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64화 (64/1,064)

<-- 성숙. 유명세. -->

군터는 꼬박 한 달 간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첫날 코르넬이 와 이야기 했던 것처럼 한 달 동안 면회는 단 한 차례도 없었고, 군터는 어두운 감방 안에서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방울과 찍찍대는 쥐 울음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 달. 밖에서는 별 감흥 없이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지만 군터에게는 그것이 결코 짧지 않게 느껴졌다.

난생 처음 겪는 수감 생활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마음껏 움직이지도 못하고, 햇빛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 이따금씩 식사를 건네주러 오는 간수를 제외하면 사람 얼굴도 구경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는 점점 피폐해져갔다. 반면 희한하게도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머리가 맑아지니 생각도 많아졌다. 사실 좁은 감방 안에서 할 거라고는 이런 저런 생각 밖에 없었다.

주로 하는 생각은 역시 이 상황에 처하게 된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었다.

‘홀몸이라면 내 생각대로만 해도 상관없었다.’

돌볼 것이 몸뚱이 하나뿐이었던 시절이라면 투스바이언과 주먹질을 하건, 칼부림을 하건 거리낄 것 없었다. 여차하면 그대로 말을 타고 도주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백인대장이라는 지위, 그 밑에 그를 믿고 따르는 부하들,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인. 그에 대한 상관의 신뢰.

무엇하나 중요치 않은 것이 없고, 저버릴 수 없는 것들뿐이다.

짊어진 것 없는 자의 발걸음은 가볍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 맨몸이었을 때처럼 가볍게 걷거나 뛸 수 없다. 오히려 느릿느릿하게 내딛는 걸음마저 신중해진다. 혹여 헛디뎌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 생각하면, 잔뜩 짊어진 주제에 아무 것도 지지 않은 것처럼 멋대로 뛰어다녔으니 이 사단이 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경솔한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 한은 설령 이번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사고가 터졌을 것이다.

‘남 이야기 하듯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군터는 이리 자문했다.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또 다시 경솔해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선뜻 아니라고 하기에는 거부감이 일었다. 이렇게까지 붙들고 고민해놓고서 아직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하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변하려고 노력 중…정도로 할까.’

약간의 자존심에 떠밀려 딱 중간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뭔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앉아 궁상이나 떨고 있는 게 아닌가?

‘독방에 오래 가둬놓으면 미치광이가 되기 쉽다더니.’

과장하기 위해서 지어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직접 독방에 갇혀 있다 보니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말이라 여겨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닷새? 열흘?’

낮에도 밤에도 똑같은 곳에서 계속 있다 보니 시간 개념도 점점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군터는 감방 벽에 희미하게 새겨진 선들을 보았다.

그보다 앞서 이 방을 쓴 수감자들이 저 선 하나하나를 그으며 날을 헤아렸을 것이다. 군터는 그 힘겨운 흔적들을 희미한 불빛에 의존해 지긋이 응시했다.

*

“군터 백인장님. 석방입니다.”

‘잘 풀렸나 보군.’

간수가 옥문을 열고 석방을 말했을 때, 군터는 기대했던 이상으로 일이 잘 풀렸음을 알았다. 자신에 대한 호칭이 여전히 백인장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파직이 되었거나, 직위강등을 당했다면 저렇게 깍듯이 백인장이라 부를 이유가 없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네도 고생 많았네.”

무뚝뚝한 간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좁은 복도를 지났다. 이따금씩 창살 안에서 바깥의 복도를 보며 출옥할 날을 그리도 고대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나갈 때가 되어 걷고 있으니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끼익!

계단을 올라 두터운 창살문을 지났다. 지상은 지하 감옥과는 다른, 그래도 사람 사는 풍경이었다. 깨끗한 벽과 천장, 탁자, 햇살이 비추는 창문 등, 고작 몇 걸음 올라왔을 뿐인데 세상의 모습은 이다지도 달랐다.

“바깥에 기다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떻게…씻고 나가시겠습니까?”

기다리는 분들이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벨리사와 부하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벨리사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군터는 간수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달 간 시궁창에 박혀서 뒹군 몰골로 재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탁하지. 그리고 미안하네만 옷가지도 좀 부탁해도 되겠나.”

“준비해 놓겠습니다. 다만 워낙 크셔서…제대로 맞는 옷이 있을지…….”

“안 맞아도 괜찮아. 대충 걸치기만 할 수 있으면 상관없네.”

군터는 간수의 안내를 따라 욕실로 향했다. 준비 된 목욕물에 몸을 담그니 깨끗했던 목욕물이 금방 시커멓게 변했다.

‘이 상태로 나갔으면 두고두고 놀림 받을 뻔했군.’

감옥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씻으면서 보니 몸에서 풍기는 악취도 상당했다. 군터는 온 몸 구석구석을 깨끗이 씻어냈다.

“……,”

그렇게 몇 번씩 몸을 씻어낸 후. 그는 마지막으로 구리거울 앞에 섰다.

한 달 간 무럭무럭 자라난 수염이 코 아래를 비롯해 턱 주변을 거뭇하게 채우고 있었다. 가뜩이나 잘나지도 않은 얼굴에 수염까지 자라니 후하게 봐줘도 30대 후반이고, 박하게 보면 40대 중후반까지도 보게 생겼다.

‘뭐, 외관이야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만.’

얼굴 뜯어먹고 살아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30대든 40대든, 솔직히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금의 얼굴이 썩 마음에 들었다. 수염이 덮기 전의 얼굴이 그저 사납기만 해 보였다면 지금은 경륜이 쌓인 노련한 전사 같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있었다.

결국 군터는 면도용 칼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욕실 입구에 놓인, 간수가 준비해 준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

가장 먼저 세찬 바람이 그를 반겨주었다. 그 다음은 따사로운 햇살. 마지막은 그를 부르는 힘찬 목소리들.

“여보!”

“대장님!”

앞선 두 가지를 미처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비명과 고함 같은 소리들에 반응해야 했다. 군터는 시커먼 사내놈들과, 그 앞에 펑펑 울고 있는 초췌한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의 느린 걸음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인이 달려들었고, 군터는 돌진해온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

“정말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출옥한 것에 기뻐할 틈도 없었다. 막시밀리언을 만나러 가려고 해도, 부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려 해도 그녀가 도통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아 여의치가 않았다. 군터는 거의 반쪽이 된 벨리사를 어르고 달래는데 거의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을 써야 했다.

간신히 벨리사를 달래고 곧장 막시밀리언의 자택으로 향했다. 사실 출옥하자마자 갔어야 하는 건데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부인 덕분에 반나절을 통으로 날려버렸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자네 안사람은 제대로 달래주고 온 건가?”

한 달 만에 다시 본 막시밀리언은 늦은 것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일찍 온 것 아니냐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송구합니다.”

“그런 말은 나보다 자네 안사람에게 해야 할 걸세. 한 달 내내 반 폐인처럼 지냈다 하던데. 물론 자네도 이미 만나보아 알겠지만 말이야.”

“예.”

끼니도 제대로 챙겨내지 못하고 종일 눈물만 흘려댔다고 했다.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별 일 없을 거라는 막시밀리언의 확답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별로 신통치 않았고, 면회마저 못 하게 하니 군터가 한 달만 더 수감되어 있었더라면 그녀는 정말 큰일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고생 많았네. 내 경험해보지 못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듣자하니 한 달이라도 햇빛 한 점 안 드는 독방에서 지낸다는 것은 상당히 혹독한 일이라더군.”

“제가 지은 죄에 비하면 가벼운 벌입니다.”“그런가?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야.”

“…….”

“감봉 반년. 뭐, 형식적인 처벌이기는 하지.”

실제적인 벌은 한 달간의 독방 수감으로 다 치른 셈이었다. 물론 당분간, 어쩌면 상당기간의 근신은 덤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근신 기간 동안 사고를 치게 된다면 더 큰 처벌을 받게 되리라.

“주공께서 제 죄를 대신 지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그렇군. 난 자네의 상관이야. 마땅히 져야만 하는 책임이었으니 대신이라 할 것은 없네.”“제가 아니었으면 질 일 없는 책임이었습니다.”

“그 또한 맞는 말이군.”

막시밀리언이 피식 웃었다. 군터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 숙였다.

“제 목을 걸고,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단언하지 말게. 인간은 살면서 무수히 많은 실수를 하게 되어 있어.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이야. 다만 이번에는 그 실수가 다소 큰 것이었을 뿐. 이번 일을 계기로 삼아 앞으로 더 신중해진다면 이 또한 좋은 경험이고 배움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막시밀리언은 한 달 간의 노고를 위로한 뒤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는, 지나간 일로 묻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나저나 멀쩡하군? 그 멧돼지는 아직도 얼굴에 멍 자국이 남아 있던데 말이야.”

군터의 얼굴은 말끔했다. 정확히 상처가 얼마 만에 아물었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감방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욱신거리는 통증이 사라졌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했다. 하지만 듣자하니 투스바이언은 여전히 그때 싸움의 흔적을 가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군터는 내심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보다 성숙해지기로 마음을 먹었건만 유치한 사내의 자존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여간 그 놈도 자네 덕분에 체면을 완전히 구겨서 말이야. 바깥출입을 시작한 후로도 전처럼 설치고 다니지는 않는다네. 아! 또 모르겠군. 자네를 보게 되면 결판을 내자고 달려들지도.”

“그럼…피하겠습니다.”

“그것도 좋지만, 그 놈이 자꾸 귀찮게 굴거든 아예 정식으로 붙자고 하게. 사령관도 부르고, 우리도 부르고 해서 정식 비무(比武)를 하자고 말이야. 사적으로 욕하면서 붙는 것 말고, 한 사람의 무인 대 무인으로 붙자고 하면 문제가 될 게 없지 않겠나? 전이라면 전혀 안 먹힐 소리였겠지만 지금은 그게 가능해. 그만큼 자네 이름값이 올랐다네.”

“예?”

“지금은 내가 말해도 모르겠지. 이제부터 차차 알게 될 것이야.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유명해졌다네. 하하.”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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