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숙. 유명세. -->
막시밀리언의 말은 맞았다. 군터는 그것을 출옥 다음날부터 알 수 있었다. 마주치는 다른 부대의 병사들이 멀리서 그를 보고 수군대거나, 가까이 지나는 이들은 깍듯이 군례를 취했다.
“이제 대장님도 유명인 다 되셨습니다.” 프레드릭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객쩍은 소리.”
“진짜라니까요? 여기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대장님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다 알걸요? 한 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그만.”
“쩝.”
입을 다물게 하는 무거운 한 마디. 프레드릭은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여차하면 크게 그의 이름을 부르짖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대장님 한 달 동안 컴컴한 데 계시더니 더 재미없어진 거 아십니까?”
“내가 굳이 널 위해 재미있어야 할 필요가 있나?”
“그것도 그렇지만…너무 쌀쌀맞아지신 거 아닙니까? 전에는 이렇게 장난 쳐도 적당히 어울려주셨는데요.”
“그랬나?”
“예.”
“그랬군.”
“…….”
프레드릭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군터는 묵묵히 모커스를 몰았다. 그러자 프레드릭도 투덜대며 그 뒤를 따랐다.
“일찍들 왔군.”
그의 집에는 이미 프레드릭을 제외한 십인장 모두가 모여 있었다. 한 달 간에 부대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 받기 위함이었다. 한 달은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짧기만 한 시간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요즘 대장님 덕분에 애들 기가 살았습니다. 투스바이언 천인대 놈들도 잠잠해졌고요.”
“그 싸움을 본 놈들이 한 둘이 아니잖습니까. 며칠 만에 부대에 소문이 싹 다 돈 모양입니다.”
“아직도 자기네 대장이 눈에 푸르딩딩한 멍 자국을 달고 다니는데 누가 함부로 입을 놀리겠어?”
“하하하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병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도 전에 비하면 훨씬 기가 산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군터는 낄낄대며 웃는 그들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위화감 같기도 했고, 어떤 불안감 같기도 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군터는 곧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조용.”
“…….”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군터는 다소 굳은 얼굴을 한 채 부하들과 하나하나 눈 마주쳤다. 모두 ‘왜 저러시나’하는 표정이었다. 그나마 진지하게 심각한 얼굴을 한 이는 프레드릭과 살라스 뿐이었다.
“너희와 병사들이 들뜰 이유가 있나?”
“…….”
“투스바이언 천인장과 내가 서로 두들겨 팬 일이 자랑스러운가? 그것은 하극상에 해당하는 죄였다. 난 죄인이고, 죗값을 치렀으며 아직도 치르고 있는 중이다. 너희는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자랑스러우냐?”
“아닙니다.”
대답하는 목소리들이 무거웠다. 군터가 진심으로 못마땅해 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난 부대의 책임자로서 이런 부끄러운 일로 죄를 짓게 된 데 대해 너희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지휘관씩이나 되는 놈이 자리에 걸맞지 않게 경솔히 행동하여 부하들을 혼란스럽게 했지. 솔직히 말하면 자질 부족이야. 그렇지 않나?”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자질 부족이다. 하지만 부족한 내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고,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부족한 것은 채우고, 잘못된 것은 고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희도 마찬가지다.”
군터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할 말을 골랐다. 지금부터 할 말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밑의 병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반감을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 말은 해야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생각을 마친 군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어찌 부르는지 다들 알 거라 생각한다. 아쿼러즈 기병대 야만인 기병대. 초원의 첩자들, 그 외에도 별 불쾌한 이름을 붙여대지.”
모두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알고 있어도 직접 앞에서 듣는 것은 역시 거북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군터가 이야기하고 있어 이 정도지, 다른 부대의 백인장이 이딴 소리를 했다가는 이들 중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는 분명 불명예스러운 모욕이다. 하지만 누가 이런 말을 떠들어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가서 패기라도 하면 크게 처벌받겠지. 원인제공을 어느 쪽이 했는가는 중요치 않다. 어째서인가?”
“…….”
“우리가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국인이고, 제국군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명예로운 기병대에 속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방인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이방인이다. 왜? 우리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국인이지만 아쿼러즈고,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다. 내 말이 틀린가?”
프레드릭이나 살라스, 그 외에 아쿼러즈가 아닌 십인장들은 낯빛만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아쿼러즈인 십인장들은 잔뜩 얼굴이 붉어져 입술을 이빨로 짓이기는 중이었다. 대장인 그가 하는 말이기에 참고 있을 뿐,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군터의 말은 그들의 가장 쓰린 부분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너그럽지 않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았을 뿐, 진정으로 그들의 동족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의 문제인가, 그들의 문제인가?”
“그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제국인인데 왜 우리를 동등하게 대우해주지 않는가? 왜 우리에게 날선 시선을 보내는가? 모든 아쿼러즈들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지금 답을 한 부하들의 생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터 역시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틀렸다. 우리의 문제다.”
“…….”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게 아니다.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향을 떠나 제국의 땅과 삶에 스며들고자 한 것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들어온, 몇 안 되는 이방인에게 원주인이 맞춰주어야 할 이유가 있나?”
여기저기서 침음이 들렸다.
“무작정 남의 온정과 배려를 구하는 것은 거지들뿐이다. 우리가 거지인가?”
“아닙니다!”
“거지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건 안 하건, 그건 가진 자의 자유다.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밥그릇은 우리가 챙겨야 한다. 이 문제를 우리가 풀지 않으면 해결해 나가야 한다. 언제까지 피하거나, 화내거나, 모르는 척하면서 눈치나 보며 지낼 수는 없지 않겠나?”
이제 몇몇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눈치 챈 듯했다.
“우리가 말 몇 마디로 사람을 울고 웃기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닌 이상, 결국 행동으로 보이는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겉도는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껏 우리끼리 단단히 뭉쳤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는 안 좋게 비쳤을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은 군터 자신이었다. 아쿼러즈들로 기병대를 꾸린다는 것은 분명 효율적이었지만, 그로 인해 다른 부대에게 이질감을 갖게 했다. 그 이질감은 곧 경계심으로 변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우리 스스로부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지금보다 더 힘들 테니까.”
지금도 이미 늦었다. 그래서 힘들다. 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진다.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나부터 노력하겠다.”
마지막 말은 부하들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
“무슨 일이십니까.”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 마치 적군을 대하는 듯했다. 내심 쓰게 웃은 군터가 양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천인장을 뵈러 왔네.”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약속을 잡고 오신 겁니까?”
“아니. 따로 약속은 잡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서 좀 전해주겠나. 백인장 군터가 투스바이언 천인장님을 뵙고자 한다고.”
“…그럼, 잠시 기다리십시오.”
저택이라 불릴 수 있을 법한 집에는 족히 수십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과연 오테론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의 자택다웠다. 막시밀리언의 자택도 크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막시밀리언에 비해 오테론에서 지낸 세월이 훨씬 긴 투스바이언이니 만큼 이 정도의 저택을 지니고 있다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는 오테론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으니까.
‘그래도 대단하긴 대단하군.’
잠시 그렇게 집 구경을 하며 기다리고 있자 곧 안으로 들어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들라 하십니다. 다만, 무장은 해제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다만, 이 검창은 그냥 말에 달아두는 게 좋네.”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충고였는데 병사들은 그렇게 들리지 않았는지 낯빛을 굳혔다. 그리고 병사 한 명이 모커스의 안장에 걸어놓은 창검을 쥐었다가 딱딱하게 굳었다.
“내 창에는 지독한 주술이 걸려 있지. 주인이 아닌 자가 함부로 손 대려다간 몸을 해친다네.”
“으음!”
병사가 슬그머니 창에서 손을 뗐다. 군터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지금 그가 한 말은 거짓이면서 거짓이 아니었다.
본래 창에 걸린 피먹이 주술에는 말한 것 같은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창에 음습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무녀인 외조모에게서 무자의 자질이 있다 이야기를 들었던 군터이기에 창에 감도는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 무녀 계집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아마도 그 ‘언젠가부터’는 사교도 마을에서 바칼과 마주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희미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한 기운의 농도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불길한 기운이 그에게는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군터는 그의 애병(愛兵)에게서 조금의 꺼림칙함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목숨을 끊고 피를 먹는 병기. 내게 해가 안 된다면 불길하든 말든 신경 쓸 바가 아니지.’
피먹이 주술의 효과로 그의 검창은 여느 명품 무구 못지않은 예기를 자랑했다. 무인으로서 그런 무구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따라오시지요.”
병사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애병에서 시선을 뗀 군터는 안내하는 병사의 뒤를 따랐다.
‘실내로 가는 게 아니군.’
어찌 그것을 알았는가 하면, 병사의 걸음이 척 보기에도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 외각 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입니다.”
그의 예상대로, 병사가 안내한 곳은 실내가 아니었다. 사방이 탁 트인, 백 명이 넘는 인원이 여유롭게 훈련할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연무장이었다.
투스바이언은 그 연무장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는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훈련을 하고 있었는지 달아오른 상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들은 대로 그의 한쪽 눈에는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우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매는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로웠고, 눈동자에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솔직히 놀랐다. 막시밀리언이 보냈나?”
“아닙니다.”
투스바이언의 눈매가 크게 꿈틀댔다.
“호오. 그럼 그때 못 다한 승부를 마무리라도 짓자는 건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왜 왔지?”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 사죄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죄?”
다시 한 번 그의 눈매가 뒤틀렸다. 이번에는 목소리마저 올라갔다. 군터는 한층 더 살벌해진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무릎을 꿇었다.
“대체 이게 뭐 하자는 수작이지?”
“말씀드린 것처럼, 사죄를 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말문이 막힌 투스바이언이 무릎 꿇은 군터를 한동안 사납게 노려봤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뒤로 꺾으며 길게 탄식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