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등 -->
군터는 코르넬과 함께 막시밀리언의 자택에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 있었던 막시밀리언으로부터 군무회의의 내용을 전해 들었다.
회의 내용 자체는 별 것 없었다. 뻔한 주제에 뻔한 이야기들이 오갔을 뿐.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파비우스 리에론이 거론되었다는 정도인데, 그를 통한 요청은 흐지부지될 확률이 컸다.
“투스바이언 그 자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군요.”
코르넬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군터는 대화에 끼지 않은 채 묵묵히 있었다. 별 다른 의견이나 생각이 없어 그랬던 것인데 막시밀리언의 눈에는 다르게 비쳤는지, 그의 시선이 군터에게 향했다.
“군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모커스의 짝이 될 암말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군터는 급히, 하지만 태연함을 가장한 채 둘러댔다.
“생각이라기보다…그 자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는지를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투스바이언에게 말인가?”
“예.”
막시밀리언이 흐릿하게 웃었다. 코르넬도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간단해. 그 자가 내게 이를 드러내고, 날 물어뜯을수록 내게 득이 되기 때문이지.”
“예?”
물은 것은 군터였는데 반응은 코르넬에게서 나왔다.
“난 파비우스 리에론을 위해 노예사냥을 했지. 덕분에 온순한 사령관에게 조금 미운털이 박혔단 말이야.”
무알 카빌라이드가 아무리 호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밑에 있는 부하가 은근슬쩍 다른 이에게 줄을 대는 것을 좋게 볼 리는 없었다. 물론 그가 직접적으로 무슨 말을 하거나, 막시밀리언에게 불이익을 준 것은 아니지만 은연중 불편한 심기를 엿볼 수 있는 때가 제법 있었다. 막시밀리언으로서는 아무래도 잘못한 것이 있는 만큼 최대한 조심하면서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투스바이언이 날 물면서 시끄럽게 해주면 사령관의 따가운 눈총은 내가 아니라 그 자에게 향한단 말이지. 더군다나 난 아무런 반박도 않고 순진한 양처럼 있으니까 말이야. 가만히 있는 나를 투스바이언이 괴롭히는 꼴이 되지 않는가.”
무알 카빌라이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평화주의자였다.
군인이 무슨 평화주의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그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며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온하게, 원만하게 흘러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분쟁을 일으키는 아랫것을 어찌 생각하겠는가? 그것도 한 쪽은 얌전히 있는데, 한 쪽은 미친 개새끼처럼 시끄럽게 짖어댄다면?
막시밀리언이 미운털이 박혔다고는 해도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잘못이라기보다는 약은 짓을 한 것인데, 만약 그게 큰 잘못이었다면 진즉에 어떤 조치가 내려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괘씸하지만 두고 보겠다’선에서 끝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투스바이언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최소한의 머리는 있어야 해. 머리가 없으면 하다못해 눈치라도 있어야지.”
투스바이언의 성미가 괄괄하고, 때로는 폭급하다는 것은 오테론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연히 지근거리에서 그를 봐온 나이 많은 사령관도 알고 있다. 익숙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더러운 성미를 항시 마음 넓게 받아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매일 보는 풍경도 때로는 아름답거나 멋져 보이고, 때로는 진부해 보이고, 때로는 꼴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사람의 마음은 찻잔 속에 고인 찻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투스바이언은 그것을 모른다. 자신이 ‘투스바이언’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다른 이들이 이해해줄 거라 생각한다. 그는 적을 대할 때는 누구보다 뛰어날지 몰라도, 사람을 대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미숙하다.
“투스바이언은 내게 있어서 면죄부인 셈이지. 난 돌아서서는 그를 도발하지만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거야. 물론 면죄부가 힘이 다할 것 같으면 가끔씩 맞장구는 쳐주겠지.”
말하자면 화살받이인 셈이다. 거기에 피해자를 연기하면서 오늘 그라니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동정심을 끌 수도 있다. 여러모로 투스바이언은 막시밀리언에게 있어 짜증나면서도 유용한 패였다.
“상관으로서 이런 말을 하기가 미안하지만, 자네들도 투스바이언의 무리와 시비가 붙는다면 받아치지 말고 피하게나. 특히 군터. 자네가 힘들겠지만 당분간은 좀 참게.”
“예.”
투스바이언 본인이 아쿼러즈에 대한 불신이 심한 만큼 그의 휘하들도 그 영향을 받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아니면 애초 그런 성향이 있는 이들이 투스바이언의 밑으로 모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군터 기병대를 아쿼러즈 기병대, 혹은 야만인 기병대라고 낮추어 부르곤 했다. 군터는 건너서 들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고를 칠 수는 없어 꾹 참고 있는 중이었다. 막시밀리언도 그것을 알고 말하는 것이리라.
“당분간이야. 당분간. 내 예상이지만 저 멧돼지가 설쳐대는 것도 오래 가지 않을 성 싶네. 아마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이야.”
“그 말씀은?”
“멧돼지가 초원의 찬바람을 너무 오래 맞다보니 생각하는 머리까지 얼어버린 게지. 똥오줌을 못 가리고 설쳐댔으니 곧 몽둥이가 날아들지 않겠나?”
“사령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코르넬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막시밀리언은 답하지 않고 차를 들었다. 사령관이 직접 챙겨준 바로 그 차였다.
*
막시밀리언의 자택에서 나온 후, 군터는 휘하 십인장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장소는 그의 집이었다. 그는 새로운 집의 가장 큰 방에 긴 탁자 하나를 두고서 회의실로 쓰고 있었다. 막시밀리언이 자신의 집에 갖춰놓은 회의실을 보고 흉내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다들 몸을 사리도록.”
“당분간이 대충 얼마입니까?”
“모른다. 별도의 지시가 있거나,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무기한이라고 생각해라.”
담담한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투스바이언 휘하의 병사들만 피해 다니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오테론에 주둔하는 병력들 중 약 3분지 1가량이 투스바이언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기병대장 그라메인이 투스바이언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란 사실이다. 얼핏 보면 별로 맞지 않을 것 같은 두 명인데, 의외로 둘은 꽤나 죽이 잘 맞았다. 종종 그라메인의 지휘를 받아야하는 군터 기병대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둘씩 다니면 시비 걸리기가 쉬우니 되도록 여럿이서 뭉쳐 다녀라. 번거롭겠지만.”
그 전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만, 노예사냥 이후 그들을 보는 시선이 더욱 안 좋아졌다. 막시밀리언 천인대와 투스바이언 천인대의 사이가 싸늘해지면서 거의 모든 인원이 아쿼러즈들로 구성된 군터 기병대는 과장 좀 보태 적의 어린 시선을 받게 되었다. 동족이랍시고 봐준 거냐는 둥의 비아냥거림은 덤이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어찌나 나대는지, 정말 칼을 뽑고 싶을 때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십인장들 중에는 군터 십인대 소속으로 초기부터 함께 했던 이들이 여럿이었다. 그들은 살마드의 수인 출신으로 아쿼러즈도 아니었다. 하지만 군터 기병대에서 출신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대의 구성원 모두는 전우이며 동료였다. 군터 기병대의 누군가가 욕을 먹는다면 이는 부대 전체를 욕한 것과 같은 것이다.
“다른 건 괜찮습니다만, 그라메인의 소집이 문제군요.”
이따금씩 그라메인은 기병대들을 소집하곤 했다. 특별한 일이 없음에도 그것은 합동 훈련이란 명목으로 이루어졌는데, 실은 훈련보다 그라메인이 스스로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 내리는 쓸 데 없는 명령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리 쓸 데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명령은 명령인지라 별도의 일로 자리를 비우거나 한 게 아닌 이상은 무조건 소집령에 따라야 했다.
“요즘엔 그 작자가 대놓고 투스바이언과 붙어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또 소집령이 떨어지면 보나마나 개 같은 꼴을 보게 될 텐데…….”
“신경 쓰지 마라. 소집령이 떨어진다면 코르넬 기병대도 함께 모일 것이고, 만약 일이 생긴다 해도 내가 해결하겠다.”
막시밀리언은 그에게 참으라고 했다. 부하로서 상관의 명령은 따르는 게 맞다. 그러므로 군터는 되도록 짜증나는 일이 생겨도 꾹 눌러 참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부하들이 정도 이상의 개 같은 꼴을 보게 된다면, 그때는 거리낌 없이 나설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부하들이 믿고 따르는 상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관인 그는 부하들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었다.
“별 일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라메인이 투스바이언과 붙어먹었다 해도 정도는 지킬 것이다. 투스바이언 쪽도 그라메인이 있는 앞에서 생각이 있다면 대놓고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이고.”
그라메인은 기병대장이라는 독립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오테론 소속이었다. 그는 무알 카빌라이드의 직속 부대장으로서, 천인장들의 알력다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투스바이언과 친분이 있어 약간의 편의를 봐준다거나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을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정말 별 일 없었으면 좋겠군요. 싸움이 끝나고 좀 편해지려니 별…….”
적이라면 베면 된다. 하지만 아군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그럼 안전한(?) 주먹으로 푸닥거리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하지 말라고 한다. 싸움질에나 능한 군인들로서는 머리가 아픈 일이다.
“말했지만, 별 일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들 마라. 부하들에게도 그리 전해. 적어도 내 앞에서 생기는 일은 내가 책임진다.”
군터 역시 이 상황이 짜증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전에도 기분 나쁘게 눈을 흘기면서 가는 투스바이언 휘하의 백인장을 때려눕히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인대장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자기감정대로만 움직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부하들에게 섬김 받는다는 것은 그들을 지키고 이끌어야하는 의무 또한 지님을 의미한다. 군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라도 본연의 성질을 죽이고 또 죽여야 했다.
“아무튼, 당분간은 다들 조심해주기를 바란다.”
군터는 그렇게 부하들을 다독여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이 후.
그라메인의 소집령이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