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집 -->
파비우스 리에론이 그의 군대와 함께 살마드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그간 다소 산만했던 오테론의 분위기도 여느 때처럼 돌아왔다. 살마드군의 복귀는 오테론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전운이 다 가셨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테론이 평화를 되찾은 와중에, 오테론 군부에서는 때 아닌 잡음이 일었다. 이번 토벌로 이름값을 단단히 한 투스바이언이 은연중 막시밀리언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번 토벌에서 군인이 아니었다. 그가 한 것은 노예장사일 뿐이며, 제국군으로서, 오테론의 군인으로서 명예롭지 못한 짓이었다. 그의 밑에서 아까운 피를 흘린 병사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물론 대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며, 막시밀리언의 앞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적도 역시 없었지만 그가 그의 부하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내용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당연히 막시밀리언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면전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자기 부하들에게만 이야기한 것이 알음알음 소문으로 퍼진다지만 비난할 의도가 없었다면 부하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었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알음알음 퍼질 이유도 없었다.
“꼴 같지 않게 얕은 수작을 부리는군.”
차라리 대놓고 와서 욕을 하고 시비를 걸었으면 걸었지, 이런 식으로 얄팍한 짓거리를 벌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 막시밀리언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번 토벌에서 투스바이언이 세운 공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공을 세우기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싸움을 했으며, 죽이지 않아도 되는 부하들을 죽였다. 그는 수급 수천 개를 얻었지만 백 명이 넘는 부하들을 그 대가로 내밀었다. 그의 공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무모하게 부하들의 피를 뿌려가며 세운 공을 명예롭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에 반해 막시밀리언은 비록 남들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부하들의 목숨을 최대한 보존했다. 부하를 죽인 자와 부하를 살린 자. 어느 쪽이 더 낫다 말할 수 있겠는가?”
투스바이언이 부하들을 통해 이야기를 퍼뜨렸다면 막시밀리언은 아예 돈을 뿌려 사람을 부리면서 본격적으로 소문을 살포했다. 그런 작업에 들어간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오테론에서는 막시밀리언과 투스바이언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투스바이언 대장은 수천 개의 수급을 가져왔어. 수천 개라고, 수천 개! 듣자하니 장대에 수급들을 빼곡하게 꽂아서 국경에 늘어놓는다더군. 무도한 야만인 놈들도 그걸 보면 오줌을 지리면서 도망갈걸? 반면에 막시밀리언 대장을 봐. 그가 한 건 노예사냥이지 토벌이 아니라고. 그는 수백이나 되는 병사들을 그의 노예사냥을 위해 쓴 거야.”
“투스바이언 대장이 오테론 제일의 용사라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의 밑에서 복무하라고 하면 글쎄? 그는 싸움을 좋아하고, 싸움이 많은 만큼 그 밑의 병사들은 매번 수십 명씩 죽어나간다고. 그렇게 몇 번만 싸우면 남아나는 부하들이 있겠어? 이번 토벌만 해도 그래. 백 명이 넘게 죽었다잖아! 그에 반해 막시밀리언 대장 밑의 병사들은 10명도 죽지 않았어. 그러고서 천 명이 훌쩍 넘는 노예까지 챙겼지. 어느 쪽이 더 용맹한지는 분명하지만, 또 어느 쪽이 더 현명한지도 분명한 거 아니야?”
사람들은 여유 시간에 모였다 하면 저마다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 주장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렇게 벌어진 토론에서는 어느 한 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지만, 토론이 계속되어가는 와중에 두 천인장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어느 정도 굳어져갔다.
투스바이언은 용맹하고 명예롭다. 하지만 거칠다. 반면 막시밀리언은 때로는 명예롭지 못하다 비판 받지만 현명하고 너그러우며 부하들을 위할 줄 안다.
이런 인식의 토대를 누가 먼저 주장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두 천인장을 이야기하며, 시민들은 이러한 인식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그들의 머릿속에 굳건히 자리 잡았고, 논쟁이 시들시들해질 즈음에는 누구도 그런 인식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오테론 내성에 있는 가장 높은 첨탑 꼭대기에서 군무회의가 열렸다. 그곳에 무알 카빌라이드의 집무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들 들게. 차향이 아주 좋아.”
“예.”
세 명의 천인장들은 무알 카빌라이드를 중앙에 두고 좌우에 나눠 앉아있었다. 좌측에는 그라니스와 막시밀리언이, 우측에는 투스바이언이 자리했다. 그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집어들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이 밍밍한 물을 왜 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투스바이언이 말했다. 무알 카빌라이드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글쎄. 왜일까. 이 차라는 놈을 느긋하게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 향도 향이지만 실은 난 그런 느낌이 좋다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중력도 좋아지는 것 같고.”
“흠. 차분함이라. 제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군요.”
“허허허. 그라니스와 막시밀리언은 차가 입에 맞는 모양이지? 잘 마시는군.”
“예. 말씀대로 향이 좋군요. 무슨 차인지 알려주시면 저도 좀 구해서 종종 애용해야겠습니다.”
그라니스는 얼굴에 난 자잘한 흉터들이 아니었다면 문관이라고 해도 믿을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눈을 반개한 채 차향에 깊이 몰두해 있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다인(茶人)의 그것이었다.
“자네가 그리 말할 줄 알았네. 이따가 가기 전에 내 약간 챙겨주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막시밀리언 자네는 어떤가?”
“아. 좋습니다. 저희 부친께서도 차를 즐기시는데, 선물로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군요.”
“허허. 그런가? 자네에게도 조금 내어주지. 가져가서 한 번 맛 보게나.”
“예. 감사합니다.”
세 사람이 차에 대해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투스바이언은 따분하다는 듯이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모두 끝난 후. 본격적인 군무회의가 시작됐다.
“이번에 야만인들의 대규모 남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략 300여 명의 병사들이 상했네. 죽은 이들이 반 정도 되고, 퇴역해야 할 정도의 중상자가 다시 70여. 나머지는 상당기간 요양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실로 뼈아픈 피해로군.”
무알 카빌라이드가 사령관으로서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그라니스가 담담히 말을 받았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넘어온 야만인들의 수가 수였던 만큼 그리 큰 피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초동대처가 미흡했던 점은 지적해야 하겠습니다만.”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이번 일은 이렇게까지 피해를 입지 않고도 정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보네. 무엇이 문제였다고 보는가?”
이번에는 막시밀리언이 답했다.
“아무래도 워낙 많은 수가 워낙 넓은 범위에서 내려오다 보니 즉각적인 대처가 어려웠습니다. 뒤늦게 대처를 하려 하다 보니 충분한 준비나 휴식 없이 무리하게 서둘러 싸우려 했던 것이 피해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번에도 답은 같군.”무알 카빌라이드가 쓴웃음을 머금자 투스바이언이 언성을 높였다.
“사령관. 살마드에 사정을 전하고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저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오테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기병을 늘리든가 병사수를 늘리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 합니다. 언제 또 이런 일이, 어쩌면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생길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보군으로 낼 수 있는 기동력에는 한계가 있다. 전력의 전부가 기병이라고 해도 무방한 초원인들을 상대로는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요새를 짓고, 초소를 세우고, 기병을 양성했지만 그 모두 부족함이 있었다. 이번의 일만 해도 병사가 더 많아 경계를 확장했거나, 기병이 더 많아 보다 신속히 대응했다면 피해를 더 줄일 수도 있었다.
사실 이는 오테론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하여 이전에도 수십 차례씩이나 살마드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살마드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너무 많은 요청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오히려 지원은커녕 질책성 짙은 답신이 왔다. 그 이후로는 그런 지원 요청도 잘 하지 않았다.
“그 자들은 누구 덕에 살마드에서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잔악한 야만인 놈들이 오테론을 넘어 바크렌을 휘젓는다면 과연 누가 화를 입겠습니까!”
투스바이언은 이 자리에 살마드의 관리들이 있다면 당장에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모두 오테론의 군 지휘관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투스바이언의 고함은 설득력보다는 피로감을 선사했다.
무알 카빌라이드는 머리를 짚었고 막시밀리언은 눈을 감았다. 그나마 그라니스만이 그를 상대해주었다.
“점잖은 말로 해서 알아들을 이들이었다면 진즉 지원을 해줬을 걸세. 다만 이번에 그 파비우스 리에론이 왔다 갔으니 그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약은 수를 쓰자는 말인가?”
투스바이언이 대번에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라니스는 투스바이언이 편법보다는 파비우스 리에론이라는 이름에 반응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도 이곳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느꼈을 테니 말이 통하지 않겠나?”
“흥! 어림없는 소리지. 그 자는 장사치야. 군인의 일에는 관심도 없을 걸세. 아! 마침 그와 긴밀한 막시밀리언도 자리에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게나. 그런 요청을 한들 파비우스 리에론이 꿈쩍이나 할지 말이야.”
대놓고 비아냥대는 투였다. 막시밀리언이 노예사냥을 한 후부터 투스바이언은 그에게 대놓고 경멸과 적의를 내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막시밀리언은 받아치거나 대꾸하기보다 쓰게 웃는 편을 택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그럴 리가. 네가 그와 꽤 긴밀한 사이인 것으로 아는데.”
“그쯤 해두게.”
비아냥거림이 점점 심해지자 그라니스가 개입했다.
“자네들이 서로 사감을 갖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는 않지만, 공사를 분명히 하게. 사령관이 계신 앞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크험!”
그라니스의 냉정한 질책에 투스바이언도 자신이 너무 나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령관. 제가 또 머리가 뜨거워졌나 봅니다.”
“아아. 나는 괜찮네. 나보다는 막시밀리언에게 사과를 해야 하지 않겠나? 욕을 본 건 내가 아니라 그이니 말일세.”
“예?”
무알 카빌라이드가 지그시 투스바이언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한 투스바이언이 마지못해 막시밀리언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군. 내가…너무 흥분했었어.”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괜찮다고는 하지만 막시밀리언의 얼굴에는 그늘이 있었다. 누가 봐도 마음이 상했다는 것이 티가 났다. 투스바이언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입술을 씰룩였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보게.”
회의가 끝나고, 첨탑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려던 막시밀리언을 그라니스가 불러 세웠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투스바이언이 워낙에 괄괄하고 다소 경솔한 면이 있지만 본성이 꼬인 자는 아닐세. 언제고 술을 옆에 쌓아두고 서로 흉금을 풀면 묵은 감정 따위는 다 씻어내 버릴 게야.”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불민한 탓이지요. 그분께서 저를 못마땅해 하시는 까닭도 이해하고 있습니다.”“음. 말했지만,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아마 그 치는 지금쯤 자기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도 못할 것이야.”
그라니스는 처연하게 말하는 막시밀리언을 다소 안쓰럽게 보며 위로해 주었다. 막시밀리언은 그에게 거듭 감사인사를 하고 다시 걸음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