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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2화 (62/1,064)

<-- 갈등 -->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만신창이가 된 몰골의 군터가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가이 뛰쳐나왔던 벨리사가 비명을 질렀다. 평소였으면 그녀가 어떤 소리를 내든 웃었겠으나, 지금은 귀를 파고드는 그녀의 고함소리가 날카로운 창처럼 느껴졌다.

“별 거 아니니까…조용히.”

“별 거 아니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벨리사는 흥분한 와중에도 조용하란 말은 고분고분 따랐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군터를 부축하고 있는 프레드릭과 살라스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마님. 그것이…….”

군터가 난처한 얼굴이 된 둘을 돌려보냈다.

“됐다. 고생했다. 돌아들 가라.”

“예.”

두 사람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군터는 눈물을 글썽이는 벨리사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말고…부축 좀 해줘. 아직 몸에 힘이 없어.”

“…이게 뭐에요 대체…얼굴은 왜 이래요…?”

그녀는 잽싸게 군터를 부축했다. 그보다 한참이나 작고 힘도 약한 그녀가 군터의 몸을 제대로 받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벨리사는 낑낑 대며 그를 침실까지 부축했다. 눈에서 글썽거리던 눈물은 이미 홍수가 된 지 오래였다.

“말 좀 해봐요. 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에요?”

“오해하지 마. 싸우긴 했는데 진 건 아냐. 그 양반도 지금쯤 골골대고 있을 걸?”

왜 그런 말을 한 건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아마 괜한 사내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직후 벨리사의 눈초리는 싸늘해졌고, 옆구리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

다음날이 되자 그럭저럭 힘이 돌아왔다. 물론 온 몸이 뻐근한 것이야 당연했지만, 전날의 상태가 거의 시체와 진배없었던 것에 비해 다음날 아침의 몸은 그래도 사람의 몸뚱이 같아졌다.

“밖에 살라스님과 병사 분들이 여럿 계세요. 당신이 일어나면 알려달라고 하던데.”

드물게 일찍 일어나 있던 벨리사가 이야기해주었다. 군터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집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자 벨리사의 말대로 살라스와 병사 몇이 대문 앞에서 무장한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장님.”

“밤새 이러고 있었던 거냐?”

“아닙니다. 십인대별로 교대로 섰습니다. 그것보다…막시밀리언님께서 찾으십니다. 일어나면 바로 댁으로 오시라고…….”

밤새 투스바이언 천인대가 들이닥칠까 걱정이라도 한 것인가. 군터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위하는 부하들의 마음에 살짝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괜한 짓을…아무튼 알았다.”막시밀리언이 찾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사고를 쳤으니 문책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가 친 사고가 어디 보통 사고던가? 핑계로 나름의 명분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하극상 아닌가. 군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용납되기 힘든 일을 상명하복이 원칙인 군부에서 저질러 버리지 않았나. 이는 전시였다면 즉각 참형에 해당되는 중죄였다.

‘미친 짓을 하긴 했군. 내가…….’

어제 일을 돌이켜 생각해도 딱히 후회는 되지 않았다. 투스바이언은 그가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모욕을 주었다. 그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지만, 설령 어떻게든 참고 넘겼다고 해도 부하들을 볼 낯이 없었을 것이다.

간단히 옷을 차려입고 무장을 하는 손길이 평소보다 둔했다. 몸 이곳저곳이 욱신거리는 탓도 있었고, 막시밀리언의 얼굴을 보러 가는 것이 껄끄럽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면목 없는 짓거리를 해버렸으니까 말이다.

‘처벌은 피할 수 없겠지.’

언감생심, 아무 일도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길 바랄 수는 없었다. 투스바이언이 어느 정도로 난리를 치느냐에 따라 수위가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어쨌거나 중형은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감봉이나 근신 정도면 다행이고,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너무 무책임했던 건가?’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굽혔어야 했던가? 술을 깨고 나서 주사를 후회하는 사람처럼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실수였나 싶고,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놓아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이다. 차라리 당당해지는 게 나아.’

모커스를 타고 막시밀리언의 자택으로 향하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했다. 어제 일을 지금에 와서 떠올리며 마음 아파해봐야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가 아니겠는가.

‘그나저나…그 자식, 이름값은 제대로 하는군.’

신물을 얻고 신체능력이 향상되기 전에도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이 있던 그다. 제 아무리 오테론 제일이니 뭐니 해도 붙으면 이길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맨손으로 붙는 박투였다지만 간신히 양패구상을 해버린 것은 군터에게 있어 상당한 충격이었다. 또한 자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뭐, 그렇게 맞고도 이는 하나도 안 나갔으니 다행이군.’

이런 걸로 위안 삼는 것도 웃기기는 하지만, 싸움 중에 주먹에 두들겨 맞은 횟수만 해도 셀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이빨이나 뼈가 나간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은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앞니라도 두어 개 나갔다면 굉장히 웃긴 꼴이 될 뻔했으니까 말이다.

*

“솔직히, 자네에게 상당히 실망했네. 내 굽히라, 주의하라 말을 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런 사고를 치는가? 이것이 내 말을 우습게 들었다는 뜻 밖에 더 되는가?”

초장부터 단도직입적이었다. 막시밀리언의 얼굴에서는 냉기가 흘렀다. 시선 역시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적어도 군터에게는 이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송구합니다. 무슨 처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막시밀리언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그가 말을 하고나서 곧장 일을 저질렀으니 어떤 질타나 폭언이 쏟아진다고 해도 군터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 지금은 자네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군. 자네가 저지른 일은 명백한 하극상이네. 설령 투스바이언이 먼저 어떤 도발을 했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아는가? 천인장과 치고받은 백인장의 이야기가 온 도시에 다 퍼졌다네. 언제 병사들이 자네를 잡으러 올지 몰라. 하극상에 대한 처분은 이유를 막론하고 중형일세. 최악에는 참형까지도 선고될 수 있음이야.”

“…….”

“내 자네를 너무 과대평가 했는지도 모르겠어. 나이는 젊지만 진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무슨 되도 않는 혈기를 부려 일을 만드는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막시밀리언의 질책이 이어지는 내내 군터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까지 다 하고 왔다 생각했건만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무거워져만 갔다.

“후우. 우선 자네는 투옥이 되어야 할 것 같네. 일단은 그곳에서 일이 진정될 때까지 있게. 내가 어떻게든 막을 수 있는 부분은 막아볼 것이야. 어쨌든 투스바이언도 찔리는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니…어떻게든 이야기를 해 봐야지. 어떻게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물러가게.”

군터는 그대로 막시밀리언의 자택을 나섰다. 그리고 미리 지시를 받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과 함께 감옥으로 향했다. 그들은 군터의 주변을 에워싸면서도 포박을 하거나, 몸에 손을 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옥에 다다를 때까지 직속상관을 대하듯 공손하게 대했다.

“이곳입니다. 누추하지만 당분간은…….”

“나는 죄인인데 무슨 누추함을 따지겠나. 신경 쓸 것 없어. 고생들 했네.”

병사들을 돌려보낸 군터는 당분간, 어쩌면 조금 오래 지내야 할 곳을 훑어보았다.

발뒤꿈치를 들면 머리가 닿을 것 같은 낮은 천장. 사람 셋 정도 넣으면 가득 찰 것 같은 좁은 공간. 지하 특유의 음습함이 감도는 오래된 벽. 그나마 쥐똥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어처구니가 없군.’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벨리사와 함께 좋은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내일은 이곳에서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아침을 맞아야 한다. 하루 사이에 처지가 바뀌어도 너무나 바뀌었다. 그 변화가 너무 급격해서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다.

군터는 쓴웃음을 머금고 눅눅한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직 하루가 가려면 멀었건만, 벌써부터 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나 다를까, 투옥된 당일, 군터는 꽤 많은 손님들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가장 먼저 코르넬이 왔다. 그는 현재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일단 투스바이언은 잠잠한 편이네. 수치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어.”

“수치심?”

군터가 의아하여 물었다. 그러자 코르넬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수치심이 들지, 안 들겠나? 기세 좋게 남의 부대 부하에게 시비를 걸어놓고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됐는데, 오테론 제일이라 불리고, 자처하기도 하는 사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글쎄. 내가 보기엔 우스울 뿐인데.”

“아무튼 덕분에 다행히 일이 커지지는 않고 있네. 다만 워낙에 그 일을 본 사람이 많아 입단속을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형편일세. 벌써 세간에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네. 자네도 제법 유명해졌어.”

“…….”

“사령관도 이미 알고 계시거나, 곧 알게 되시겠지. 하여 주공께서 사령관을 뵈러 가셨다네. 먼저 자네의 죄를 청하고, 한편으로는 선처를 구할 생각이시네.”

“대장…아니, 주공께는 면목이 없군.”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주공께서는 자네를 결코 포기할 마음이 없으시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생각이야. 필요하다면 살마드의 연줄까지 동원하실 것 같더군.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게.”

살마드의 연줄은 막시밀리언이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것이었다. 절대 허투루 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사석에서도 몇 차례나 밝혔을 만큼. 헌데 상황에 따라 그것까지 가져다 쓸 생각이라면 코르넬의 말처럼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군터는 죄스러움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혹여 주공께서 나에 대해 물으시거든, 이 몸은 더 없이 죄스러워 하고 있다 전해주시오.”

“그 말은 다음에 직접 뵙고 전하게. 일단 자중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이들에게 보여야 하는 만큼 한동안은 찾기 힘들 것 같네. 면회도…오늘 이후로는 힘들 것이야.”

“알겠소. 코르넬. 당신에게도 고맙소. 또 미안하오.”

“흥. 어제 좀 그러지 그랬나.”

“…….”

“농담이네. 농담. 아무튼, 보중하시게.”

“음.”

코르넬이 다녀가고 얼마 후에는 프레드릭과 살라스를 비롯한 십인장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어두운 감방 안에 앉아 있는 군터를 보고 이를 갈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잘못한 놈은 투스바이언 그 놈인데 왜 대장님께서 이런 꼴로 계셔야 합니까!”

그들 모두 머리로는 이리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따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군터는 그들의 그런 마음이 고마웠다. 자연히 대꾸하는 목소리도 사뭇 부드러웠다.

“이만하면 다행인 셈이다. 부하 놈들을 두고 대장이라는 놈이 이 꼴이니, 너희를 볼 낯이 없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장님이 하옥되셨다는 말을 듣고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언제 나오실 수 있는 겁니까?”

“글쎄. 일단은 처분을 기다려야지 않겠나.”

“처분이라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별 일 없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벨리사에게도 그리 전해다오.”

“안 그래도 마님께서 대장님 때문에 눈물을 쏙 빼셨습니다. 하옥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는 아예 기절을 하셔서…….”

“기절?!”

깜짝 놀란 군터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프레드릭이 말을 빨리해 그를 안심시켰다.

“지금은 괜찮으십니다. 물론 기운은 없으시고 종일 눈물을 보이시는 것 같지만…….”

“끄응! 그…아무튼 너무 염려 말라고 해라. 별 일 없을 거라고.”

“말도 마십쇼. 그런 얘기를 오기 전에는 안 한 줄 아십니까?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려도 꼭 직접 대장님을 뵈어야겠다면서…….”

“으으!”

군터는 마음이 울렁거려 머리를 짚었다. 벨리사가 의식을 잃고, 상심하여 우는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이 홀몸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무책임했는가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내가 투스바이언과 맞붙어 지킨 것은 고작 내 알량한 자존심인 반면에, 잃은 것은 이다지도 많구나.’

군터는 부하들에게 벨리사를 잘 살피고 지켜줄 것을 당부하고 돌려보냈다. 그 후 홀로 어두운 감방 안에 남은 그는 장시간 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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