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등 -->
“이번의 일을 통해 기병대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대두되었다. 사실 새삼스럽기도 하지. 야만인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병이 언제나 필수적이었으니.”
그라메인은 이번 토벌에서 크게 한 일도 없으면서 마치 자신이 주역으로 활약했던 것처럼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면서 그는 기병대가 이리 중요하니 평상시에도 정신 바짝 차리고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이야기를 몇 번 씩이나 반복했다. 중간 중간 “나의 지휘에 따라”라는 말도 섞어준 것은 덤이었다.
군터는 그런 그의 행태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게도 보였다. 자기 자신을 높인다는 것은 그만큼 남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기병대장이라는 허울 좋은 감투를 쓰고는 있지만, 실상 그를 따르는 것은 그의 직속 기병들 밖에 없으니,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톨이 기병대장에 불과했다. 그러니 저렇게 입 아프도록 떠들어대며 자기 과시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간만에 한 번 달려보도록 하지!”
수백 기의 기병이 성을 나와 달렸다. 말발굽 소리에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대오를 갖춰 질주하는 수백의 기마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기병대는 굴곡진 초원의 언덕을 순식간에 주파하고 너른 평야지대에 접어들었다.
“감속!”
그라메인이 외쳤다. 거침없던 질주가 급속도로 느려졌다. 순간적으로 멈춘 것 같이 보이는 기병대의 앞에 가상의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돌파!”
느려졌던 속도가 일시에 폭발했다. 2차 화살세례가 날아들기 전에 신속하게 적과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좌측 선회!”
화살 비의 사정권을 지나쳤지만 그 앞에는 긴 창을 앞세운 창병들이 밀집 진형을 갖추고 있다. 그러자 기병들이 그들을 피해 좌측으로 움직였다. 적이 대비하고 있는 방어선을 피함과 동시에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기병대가 주변을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적군은 혼란에 빠진다. 특히, 정면충돌을 기다리고 있던 창병들은 방향을 돌려야할지 유지해야할지 모르고 우물쭈물 하고 있다.
“우로!”
이번에는 완만한 선회가 아니라 잔뜩 날이 선 직각선회다. 다소 무리한 움직임으로 한 덩이처럼 뭉쳐 있던 대열에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누구 한 명 낙오되는 이 없이 적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전속 돌진!”
한 자루 창이 된 기병대가 적군의 진형을 꿰뚫었다. 전열이 무너진 적들은 우왕좌왕하며 흔들리고, 때마침 아군이 정면에서 밀고 들어와 적을 완전히 붕괴시킨다.
전형적인 기병에 의한, 기병을 위한 승리.
“워, 워!”
선두에서 신나게 말을 달리던 그라메인이 한 손을 들고 속도를 줄였다. 뒤따라 달리던 기병대도 그를 따랐다.
“좋아. 아주 괜찮았다. 모두들 수고 했다!”
그라메인은 아주 만족한 기색이었다.
반면, 병사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군터의 병사들은 덤덤한 얼굴인데 비해 코르넬의 병사들은 다소 아쉬운 기색이었고, 그라니스 천인대의 기병들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투스바이언 천인대의 병사들은 분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은 군터 기병대에게 향했는데, 못 느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저 새끼들은 왜 야리고 지랄인지 모르겠네.”
프레드릭이 고개는 정면으로 향한 채 입만 벌려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조금 크신 것 같습니다.”
살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목소리를 프레드릭보다 훨씬 작게 했다.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뭐 어때? 저 새끼들은 대놓고 야리는데, 우리는 우리끼리 말만 주고받는 거잖아.”
“그래도…대장님께서 시빗거리는 최대한 피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때 군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
살라스는 입을 다물었고 프레드릭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거봐. 아니 그렇잖아. 제 놈들이 못나서 쳐진 걸 가지고 왜 이쪽에다 대고 야리냐고 기분 나쁘게. 확 눈깔을 파버릴라.”
마지막 눈깔 운운하는 부분에서는 프레드릭도 신경이 쓰였는지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투스바이언 천인대의 기병들이 분해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직각선회를 할 때 대열에서 살짝 떨어져 나갔던 이들 중에는 그들이 있었고, 반면 군터 기병대는 매끄럽고 여유롭게 선회에 성공했다.
유치한 질투다. 다만 이것이 상대에 대한 멸시, 혹은 증오와 뒤섞이면 유치한 질투에서 끝나지 않게 된다.
‘머저리 같은 놈들.’
군터가 프레드릭을 만류하지 않은 까닭이 있었다. 그는 투스바이언의 졸개들이 품은 치졸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프레드릭의 눈깔을 파버리고 싶다는 말에 적극 동의했다.
“……”
저 머저리들을 이끄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백인장이 그를 노려봤다. 그에 군터도 똑같이 노려봐주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사납게 노려보니 꼬리를 만 개처럼 시선을 피한다.
‘한심한 놈.’
딱 저 수준이다. 대장부터 졸개들까지 참 한결같지 않은가. 군터는 코웃음 치며 모커스를 쓰다듬어주었다. 콧김을 씩씩 뿜어대던 말이 그의 손길에 기분 좋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여기가 좋겠군.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지!”
병사들 간의 미묘한 기류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아진 그라메인이 휴식을 명했다. 기병대는 즉시 하마하여 각 부대별로 모여 앉았다. 그라메인은 커다란 바위 위에 그의 휘하들과 걸터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한창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때.
나무에 기대 앉아 있던 군터가 눈을 떴다. 저 멀리서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희미한 점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군터는 그것이 너덧 정도 되는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선두에 있는 이는.
‘투스바이언?’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니, 형님!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라메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투스바이언을 맞았다. 형님이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 붙는 것을 보아 그와 투스바이언의 평소 사이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하하하! 답답한 성 안에 일도 없이 박혀 있어봐야 뭐 하겠나? 간만에 말 위에서 아우님도 만날 겸, 멍청한 부하 놈들이 잘 하고 있는지도 볼 겸 해서 나와 봤네. 혹 내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니겠지?”
“방해라니요!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투스바이언은 그라메인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병사들에게도 하나하나 아는 체를 했다. 처음에는 그라니스 천인대의 기병들, 그 다음은 자신의 부하들. 그 후에는 웃음을 지운 채 코르넬과 인사를 나눴고, 군터와는 낯빛을 굳히고 “수고하는군.” 한 마디만 한 채 돌아섰다. 그것을 보며 군터는 그가 비웃었던 머저리들의 유치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훈련은 다 끝난 것인가? 내가 너무 늦었나 보군.”
“아닙니다. 잠시 쉬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직 해가 중천에 있는데 벌써 끝날 리가 있겠습니까.”
“호오. 그래?”
“예.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해봐야지요.”
훈련이 재개되었다. 투스바이언은 그의 부관 몇과 함께 언덕에 올라 훈련을 참관했고, 기병대는 여러 기동들을 선보였다. 그 중에는 무난한 것들도 있었지만 다소 과격하고 난이도가 있는 것들도 몇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할 때는 어김없이 조금씩 대열을 이탈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주로 투스바이언과 그라니스 천인대의 병사들이었고, 코르넬의 병사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오직 군터 기병대의 병사들만이 뒤쳐짐 없이 모든 기동을 완벽히 수행했다.
말들이 지친 기색을 보일 즈음에 기병대는 다시 휴식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때 투스바이언이 단단히 뿔난 얼굴로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은 백인장부터 병졸들까지 모두 기립하여 섰는데, 상관의 흉흉한 기세를 느꼈는지 죄다 죽상이었다.
“한심한 놈들! 말을 탄다는 놈들이 대열에서 낙오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느냐!”
“소, 송구합니다.”
백인장이 대표로 나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투스바이언은 백인장은 본 체 만 체 하며 그 뒤의 병졸 하나를 콕 집었다. 그는 조금 전 훈련에서 대열을 이탈한 적이 있는 병사였다.
“너! 네가 한 번 말해봐라! 기병이 전투 중에 대열에서 삐져 나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주, 죽음을 의미합니다.”
투스바이언의 지목을 받은 병졸은 거의 사색이 되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 넌 이게 실전이었다면 넌 이미 열에 여덟의 확률로 죽은 것이다! 기병은 하나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어! 뭉쳐 있어야만 힘을 갖는 것이다! 뭉쳐 있어야만 안전한 것이야! 그러지 못하는 놈은 기병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그는 병사의 바로 앞에다가 흉악한 얼굴을 들이민 채 침을 튀겨가며 외쳤다. 그가 한 번 소리칠 때마다 병사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강풍을 만난 풀처럼 이리저리 휘날렸다.
“먼저 멍청한 주인을 만난 네 말에게 미안해해라! 그 다음에는 저런 노예사냥꾼 놈들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너 자신을 반성해라! 알겠느냐!”
“옛!”
“…….”
그 대목에서, 군터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고, 눈에서는 은은한 노기가 서늘하게 뻗쳐 나왔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병사의 머리를 쥐고 흔들던 투스바이언이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그의 사나운 눈이 삐딱하게 선 군터의 모습을 담았다.
“뭔가.”
투스바이언이 쥐고 흔들던 병사를 놓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코르넬이 다급히 군터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투스바이언의 걸음은 그의 성미만큼이나 급했다. 투스바이언과 군터는 곧 머리 하나 정도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네놈. 내게 뭔가 불만이 있느냐?”
마주보고 선 투스바이언은 한 마리 거대한 수사자 같았다. 큰 키가 가려질 만큼 거대한 몸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위압적이다 못해 위협적이었고, 굵직한 목소리는 조용히 말해도 걸걸하게 울렸다.
그에 반해 군터는 그와 키는 비슷했지만, 투스바이언에 비하면 체형이 호리호리한 편이어서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다.
“불만이라기보다, 천인장님의 말씀 중에 틀린 부분이 있어 고쳤으면 합니다.”
낮은 목소리에 비해 사납게 노려보는 투스바이언. 군터는 그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또박또박 말했다.
“틀린 부분? 내 말에?”
투스바이언의 입술이 불쾌하게 비틀렸다.
“저희는 노예사냥꾼이 아닙니다.”
“아니. 맞다.”
군터는 표정부터 목소리까지 모두 덤덤했다. 반면 투스바이언은 슬슬 조금 전 그의 부하 병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가 올라갈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너희가 한 짓을 도시의 모든 사람이 다 아는데, 어찌 너희가 노예사냥꾼이 아닐 수 있단 말이냐. 왜? 변명이라도 하고 싶으냐?”
“변명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예사냥꾼보다도 못한 천인장님의 부하들은 어떻게 한답니까? 모조리 수준 미달이니 당장에라도 군복을 벗거나, 다시 살마드로 가 훈련이라도 받게 하시지요.”
“뭐라!”
투스바이언의 큼직한 발이 땅을 내리 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살짝 땅이 흔들렸다. 군터는 이글거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인기는... 일단 재미가 없으니 인기가 없는 것이겠죠. 트렌드와 맞지 않는 것이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