가 너 같은 놈들을 전우로 여길 수 없는 거다.”

투스바이언의 말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다. 막시밀리언이 이 자리에 있어서 투스바이언의 말을 들었다면 바로 조목조목 반박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반박을 다 듣고 나면 투스바이언이 틀렸다 생각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터는 그런 논지의 타당함과 상관없이, 투스바이언이 막시밀리언보다 더 군인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꽤나 불편하고 씁쓸했다. 투스바이언이 더 군인답다고 인정하는 것은, 동시에 그가 말한 ‘용병론’을 부분적이나마 수긍하는 것이었으니까.

“스스로는 표정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예?”

투스바이언은 웃고 있었다. 꽤 짓궂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거짓말은 잘 못하는 성격인가 보군. 내가 봤을 때 넌 그놈과 어울리지 않아. 이번에 노예사냥을 하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지 않았나? 어때?”

“…….”

“어떤 약점을 잡혔는지, 아니면 뭘 빚졌는지는 몰라도 내가 다 처리해주지. 내 밑으로 와라. 마침 백인장 자리가 하나 비어있는 참이다. 원한다면 밑에 부하 놈들을 다 데리고 와도 좋아. 내가 막시밀리언 놈과 사령관에게 가서 무릎을 꿇어서라도 원하는 대로 해주마.”

군터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투스바이언은 아직까지도 무릎 꿇고 있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 칼을 쥐고 있었던 그 손을.

“황당한가? 네가 조금 전 날 찾아와 사죄한답시고 했을 때, 나도 똑같이 황당했다. 하지만 나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진심이다. 넌 그 장사치 놈과 맞지 않아. 너도 그것을 알고 있다. 군터. 네가 지금 내 손을 잡는다면 그 순간부터 넌 아쿼러즈도 뭣도 아닌, 진정한 제국의 군인이다.”

활짝 펴진 손을 보고 살짝 흔들리던 군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넌 왜 날 따르느냐?”

“예?”

“그냥…궁금해져서 말이다. 너와는 따로 이렇게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잖느냐. 다른 뜻은 없으니 물음에 그대로 답하면 된다.”

살라스는 다소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떼었다.“대장님께 구명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다인가?”

“처음에는 그랬지요. 허나 지금은 대장님을 존경합니다. 무인으로서, 군인으로서.”

“낯간지럽군. 난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인간이 못 돼.”

군터는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여는 살라스를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는 조금 전 살라스가 채워준 잔을 들었다.

“내가 군인이 된 이유는 단순히 출세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잘 하는 일이 몸 쓰는 일이니 군인이 되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보자. 그런 단순한 생각뿐이었지. 그러다가 어찌 일이 잘 풀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 그러니 난 무인으로서든 군인으로서든 네게 존경받을 만한 위인이 못 된다. 무인의 긍지, 군인의 명예. 뭐 있으면 좋기야 하지. 하지만 거기에 목을 매지는 않아.”

마지막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때때로 드는 자괴감이나 미련 같은 것을 떨쳐내기 위한.

“넌 똑똑하니 내게 알려다오. 난 막시밀리언님께 큰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난 네가 날 따르는 것과 같이 그분을 따른다. 여기에 잘못된 점이 있느냐?”

“없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물으시는지…….”

“멍청한 나를 못 믿겠거든. 그래서 똑똑한 네게 묻고 싶었다.”

군터는 희미하게 웃으며 잔을 입에 가져갔다.

술은 썼다. 평소보다도 훨씬.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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