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 사냥 -->
막시밀리언은 다음날 군터를 불러 다시 한 번 선물에 대한 기쁨을 표했다. 라일라였던가? 아무튼 간밤에 그에게 바친 무녀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 반드시 후사하겠네.”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아. 알고 있네. 알고 있어. 하지만 자네의 선물이 나는 마음에 들었으니, 반드시 보답을 해야겠네. 오테론에 돌아가자마자 내 성의를 표할 테니 기대하고 있게나.”
정말로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긴, 사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계집이기는 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는 계집이었으니.
뭐, 어찌 되었든 선물을 받은 사람이 기뻐하니 준 사람 입장에서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비록 반쯤은 미련을 떨쳐버리려고 준 선물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 근방은 다 정리된 것 같다. 더 남하한다고 해도…딱히 성과를 보기는 힘들 것 같고.”
한 달하고도 보름여 간 열심히 오테론 전역을 샅샅이 뒤졌다. 포로만 이천 가량을 붙잡았고, 섬멸한 수도 수백. 이 정도 했으면 근방에는 씨가 말랐다고 봐야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성과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야. 돌아간다.”
막시밀리언이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달 반에 걸친 임무를 마무리하고 오테론으로 귀성(歸城)길에 올랐다.
* * *
기껏 도시에 돌아와서도 군터는 곧장 벨리사를 보러 가지 못했다. 막시밀리언을 따라 파비우스 리에론을 보러 가야 했던 것이다.
‘짜증나는 놈이군.’
누군가 그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대경했겠지만, 군터는 진심으로 파비우스 리에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인에게 노예사냥꾼 일을 시킨 것도 그렇지만, 한 달 반 동안 야지에서 구르다 온 이들을 이렇게 오자마자 바로 호출해대는 행태가 그의 배려 없는 오만함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다 가장 큰 이유로, 지금 이 호출 때문에 벨리사를 보러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군터의 애써 띄운 무표정한 얼굴 아래서는 뜨끈한 노기가 들끓고 있었다.
“수고했네. 이만하면 뭐, 대충 만족스럽군.”
대충 만족스럽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뱉는 한 마디를 듣자 뒷짐 진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대충 만족스러운 것을 위해서 수백 명의 병사들이 무려 한 달 반 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땅 위에서 몸을 뉘였다. 죽은 이가 열 하나에 부상당한 이는 그 배가 넘는다. 개중 몇 달간을 요양해야 하는 이들도 다섯이 넘었다. 그리고 앞으로 (아마도)평생 노예의 굴레가 씌워진 이들이 이천 가량이다. 그 모두가 저 탐욕스런 놈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역겨워서 토악질이 것 같았다. 저 파비우스 리에론은, 단언컨대 군터가 이제껏 보았던 모든 인간들 중 단연 최악이었다.
“그나저나 투스바이언이라는 자 말이야.”
“예.”
파비우스 리에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상당히 말귀가 어두운 자더군. 아니면 분수를 모르던가.”
‘퇴짜를 맞았나 보군.’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아마 투스바이언에게도 막시밀리언에게 했던 것처럼 제안을 빙자한 지시를 내렸겠지. 하지만 투스바이언의 성격상 그런 것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당장 그의 직속상관인 사령관 무알 카빌라이드가 명령을 내려도 반발을 할 텐데, 직속상관도 아닌 그의 말이 먹힐 리 없다. 면전에서 욕이라도 안 먹었으면 다행일 것이다.
“참으로 괘씸한 자야. 내 그리 알아듣게 잘 설명 했거늘.”
듣기로 투스바이언이 이끄는 군대는 착실하게 섬멸전을 진행했다는 것 같았다. 거의 매일 수백 개의 수급이 오테론으로 당도했다 하니, 어쩌면 그는 정말 일전에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장대 수백 개에 수급을 가득 꽂아 국경에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이로서 투스바이언은 자신의 용맹과 과감함을 오테론 시민 모두에게 기분 좋게 과시했겠지만, 이는 파비우스 리에론에게는 상당히 열 받는 일이었다. 따로 언질을 주었음에도 그렇게 나온다는 것은 까놓고 말하면 엿 먹으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번만큼은 정말 마음에 드는군.’
사실 군터는 투스바이언에게 딱히 안 좋은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그가 초원인들을 싫어하고, 또 아쿼러즈 역시 싫어하기 때문에 따로 일이 없었어도 사이가 좋지 않았을 뿐. 군터가 본 투스바이언은 단순하고 과격한 군인이었으며, 그는 그런 인간을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 자가 좀 모자란 면이 있습니다. 큰 것을 볼 줄 모르지요. 평생 이런 곳에서 찬바람이나 맞다가 죽을 사람입니다.”
“자네는 그렇지 않다는 말로 들리는군?”
“제 자랑 같아서 겸연쩍습니다만, 저는 상인의 아들입니다. 기본적인 셈은 할 줄 알지요. 또한 군인이라 섬겨야 할 분에게 충직하기도 합니다. 앞 뒤 꽉 막힌 투스바이언과는 다르다고 자평합니다.”
“흐흐흐. 자평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치켜세우면 낯부끄럽지 않은가?”
“상인의 아들이라 상인의 말로 풀자면, 쓸 만한 상품이 있다면 당연히 목소리를 높여 호객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물건일지라도 구석진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누구도 사지 않으니까요.”
“딴에는 그럴듯한 소리야. 그래. 섬겨야 할 자에게 충직하다? 좋군. 자네는 준비가 되었으니 섬길 자만 있으면 된다, 이건가?”
“개인적으로는 그러길 소망합니다만…이끌어주시는 분이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갔다. 방금 전까지 안 좋은 얼굴로 투스바이언을 성토하던 파비우스 리에론이나 막시밀리언이나 모두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렇듯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니 군터는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에 몇 번씩이나 화제가 바뀌고, 덩달아 분위기도 바뀐다. 뭐가 진심이고 뭐가 그냥 던지는 말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힘들군.’
그저 가만히 뒤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군터는 자신이 도저히 이런 곳에는 낄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자 벨리사가 더 보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만 싶었다.
“그거 참 재미있구만 그래. 하하핫.”
“그렇습니까? 하하하하.”
이번엔 또 뭐가 즐겁고 웃긴 것일까? 이 웃음은 진짜 웃음이 맞는가? 아니, 애당초 이 자리에 진심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그것은 이 능숙한 거짓말쟁이들 둘 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 *
“여보!”
오랫동안 못 본 사이 벨리사는 얼굴이 홀쭉해져 있었다. 유리아가 이르길 벨리사가 그가 없는 동안 먹는 것도 잘 먹지 않고 마음 고생을 했다고 했다. 그 흔적이 그녀의 마른 얼굴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어쩐지 가슴 한편이 끓어오른 군터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나보다는 아니었을 걸요?”
“아니야. 이번에는 자신 있어.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당신을 생각했어.”
“에게! 겨우 열 번? 난 백 번도 넘게 생각했는데…….”
나무라는 목소리를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기를 써도 이 여자에게는 이길 수 없다. 실은 이기고픈 마음도 없지만 말이다. 지는 건 싫어하지만, 이 여자에게라면 얼마든지 져도 좋다.
“사랑해.”
“…….”
“듣고 있어?”
“진짜 힘들었나 보네요. 당신은 그런 말 좀처럼 안 하잖아요.”
“그래서 싫어?”
“아뇨.”
벨리사가 군터의 뒷머리를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요. 엄청.”
“자주 해줄게.”
“언제든 낯간지럽다면서요?”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 있지.”
살마드에서 그녀를 데려온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큼직한 상처 하나를 달고 오랜 전투를 치르는 것보다 그녀를 한 달 넘게 보지 못한 것이 더 힘들었다. 그런 고된 경험을 하고나니 그의 생각도 달라졌다. 더 용감해졌다고 해야 할까, 뻔뻔해졌다고 해야 할까. 벨리사가 기뻐한다면 낯간지러운 것쯤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프레드릭이 짓궂은 얼굴을 한 채 옆에서 보고 있다면 모를까, 어차피 듣는 사람도 그녀 하나뿐이지 않은가?
“이번에 포상금을 꽤 받았어.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갈 거야.”
“응? 난 이 집도 좋은데요?”
“새로 갈 집은 더 좋아. 내성으로 들어갈 거거든. 거기라면 당신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어. 아! 노예도 한 명 더 들일 거야.”
“노예? 할렌이요?”
벨리사도 할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유리아와 꽤나 가까워졌기에 간간이 그녀의 아들인 할렌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바 있었다.
“아니. 저번에 말했었잖아. 어린 노예 둘 중에 여자 아이.”
“아아. 기억나요.”
“이사를 갈 집은 이 집보다 더 클 테니까, 당신이 지내보다가 노예가 더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
“근데 솔직히 불편해요. 내가 다른 사람한테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게…….”
아직도 백부장의 아내로서의 삶보다는 주점에서 노래를 부르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그녀였다. 때문에 노예라고는 해도 다른 이들에게 상전노릇 한다는 것이 아직도 영 익숙지 않은 듯했다.
“괜찮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질 거야. 나도 그랬거든.”
“당신도요?”
“난 말단 졸병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백인대장이 됐지. 시간으로만 따지면 졸병으로 구른 시간이 가장 길어.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어땠는지 낯설고 기억도 가물가물 해. 그냥 그랬던 때가 있었지 하는 정도야.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게 편하고 익숙해졌지.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몰라. 근데 원래 그랬던 것 같아. 졸병 시절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고 말이야.”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 역겨운 파비우스 리에론도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그나마 졸병 시절이라도 있었던 자신과 달리,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장군가의 후계자였으니까. 그가 내린 가벼운 명령 하나를 위해 아랫것들이 얼마나 죽어나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해볼 만한 이유나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높은 인간들이란 다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군.’
애초에 높은 자리에 있었거나, 낮은 자리에서 올라갔더라도 그 시절을 다 잊어버렸겠지. 그들에게는 현재의 권세가 전부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마냥 남 욕할 처지는 못 되는 것이 아닌가.’
직접 그 자리에서 동일하게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파비우스 리에론을 욕하는 것도 그리 떳떳하지는 않은 일일지 모른다. 막상 자신이 그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리라고 생각은 했다. 아니면 그리 믿고 싶은 것이거나.
“무슨 생각해요?”
“응? 시시한 생각.”
“시시한 걸 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게. 간만에 여유라서 별 잡생각이 다 드는군.”
모두 쓸 데 없는 생각일 뿐이다. 마치 열심히 달리고 구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들개가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를 보며 ‘나도 날개가 있었으면’하는 것 같다.
“내가 도와줘요? 잡생각 안 나게?”
벨리사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며 물었다.
“어떻게?”
그녀가 팔에서 고개를 빼더니 붉히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이 어미에게 먹이를 달라 보채는 아기 새와 같았다. 군터는 픽 웃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춰주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