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 사냥 -->
여전사들의 실력은 출중했다. 어지간한 병사들보다 훨씬 나았으며, 심지어 그의 부하 병사들대부분보다도 더 나았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그를 막아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커…으윽!”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 명이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끝내 칼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군터의 시선이 피투성이가 된 여전사의 손에서 그 뒤, 이제는 홀로 남은 털옷 여인에게 옮겨갔다.
“당신은 누굽니까?”
“음?”
차분한 목소리에 군터는 순간 멈칫했다. 들려온 말은 제국어였다. 유창하지만 않지만 알아듣기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의.
“보면 모르나? 제국군이지.”
“당신이 든 이상한 창…그것에서 끔찍한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얽매인 무수한 원혼과…그보다도 더욱 어두운…….”
말을 하는 것인지 혼자 중얼거리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던 여인이 갑작스레 휘청거렸다. 군터는 그녀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는가 싶어 경계했지만 그런 것은 아닌 듯, 몇 차례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여인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당신은…당신은 대체 누구죠?”
“이제부터 묻는 건 내가 한다. 그러는 넌 뭐하는 년이지?”
군터는 더 이상 그녀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냅다 말을 끊었다. 그는 이제 슬슬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 있었다.
“저는…뮤잔의 신녀(神女)입니다.”
“신녀? 무녀 비슷한 건가 보군.”
역시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의 창을 보고 중얼거릴 때 알아봤다. 아마도 신녀라는 것은 뮤잔이라는 부족에서 무녀를 부르는 명칭일 것이다.
“…절 죽이실 건가요?”
“그렇다면?”
“살려주세요.”
“으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물론 죽고 싶은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대놓고 살려달라니.
“저는 살아야 합니다. 살려주세요.”
여인의 목소리는 차분한 와중에 진중했다.
“어째서?”
“저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숱한 이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는 살아야 합니다.”
“감동적이군. 하지만 목숨 구걸을 하려거든 얼굴 정도는 보고 이야기 해야지.”
여인은 두툼한 털옷에 어울리는 털모자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앞이 가려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모자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정도. 털옷 밖으로도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 아니었다면 여자인지 소년이었는지 분간 하지 못할 정도였다.
“…….”
군터의 말에 여인이 즉시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렸던 얼굴이 드러났다.
“음.”
군터는 절로 흘러나온 탄성을 서둘러 삼켰다.
얼굴을 드러낸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정오의 태양빛을 받은 초원 같이 짙은 갈색 피부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눈은 머리카락과 같이 진한 검은색이었고, 마치 어린아이의 눈 마냥 맑으면서도 나이 지긋한 노인의 그것처럼 깊었다. 보고 있으면 눈을 뗄 수가 없는 매력적인 눈이었다.
제국의 기준으로 보아도, 초원의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한 미녀였다. 군터조차 순간적으로 그녀를 보며 한 순간이지만 다른 생각이 들었을 만큼.
‘희한한 계집이군.’
단순히 예쁜 얼굴이 다가 아니다.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벨리사를 만나기 전의 그였다면 눈앞의 여인을 본 순간 적의를 거두고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자꾸 목소리에 선 날을 꺾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단지 벨리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고 있을 뿐.
“저를 원하시나요?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군터의 눈빛에서 그의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그녀가 서슴없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군터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물러서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그녀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군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칠게 소리쳤다.
“그만! 집어치워라! 거기 서!”
“왜 그러시죠? 저를 원하시는 게 아니었나요? 저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입 닥쳐라! 내 허락 없이는 입도 뻥끗하지 마!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살기 섞인 경고에 여인은 흠칫하면서도 순순히 멈춰 섰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군터는 진동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자신이 저 계집을 보며 흔들릴 이유가 무엇인가 싶었다. 여인에게 마음이 쏠리는 만큼, 그 이상으로 거부감이 치밀었다. 눈 딱 감고 그냥 지금 당장 목을 베는 것이 낫지 않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자니 아깝기도 한데다, 무엇보다 저항을 포기하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여인을 베기가 꺼림칙스러웠다.
‘설마하니 저 계집이 무슨 수작질을 부린 것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신녀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았던가? 부족의 무녀였던 그의 외조모도 범인은 생각하기도 힘든 여러 조화를 부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드는 것도 순간일 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여인의 시선에서 군터는 한 점 사특함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는데 이쪽 혼자서 난리를 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갈팡질팡하던 마음은 침착하게 몇 번 심호흡하자 평소대로 가라앉았다. 그것은 그에게도, 여인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계속 마음이 심장마냥 두근거렸다면 그는 끝끝내 다시 피를 볼 수밖에 없었을 테니.
“이름은 뭐지?”
“라일라입니다.”
초원에서도 쓰이고 제국에서도 쓰이는 보기 드문 이름이었다.
“따라와라. 그리고…모자는 도로 써라.”
“왜죠? 쓰지 않아도 된다면 쓰고 싶지 않습니다. 답답하거든요.”
“꼭 써야 할 필요는 없다. 날 위해 쓰라는 게 아니니까. 자처해서 곤욕을 치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
대강의 의미를 짐작했는지 라일라는 벗어두었던 모자까지 눌러 썼다.
“허탕만 치는 줄 알았더니 그럭저럭 괜찮은 전리품을 하나 건져가는군.”
“전리품? 저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너 말고 뭐가 달리 있겠나.”
군터는 줄로 그녀의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반대쪽을 자신의 말안장에 걸었다.
“태워주시면 안 되나요?”
“어. 안 돼.”
태워서 가도 된다. 사실 그게 더 빠르고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녀를 앞이든 뒤든 앉히게 되면 가라앉은 마음이 다시 날뛸까 해서였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도 자신이 평정심을 찾을 수 있을지 군터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 * *
해가 떨어진 저녁.
군터는 라일라를 데리고 막시밀리언의 막사를 찾았다.
“왔는가. 응? 그 계집은 뭔가?”
막시밀리언은 막사로 들어서는 군터를 보고 반가이 맞았다가 그의 뒤에 따라 들어온 라일라를 보고 의아해했다.
“오늘 꽤 괜찮은 계집을 얻어서, 대장님께 진상하려고 가져왔습니다.”
“괜찮은 계집?”
“벗어라.”
라일라가 모자를 벗었다. 막시밀리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두터운 털옷까지 벗었을 때, 그는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군터는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막시밀리언을 보고 말했다.
“대장님. 이 여자는 무녀입니다.”
“무녀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술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주술사(呪術士)나 법술사(法術士), 둘 중 어느 것과도 같지 않습니다만.”
“흥미롭군. 그래, 이 여자를 내게 주려 하는가?”
호칭이 계집에서 여자로 바뀌었다. 표정에서도 드러나지만,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예. 이 여자는 그럭저럭 제국어도 할 줄 아니 말이 안 통해 답답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이런. 자네가 내게 이리 귀중한 선물을 주었으니 나 역시 마땅히 보답을 해야 할 것인데…….”
“괜찮습니다. 그간 베풀어주신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셈 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아. 고맙네.”
군터가 막사를 나갔다. 막시밀리언은 다시 라일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일라입니다.”
“라일라. 제국의 이름 같구나. 따로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겠군.”
막시밀리언은 라일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찬찬히 훑었다.
“무녀라고? 군터는 술사와 비슷한 것이라 했으나 말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구나. 넌 어떤 재주가 있느냐?”
“신께서 원하실 때 신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신? 너희의 신을 이름이냐?”
“예.”
“너희 신이 원하지 않으면 통할 수 없고?”
“예.”
막시밀리언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쓸모없군. 결국 신의 인형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냐.”
“…….”
“그 외에 다른 재주는 없느냐?”
“영적인 것들을 조금 볼 수 있습니다.”
“오호. 영이라? 예를 들면?”
“지금 당신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어린 아이를 볼 수 있지요.”
“내 발목? 아이가 있다고?”
막시밀리언이 깜짝 놀라며 아래를 내려 봤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는 다소 의심쩍다는 듯 라일라를 흘겨보았다.
“솔직히 못 믿겠군.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
라일라의 검은 눈이 막시밀리언을 향했다. 막시밀리언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
‘신기한 눈이군.’
사람의 눈을 보며 예쁘다는 생각은 종종 할 수 있다. 하지만 ‘깊다’는 생각은 좀처럼 떠올리기 쉽지 않다. 나이 지긋한, 세상사를 달통한 현인을 마주하면서나 한 번쯤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들을 보며 드는 감상과 지금 라일라라는 무녀를 보며 떠올리는 생각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눈은 마치 깊은 구덩이와 같았다. 보고 있자니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원혼(冤魂)은 아닙니다. 원념(怨念) 정도이겠군요. 때문에 흐릿하게 보입니다만…금발에 옅은 녹색 눈입니다.”
“……!”
막시밀리언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나이는 대략 5살 정도. 어쩌면 그보다 한 살 더 많을 수도…….”
“그만!”
느닷없이 터져 나온 고함에 라일라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막시밀리언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네게 능력이 있음을 믿겠다. 신기하구나. 원념이라 했더냐? 그런 것이 보인다는 것이……. 내 눈에는 분명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건만.”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비틀린 웃음을 지은 그가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어찌 한단 말이냐. 네 그 신통한 능력 덕분에 내 기분이 몹시 안 좋아졌구나. 너를 죽이고 싶어졌다. 네가 가진 능력 중에 내 마음을 바꿀 만한 것이 있더냐?”
“당신의 노기를 가라앉히면 저를 살려주시겠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내가 노하지 않는다면 너를 죽일 이유가 무에 있겠느냐?”
“…….”
라일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막시밀리언의 눈길을 담담히 받아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 * *
군터는 그의 말 옆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주변에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한 부하들이 가득이었다. 그 중에서도 프레드릭은 그의 바로 근처에 팔 다리를 쫙 뻗고 누워 있었다. 전시를 제외하면 딱히 격식을 차리지 않는 군터 기병대이기에 가능한 광경이었다.
멍하니 하늘만 보던 프레드릭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대장님.”
“…….”
“예쁜 계집 구경을 못해본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오늘 구경 했잖느냐.”
“칼 들고서 나 죽이겠다고 설치는 계집 말고, 살살 웃어주는 진짜 계집 말입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뭐냐.”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냥 푸념하는 거죠.”
따악!
프레드릭은 무지막지한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굴렸다. 군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옆에서 풀을 뜯는 말의 갈기를 쓸어주었다.
“아우우…대장님.”
“…….”
“대장님?”
“또 헛소리를 지껄일 참이라면 그냥 넣어둬라.”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 계집, 왜 막시밀리언님한테 넘기셨습니까? 대장님이 한사코 안 보여주셔서 제대로는 못 봤지만, 딱 보니까 상당히 미인인 것 같던데요. 점수 좀 따시려고 그런 겁니까?”
점수를 따려고 그랬냐니, 참 프레드릭다운 질문이었다.
“네 말대로 꽤 반반한 년이었지. 하지만 잘 보이려고 바친 건 아니다.”
“그럼 어째서?”
“그런 년은 보고 있으면 욕심이 생기거든. 그러니 아예 눈이 안 닿는 곳으로 치운 거다.”
“안 닿는 곳이요? 아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던 프레드릭이 다시 또 궁금하다는 얼굴로 입을 뗐다.
“만약 막시밀리언님이 안 받겠다고 하셨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셨습니까?”
“글쎄. 그랬으면…….”
“그랬으면?”
“그 자리에서 죽였겠지.”
“…….”
살짝 안색이 파리해진 프레드릭이 즉각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는 시원하기만 하던 바람이 어쩐지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