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숙. 유명세. -->
막시밀리언은 사령관 무알 카빌라이드와의 면담을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욕실도 아니었고, 자신의 침실도 아니었다. 그는 자택 안쪽에 있는 별채로 향했다. 그리 크지 않은 별채는 별도로 구분된 방이 없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방인 형태였다.
“또 향을 피워놨군. 창이라도 좀 활짝 다 열어놓지 그랬나. 머리가 다 띵하군.”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향이 그를 반겼다. 향 자체는 제법 맡아줄 만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환기도 없이 방 안 가득 차다보니 냄새가 좋다기보다 지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애써 피운 향이 다 날아가지 않겠습니까.”차분한 목소리다. 동시에 묘하게 나긋나긋한 것 같기도 했다. 막시밀리언은 그 목소리를 듣자 다소 불편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하지 않나. 코가 마비될 것 같군.”
“전혀 다른 것을 갑자기 접하면 거부감이 일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밀어내지 말고 가만히 두면 곧 적응이 된답니다. 그러면 지금은 지독하다고 느끼시는 이 향도 금방 달콤해질 겁니다.”
“아이를 달래듯 하는군.”
“무례했다면 용서하시길.”
“흐음.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데?”
막시밀리언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창마다 짙은 커튼이 쳐져 있어 방 안은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바닥에 간간이 위치한 촛불만이 어둠을 밝혔다.
막시밀리언은 몇 개의 촛불을 지나 방 끄트머리에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가 마련해준 푹신한 방석들 위에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지간히도 시건방진 여자군.’, 막시밀리언은 속으로 웃었다.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거나,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오는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또 그걸 하고 있나?”
그녀는 나무 조각 같은 것을 여러 개 펼쳐놓고 그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역시 이제는 꽤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예. 결례를 용서하시길. 마침 장군의 점괘를 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장군이라는 호칭은 좀 접어두지 그러나. 난 아직 일개 천인장에 불과해.”
“머지않아 그리 되실 터이니 미리 익숙해지시지요. 또한 주변에 훔쳐 듣는 이가 없으니 걱정은 않으셔도 되옵니다.”
막시밀리언이 가느다란 웃음을 지었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군. 처음에 그대를 보았을 때는 이런 요부일 줄 꿈에도 몰랐지 뭔가. 라일라.”
“저는 이제 장군의 것이니, 장군의 마음에 들도록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래. 그럼…….”
막시밀리언은 라일라의 뒤에 바싹 붙어 앉았다. 푹신한 방석의 감촉이 엉덩이에 닿았다. 그의 한 손이 라일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또 다른 손은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쓸었다.
“점괘는 어떤가? 나쁘게 나왔나, 좋게 나왔나?”
“이제 보겠습니다.”
라일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나무 조각들을 쓸었다. 나무 조각들은 바닥에 뿌리를 박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의 손이 마지막 조각을 스친 순간 일제히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급격하게 흔들리고 뒤집어졌다.
“볼 때마다 신기하군. 이것도 나름의 술법이겠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으면서도 그의 손은 라일라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라일라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덤덤했다.
“제국의 기준으로는 그렇지요. 초원에서는 이러한 점괘 역시 신의 행사로 여깁니다.”
“제국에서는 신의 능력을 빌려 쓰는 것 또한 큰 틀에서는 술법에 속한다. 더 정확하게는 법술의 일파(一派)지.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점괘 역시 술법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흠. 너무 쉽게 인정해버리니 재미가 없군. 뭐 아무튼, 점괘는 어떠한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군요. 이전과 같습니다. 바람을 기다리는 승냥이의 형상입니다.”
승냥이가 바람을 기다린다. 그 까닭은 사냥감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바람이 불기 전까지 승냥이는 사냥을 하지 못한다.
“그 바람은 대체 언제쯤 불어줄런지 모르겠군.”
“사냥에 조급함은 독이 되지요.”
“간절해야 한 번이라도 더 킁킁대지 않겠나?”
“그 말씀도 또한 옳습니다.”
“죄다 옳다고만 하니 그대는 재미가 없어. 재미가. 뭔가 좀 까칠한 맛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그는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몸을 뉘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라일라의 몸도 그의 품에 뉘어졌다. 막시밀리언은 그녀의 몸을 희롱했으나 라일라는 반항도, 호응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가 자신의 몸을 유린하도록 두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골치 아픈 일투성이었다네.”
막시밀리언은 주절주절 오늘 하루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라일라는 아무런 호응도 없었지만 그는 계속 이야기했다. 있었던 일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 등도 모두.
모든 사내는 여인의 품 안에서 애가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막시밀리언에게 있어 라일라는 최고의 청자였다. 그녀는 목석같은 여인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래서 라일라가 마음에 들었다. 쓸 데 없는 멍청한 대꾸 같은 것 없이 조용하게 그의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언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이유에는 그녀가 그의 허락 없이 이 커다란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조용하더군. 아무래도 근래 들어 투스바이언이 여러모로 시끄럽게 굴면서 미운털이 박힌 거겠지. 잘만 하면 생각보다 큰 소란 없이 마무리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게 다 멍청한 투스바이언 덕분이야. 하지만 투스바이언이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단 또한 나지 않았을 테니, 그의 멍청함에 대해 마냥 고마워하기도 그렇군. 우습지 않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왜 그리 열심이십니까? 이 일로 장군은 적든 크든 타격을 입으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적당히 발을 빼면 편하지 않느냐는 건가?”
“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이 여인이 이렇게 적절하게 기분 좋은 질문을 해주는 것이 과연 진정 궁금해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 일부러 묻는 것인가.
“몇 가지 이유가 있지. 첫 째로, 내 부하가 잘못은 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야. 어쨌든 투스바이언이 명분을 줬거든. 물론 그렇다 해도 하극상은 하극상이라 심각한 문제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솔직히 투스바이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하극상이란 것은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대죄였다. 참형이라면 당연한 벌이라 생각하고, 파직이나 징역형이 떨어진다면 자비로운 판결이라 여길 만큼.
“어차피 투스바이언은 나서지 않을 거야. 마음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적어도 직접 나서지는 않아. 나름대로 오테론 제일이랍시고 떠받들어지면서, 행세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어찌 일개 백인장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자기 입으로 떠들고 다닐까.”
일을 봉합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투스바이언이 처벌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건의 당사자인 만큼 그의 발언은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알량한 체면 때문에라도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막시밀리언이 판단한 투스바이언이란 사내는 그런 자였고, 막시밀리언은 자신의 판단에 대해 확신했다.
“기껏해야 그라니스, 아니면 사령관이지. 하지만 그라니스는 남의 일에 먼저 입을 열거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고 투스바이언이 그에게 하소연을 할 리도 없으니 그는 팔짱 끼고 가만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문제는 사령관이다. 무알 카빌라이드는 온건한 평화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그가 좋아하는 평화가 어느 정도의 규율과 원칙 위에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군의 규율과 기강을 흐리는 하극상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기 힘들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지길 원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언은 그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파직과 징역 20년을 원하더군. 지독한 영감 같으니.”
물론 이는 하극상에 대한 벌로서는 자비로운 편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막시밀리언으로서는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자비’를 보인 사령관 앞에서 대놓고 반발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책임을 지되, 그 책임을 나누어서 지기를 원했다.
“부하를 제대로 관리 못한 내 책임도 있지. 하여 부하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내게 죄를 물라 했다.”
결연한 얼굴로 그 말을 내었을 때, 무알 카빌라이드는 꽤 당황한 기색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 하면서 그를 말렸다. 하지만 막시밀리언은 단호히 재차 죄를 청했다. 그러면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가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역설했다.
“내 부하에게 죄가 있고, 내게도 죄가 있다. 또한 애당초 이 일의 빌미를 제공한 투스바이언에게도 죄가 있지. 적어도 부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내 죄보다는 그의 죄가 중하다.”
막시밀리언은 스스로의 죄를 크게 부풀렸다. 모자란 부하를 벌하기 전에 날 벌하라 절절하게 외쳤다.
“그때 그 영감의 표정이 정말 볼만 했지. 그대도 봤으면 웃었을 거야. 정말 재미있었거든.”
손가락 끝을 라일라의 입술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그녀가 몸을 숙여 막시밀리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령관과 척을 지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분간 눈치는 좀 봐야겠지. 하지만 괜찮아. 얻은 게 더 크니까.”
“그 군터라는 자를 그리 아끼십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이 일로 내 이름이 보다 좋게 포장 될 테니까.”
“예?”
“부하를 위해 죄를 청하는 지휘관은 그리 흔치 않아. 이 일은 이미 소문이 퍼진 상태고, 앞으로도 더 퍼져나갈 거야. 흔치 않은 일인 만큼 앞으로도 계속 시끄럽게 회자되겠지. 그 길게 돌아다닐 이야기 속에서 나는 부하를 위해 기꺼이 죄를 청하는 강직한 지휘관으로 소개 되겠지. 그거면 족하지 않나? 사람의 호의는 재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인망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아. 난 값싼 것을 내어주고 값비싼 것을 얻은 셈이지. 셈을 할 줄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마다치 않을 좋은 거래가 아닌가?”
막시밀리언은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라일라는 그 진득한 웃음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을 가벼이 희롱하던 손이 점점 더 과감하게 변해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