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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60화 (60/1,064)

<-- 갈등 -->

“다시 한 번 지껄여 봐라.”

“기억력이 안 좋으십니까. 노예사냥꾼보다도 못한 저 치들을 싹 다 군복을 벗기든, 훈련병으로 보내든 하시라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제는 군터도 이성이라는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반쯤은 뒤집혔는지도 모른다. 투스바이언이 흉맹한 기세를 뿜어낼수록, 그 역시 그에 밀리지 않기 위해 성질을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막시밀리언의 자중하라는 충고, 혹은 명령은 머릿속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놈이, 말 좀 탄다고 해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그 외에도 잘하는 것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만. 적어도 천인장님의 부하들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주변에 있던 프레드릭이나 살라스 등등은 이미 뜨악한 얼굴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끼어들어 중재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최대한 필사적으로 시선을 보내면서 군터가 숙이기를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네 이놈!”

그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유일한 사내. 그라메인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뛰어왔다.

“네 놈이 알량한 재주가 있다 하여 앞 뒤 분간 못하고 설쳐대느냐! 어디서 감히!”

“제게 그런 소리를 하기 전에, 노예 사냥꾼 운운은 누가 먼저 했는지 생각하시지요. 가만히 있던 저희를 모욕한 것은 투스바이언 천인장님 쪽이십니다.”

군터는 그라메인에게도 날 선 말을 뱉었다. 어느새 다가온 코르넬이 다급한 얼굴로 그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지만 군터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저희가 무엇을 잘못 했습니까? 말을 타래서 탔고, 달리라 하여 달렸습니다. 그게 욕을 먹어야 할 일입니까? 우리가 노예 사냥꾼이라면 저것들은 푸줏간에 가서 칼이나 잡으라 하십시오! 목을 치는 게 그리 좋다면 사람 목이나 돼지 목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노옴!”

분을 참지 못한 투스바이언이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군터는 손을 들어 그의 주먹을 잡아챘다. 다만 충격을 다 받아내지 못하고 한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이놈이?!”

투스바이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동시에 군터도 이를 악 물었다. 맞잡은 주먹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사람이 발 딛은 땅은 점점 아래로 파여 갔다.

“그만! 그만 하십시오!”

“아이고, 대장님! 왜 이러십니까!”

양 측의 사람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두 사람을 서로 반대쪽으로 잡아끌었다. 십 수 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 둘을 떼어내니 두 사람은 이를 갈면서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잇! 비켜라!”

투스바이언이 악다구니를 쓰며 부하들을 떨쳐냈다. 여차하면 마구잡이로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라 병사들이 두려워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즈음, 군터 역시 그를 붙든 부하들을 떨쳐냈다.

“네 놈! 보아하니 알량한 용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좋다! 한 번 보자! 네 놈이 날 이긴다면 내 사과하고, 네 놈이 뱉은 개소리들도 못 들은 것으로 하고 묻겠다! 하지만 날 이기지 못한다면 내 네 놈의 무례를 그 더러운 모가지로 받아가겠다! 어떠냐? 자신이 없다면 당장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도 좋다!”

“천인장께서 워낙에 헛소리를 잘 하시니 지금 그 말도 믿기가 힘드오! 하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한 말이니 나중에 두 말을 하지는 않으실 거라 믿겠소이다!”

“크하하하핫! 정말 목에 칼날이 박혀야 정신을 차릴 놈이구나! 좋다! 무기를 들고 말에 올라라! 말 타는 재주 하나만 믿는 놈이니 말 아래서 싸우면 억울하지 않겠느냐?”

“흥! 난 말 위든 아래든 상관없소.”

이미 둘의 다툼은 파국에까지 이르렀다. 그제야 그라메인도 이 일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란 것을 알아 차렸다.

“아니, 형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저깟 무뢰배 놈의 헛소리 따위야 막시밀리언 대장에게 가 따지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지 않고 굳이 여기서 저 놈의 목을 베신다면 그 뒷감당은 어찌 하려 하십니까?”

“아우. 이거 놓게나! 뒷일은 나중에 감당하더라도 내 지금 저 놈의 목을 베지 않으면 도저히 이 울화를 참지 못할 것 같네! 막시밀리언에게는 차후에 사과하면 될 일이야!”

“막시밀리언 대장에게는 그리 하신다 치고, 사령관께는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으, 으음!”

사령관이라는 말에 투스바이언이 주춤했다. 그러자 먹힌다 싶었던지 그라메인이 재빨리 말을 쏟아냈다.

“사령관이 이런 분란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는 형님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형님께서는 일전에도 누차 사령관께 주의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형님께서 이런 대형 사고를 치신다면 과연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에이잇! 그렇다한들 어쩔 수 없네! 저 야만인 놈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고서 그냥 물러난다면 세인들이 날 어찌 보겠나! 내 부하들이 날 어찌 보겠느냔 말이야!”

투스바이언이 신경질을 내자 그라메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이성이 조금은 남아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손을 보시되 목숨은 붙여놓으십시오. 무례에 대한 벌을 내리는데 살벌하게 날붙이를 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박투로 하시지요.”

“흥! 박투로 한다고 저 놈이 무사할 성 싶은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무기를 들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 아닙니까?”

투스바이언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입술을 고기 씹듯 잘근잘근 씹어대더니 반대편에서 말에 올라 있는 군터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아우가 이리 말을 하는구나! 네 놈의 생각은 어떠하냐!”

군터 역시 거의 서로에게 고함을 치다시피 하는 투스바이언과 그라메인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창검을 땅에 내리 꽂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말 위든 아래든 상관없다 했소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를 쥐든 안 쥐든 똑같소! 무엇이든 윗사람에게 맞춰드리지!”

“시건방진 놈!”

투스바이언도 군터처럼 무기를 내던지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

싸움이라고는 해도 무기를 든 것과 안 든 것은 그 차이가 거의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무기를 든 싸움은 대련이라고 해도 생사투의 느낌이 나는 반면, 무기를 들지 않는 싸움. 이를테면 박투 같은 것은 아무리 살벌하게 해도 비무의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군터와 투스바이언은 널찍한 공터에서 서로를 마주봤다.

병사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빙 둘러 서 있었는데, 처음 그들이 죽이네 살리네 언쟁할 때와는 달리 제법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어떤 이들은 흥미롭다는 기색마저 내비쳤다. 대표적으로는 프레드릭이 있었다.

“어때?”

“뭐가 어떻습니까? 큰일이지요. 그것도 보통 큰일이 아닙니다.”

“그거 말고 임마. 누가 이길 것 같냐고?”

“예?”살라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지금 그런 말이…….”

“투스바이언은 오테론 제일의 용사지. 듣기로는 혼자서 적군 백 명을 추살한 적도 있다더라. 맨손으로 사람 머리통을 으깨버릴 수도 있다고…….”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살라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프레드릭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 뭐가 그리 심각해? 조금 전까지는 나도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각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붙는다잖아? 설마 뭔 일이야 있겠냐?”

“당장 일이 안 생긴다고 해서 끝이겠습니까? 이 일은 분명히 막시밀리언님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고, 사령관님도 알게 되실 겁니다. 어쩌면 군터 대장님께서…….”

“자, 자. 진정해라.”

프레드릭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살라스는 그 꼴을 보며 속이 타들어갔다.

“우리 부대의 똑똑이도 1년 내내 똑똑하지는 않구나.”

“예?”

“먼저 시비를 건 게 누구냐?”

“그게 중요합니까? 투스바이언 대장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한들 거기에 맞대응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죄입니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먼저 밟은 건 저쪽이고, 우리는 밟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게 무슨…….”

“잘 들어라 똑똑한 막내야. 네가 생각하기에는 유치한 것 같지? 뭔가…그 뭐냐, 논리적이지도 않고 헛소리하는 거 같잖아? 그런데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거다. 우리 대장님은 어쨌거나 우리들 모두를 이끄는 대장이라고. 그런데 눈앞에서 밟는 걸 보고도 입 닫고 있는다? 그럼 그때부터 우리는 걸레 되는 거야.”

“걸레…라니요?”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죄다 우리를 씹어댈 거라고. 노예사냥꾼이니, 야만인이니 하면서 대놓고 앞에서 지껄여댈 거라는 말이다. 왜? 이미 한 번 그랬으니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은 거야. 유치하고 이상해보여도 그게 고추 새끼들의 논리야. 한 번 만만하게 보이면 그날로 장사 접어야 돼.”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우리는 군인이지 않습니까. 그런 양아치 같은 논리는…….”

“군인이기 전에 고추잖아? 하여간에, 저쪽 대장이 체신머리 없게스리 나설 때부터 우리 대장은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었던 거다. 밟혀서 걸레가 되거나, 계급이고 지랄이고 한 판 들이받거나. 근데 우리 미친 사나이 대장부 대장님께서는 두 번째를 택하신 거지.”

살라스는 더 이상 대꾸할 힘도 없었다. 그저 한숨 쉴 뿐.

“…대장님도 프레드릭님과 같은 생각이실까요?”

“아니. 그냥 열 받아서 나서신 거겠지.”

“…….”

살라스도, 프레드릭도 군터가 좋게 말해 감정적이고 나쁘게 말해 단순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는 명백한 단점이었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런 본연의 기질이라는 것이 아무리 의식적으로 억누른다 해도 어느 순간에는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특히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있을 때는 더욱 그것이 심한데, 지금이 딱 그 경우였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난 상태에서 투스바이언이 그것을 건드리다 못해 아예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저 대머리 대장께서 자길 이기면 없던 일로 치겠다시잖냐.”

“하아…그게 되겠습니까? 투스바이언 대장은 십 년도 전부터 오테론 최고의 무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넌 우리 대장님이 질 것 같으냐?”

“…….”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분명 투스바이언은 자타가 공인하는 오테론 최고의 용사이며, 그 무명이 살마드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그가 수십 년 간 복무하면서 만든 무용담은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반면 군터는 어떤가?

살라스는 군터가 누군가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군터에게 갖고 있는 존경심이라던가, 충성심 때문에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같이 군터의 강함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내린 생각이었다.

“난 대장님이 이길 거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1대1로 붙어서 저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어.”

“…….”

프레드릭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정 짓듯 말했다. 살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소 갑갑한 얼굴로, 서로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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