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 사냥 -->
이사 날은 바로 잡혔다. 이미 집도 봐 둔 상태에서 길게 끌 이유가 없었다.
“이 집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벨리사는 그 사이 정이라도 들었는지 자그마한 집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어렸을 때를 빼면, 나한테는 첫 집이었으니까요.”
“아쉬워할 거 없어. 새 집은 더 근사할 테니까.”
내성의 집들은 매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지만, 반대로 매물로 나온 것이 나가는 경우도 드물었다. 왜냐하면 내성에서 거주할 수 있는 것은 권력과 돈이 있는 이들 뿐인데, 그런 이들은 그 수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미 집을 가진 이가 또 다시 집을 사는 경우가 아닌 이상 매물로 나온 집이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군터 같은 경우는 기병대의 백인장으로서 자격이 충분히 됐지만 돈이 부족해 들어가지 못했다가 이번에 받은 포상금으로 집을 구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셈이다.
“새로 갈 집에는 제법 널찍한 정원도 있어. 원한다면 거기에 꽃 같은 걸 키울 수도 있을 거야.”
물론 키운다고 해봐야 알록달록하게 정원을 꾸미는 일은 불가능하다. 오테론에서 자랄 수 있는 품종은 지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벨리사는 꽃을 기를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마냥 기뻐했다.
“가구들은 그냥 두고 가요?”
“응. 어지간한 건 다 있는 것 같더군. 그래도 챙겨가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일꾼을 시켜서 옮기게 할 테니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하릴없이 늘어져있을 그의 부하들이었다. 남아도는 힘, 이런 곳에라도 써야지 어디다 쓰겠는가.
*
새로운 집은 총 네 채로 되어 있었다. 둘은 각기 방이 4개와 3개씩 있는 거주용 건물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창고나 기타 용도로 쓸 수 있는 자그마한 건물이었다.
사람 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담이 건물을 빙 둘러싸고 있었으며, 거주용 건물이 마주 보이는 정면에는 창살로 된 대문이 나 있었다. 군터가 벨리사에게 말했던 정원은 바로 그 대문에서 거주용 건물 두 채로 이어지는 길의 양옆에 나 있었는데, 그가 말했듯 제법 널찍한 크기였다.
“와아!”
정든 집을 떠나 살짝 말수가 적어져 있던 벨리사는 새로운 집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그녀는 집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안내역으로 나온 관청의 관리가 고개 숙이며 말했다.
“4년 전에 집이 빈 뒤로는 나이만 먹고 있었습니다만…이제야 집이 새 주인을 찾았군요.”
“꽤 오래 비었었군.”
“예. 공교롭게도 전에 이 집을 사용하셨던 분도 기병대의 백인장이셨습니다.”
그의 말처럼 꽤나 공교로운 일이었다. 이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
“어쨌든 수고했네.”
군터가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짧은 시간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생해준 데 대한 성의표시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관리가 물러가고, 군터는 여전히 들떠 있는 벨리사와 함께 천천히 집 구경을 했다. 그는 전에 관리와 왔을 때 이미 한 번 쭉 둘러봤었지만, 벨리사와 함께 거닐며 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에 일 해주는 사람들 둘을 더해도 집이 너무 넓은 것 같아요.”
“좁으면 고민이지만 넓으면 여유지. 천천히 생각해보자.”
군터는 그가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했다. 주거용 건물 두 채 외에 한 채는 노예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나머지 한 채는 마구간으로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벨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마구간이요? 당신 말이 있어요?”
“…내가 기병대의 백인장인 걸 잊었나 보군.”
“아, 맞다.”
일전에 개선식을 할 때 성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말 위에서 진한 재회를 했던 것도 잊은 모양이다. 아니면 그 말이 그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실제로 기병대라 할지라도 졸병들의 경우는 그들이 타는 말이 그들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군의 소유였다. 임무가 없으면 마음대로 타고 나가지도 못했다. 적어도 십인장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내 말이다.”하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암말도 괜찮은 놈으로 한 마리 들여놓을 생각이야. 망아지가 태어날지도 모르겠군.”
군터와 벨리사는 걸음마다 즐거운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벨리사는 주로 정원에 심을 꽃이며 집에 들일 가구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군터는 마구간과 말, 그리고 각종 병장기들을 들여놓을 방에 대한 구상을 이야기했다. 서로 이야기하는 주제는 완전히 평행선을 달렸지만 그래도 그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새로 들인다던 아이는 이름이 뭐에요?”
“이름이…글쎄. 기억이 안 나는데.”
“뭐에요 그게? 이름 하나 기억 못해요?”
벨리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군터는 딱히 대꾸도 못하고 머쓱해졌다. 사실 일전에 노예로 받은 세 명과는 제대로 이야기 한 번 나눈 적도 없었다. 이름도 얼핏 두어 번 들은 것이 전부였고, 기억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실 주인은 그이지만 그 세 명의 관리는 할렌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가 노예를 관리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일일이 노예들을 관리하기 귀찮았던 군터는 할렌에게 일임해버렸다.
“안 그래도 할렌이 곧 데리고 올 거야. 이름은 그때 들으면 되지 뭐.”
귀찮아서 맡긴 일이었지만 의외로 할렌은 노예들의 관리를 잘 했다. 교육도 철저하게 시킨 모양인지 부하들에게서 새로운 노예들에 관련해서 아쉬운 소리 한 번 나온 적이 없었다. 적어도 군터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주인님. 데려 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렌이 노예를 데리고 왔다. 아직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여자 노예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할렌이구나.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유리아로부터 할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벨리사는 할렌을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이어서 바싹 굳어 있는 여자 노예에도 웃으며 반겨주었다.
“안녕. 귀엽게 생겼구나. 넌 이름이 뭐니?”
“루, 루시…입니다. 마님.”
소녀, 루시는 아직 제국말이 어색한 듯했다. 긴장한 탓에 혀가 굳어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군터가 할렌에게 눈짓하자 할렌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조금 어눌해도 말도 다 할 줄 알고, 하는 말도 다 알아듣습니다.”
“다행이군.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걸 써야 하나 걱정했다.”
“너무 그러지 마요. 애가 더 긴장하잖아요.”
벨리사는 루시가 벌써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녀는 루시에게 네가 지낼 곳을 보여주겠다며 손을 잡고 이끌었다. 자기도 조금 전에 이 집을 처음 봤으면서 말이다. 군터는 어색한 안주인 흉내를 내는 그녀를 보고 실소를 머금었다.
“온 김에 네 어미나 보고 가라.”
“예. 그럼.”
까먹고 있던 것을 떠올린 군터가 할렌을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예. 하실 말씀이라도.”
“내일부터는 병영에서 일할 필요 없다.”
“예?”“병영의 잡일은 다른 녀석들에게 넘기고, 내일부터 너는 내 종자로 일해라.”
“아…….”
할렌은 떡 하니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멍한 얼굴이 감격으로, 감격이 기쁨으로 순식간에 바뀌어갔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 숙이는 할렌. 군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하고, 잘 해라. 종자 다음이 뭔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모를 리가 없다. 할렌은 어제도, 그 전에도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테니까.
“다른 녀석들은 수인에서 시작해 3년이었지만, 넌 노예니까 5년이다. 그 5년이 언제부터 시작될지는 너 하기에 달렸다.”
“예, 옛!”
말이 5년이지, 그 5년이 시작된 순간부터는 자유의 몸이다. 즉, 할렌에게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종자로서의 생활이 자유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셈이다. 녀석이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는지를 헤아려 본다면 저렇게 울먹거리는 얼굴도 보기는 싫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가라. 네 어미가 좋아하겠군.”
“옛!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아니, 잘 하겠습니다!”
*
전에 살던 집에 비해 새로운 집은 배 이상으로 넓었다. 때문에 집을 채우고 가꾸는 데도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기본적인 가구부터 시작해 정원을 꽃을 심기 좋게 정리하는 일, 마구간을 만드는 일 등, 할 일이 상당히 많았다.
“아니, 대장님. 싸게 일꾼들을 쓰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황금 같은 휴일을 보내고 있는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이마가 땀으로 범벅이 된 프레드릭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툴툴댔다. 그에 군터가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일꾼들을 부리는 것보다 너희를 쓰는 게 더 싸게 먹히잖나. 아니지, 너희는 공짜니까 그런 비교도 무의미한가?”
“우와아아아아!”
프레드릭은 그 한 마디에 이성이 반쯤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다행히 나머지 반은 날아가지 않아 원통함을 고함으로만 풀어 다행이었다. 괜히 달려들었다가는 험한 꼴을 당했을 테니까.
“너무 투덜대지 마라. 일을 다 끝내면 내가 한 턱 낼 테니.”
“정말이십니까? 아니, 아니지. 그 한 턱이라는 것의 정확한 의미부터 짚고 넘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따악!
쓸 데 없이 냉철했던 프레드릭은 기어이 이마에 혹 하나를 달고 말았다.
“마구간입니까…부럽군요.”
부하들은 큰 집도 집이지만 무엇보다 마구간을 부러워했다. 아무래도 그들 모두가 기병이고 대다수가 아쿼러즈들이다보니 말을 지근거리에서 키우고 돌볼 수 있다는 점이 크게 다가온 것이다.
“암말도 한 마리 들여 놓을 거다. 이제 모커스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 새끼를 볼 때가 됐지.”
모커스는 군터가 타는 말의 이름이었다.
“이야. 그거 근사하네요. 나중에 모커스 녀석이 좀 힘이 달린다 싶으면 그 새끼가 아비의 뒤를 잇는 겁니까?”
“글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건 너무 먼 이야기 같군.”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대장님도 아시다시피 전투마는 수명이 짧지 않습니까.”
조금은 우울한 이야기였다. 기병에게 전투마는 가장 가까운 전우였으니, 전투마를 보낸다는 건 전우를 보내는 것과 같았다. 군터가 굳이 집 안에 마구간을 만들길 원한 것도 그의 전우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자주 살피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모커스가 현역 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했죠? 대장님 이전에도 주인 한 명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합쳐서 5년 조금 넘었다.”
통상적으로 군마의 수명은 10년을 넘기 어렵다. 10년은커녕 8년 정도만 되어도 노마 취급을 받았으니, 모커스가 제대로 달릴 수 있는 것도 고작해야 2년 남짓인 셈이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쯤하고, 일이나 해라.”
아직은 생각하기 싫은 미래였다. 하여 군터는 쓸 데 없는 이야기를 꺼낸 프레드릭의 엉덩이를 힘주어 걷어찼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